편집자 지현이 만든 신간의 뒷풀이. 저자 A는 술기운이 잔뜩 들어간 얼굴로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입니다"란 멘트를 날리며 그들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지현이 다니는 출판사의 편집장 순서. 저자A는 갑자기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나쁜 말은 아니었다.

"아~ 편집장님 우리 지현씨 사람 참 좋은 것 같아요. 어쩜 그리 기분 나쁘지 않게 살살살 녹여가며 제게 원고 좀 고쳐달라고 말을 잘하는지..응? 그것 뿐이 아니라 저자교정지를 갖다줘야 하는데 내가 몸살이 심하게 나서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두 강의는 해야 하니까 내가 학교 가서 마저 좀 정리해서 보낼게요 했더니 아 학교로 오겠다는 거예요? 아 근데 죽을 사갖고 왔네? 아 그때 이미 다 나은 것 같았어요"


편집장 혜주는 그 말을 듣고 지현을 한번 쓰윽 쳐다봤다.

"선생님 우리 지현씨가 어떤 사람인데요. 유능한 편집자입니다. 앞으로 더 잘 봐주세요."


뒷풀이가 끝나고 지현은 무릎이 저렸다. 책 한 권을 끝내고 긴장이 풀리면 늘 그랬다. 지현은 벨을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또 눌렀다. 대답이 없었다. '몇 시길래?' 하고 시계를 봤다.

밤 11시 36분. '뭐야 아직 잘 시간 아닌데..'

"엄마 나야!!" 술기운도 살짝 들어간 지현은 벨을 누르는 대신 문을 세게 쳤다. 드디어 문이 열린다. 지현의 엄마가 막 잠이 들었다 깬 표정으로 지현을 맞는다. 지현은 갑자기 심한 짜증을 낸다.


"아니 엄만 그리 늦은 시간두 아닌데 벌써 자?"

"미안. 오늘 집에 손님이 와서 대접하고 치우고 했더니 피곤해서. 밥은?"


지현은 "대충"이란 말을 흐릿하게 하고선 방으로 들어간다.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는데 이내 큰소리가 들려온다.

"엄마 여기 있던 세안제 어딨어?"

"어 그거? 찌끔 남았길래 내가 쓰고 화장실 청소하면서 버렸는데..."

"찌끔은 무슨 찌끔!! 아 진짜..."


집 안에서 저자 A가 말하던 지현의 매력은 보이지 않았다. 책을 만들고 경력이 쌓일수록 저자와 부딪히면서 생기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 전에 볼 수 없던 공격성을 분출하는 일이 잦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엄마가 자신의 영역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건드린다'고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냥 넘겼을 일들도 날을 세워 따가운 말들을 꺼냈다.


헌데 지현이 그런 자신의 상황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술자리. 지현은 만든 신간에 자신이 줄 친구의 특성을 감안해 메시지를 책 속 면지에 적었다. 지현은

친구들이 다 모이자 휴지를 접어 각자의 자리에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다. 안주로 시킨 파전은 미리 먹기 좋게 찢어놓고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국자질. 국자를 먼저 잡아 친구들의 빈 접시에 건더기와 국물을 담아준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지현은 조용한 웃음과 "허 대박" 같은 맞장구로 모임에 젖어든다. 근데 친구들의 박장대소 속에 지현은 엄마에게 화를 냈던 게 마음이 쓰여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자주 보는 엄마의 카톡 플픽이지만 그 평범한 소개 한마디를 보니 오늘따라 가슴이 먹먹하다.


'지현의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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