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얘 또 이러네' 은미는 아침 일찍 온 카톡 메시질 보더니 기분이 언짢아졌다. 친구인 선형이 보낸 메시진 이랬다. 
'언니 정말 미안한데 나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겨서요. 약속 다음으로 미룰 수 있을까요ㅜ 정말 미안해요'
이런 식으로 약속이 취소됐다 연기되고 어렵게 만나는 일이 다섯 번째. 약속이야 갑작스런 상황이 생기면 취소될 수 있는 거지만 은미는 그런 약속 취소가 생길 때마다 선형을 향해 '쟤 이번엔 어떤 거짓말일까' 하는 마음을 갖는 게 싫었다.

사실 선형이 이런 식으로 약속을 취소하는 건 은미의 경우만은 아니었다. 선형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사람을 워낙 좋아해 오랜만에 본 대학 동창이나 후배, SNS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언제 한번 꼭 같이 밥 먹어요'란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달력에 칠해진 동그라미가 언제부터 선형을 옥죄기 시작했다. 사실 집에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고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책을 보는 게 선형에겐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문제는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기대에서 선형은 자유롭지 못했다. '역시 선형씨가 판을 잘 깔아. 선형씨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모이겠어?'
선형은 친구들 사이에서 신뢰가는 모임주선자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점점 지쳤다. 모임을 세팅해도 정작 모임에서 친구들이 웃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풀 때 자신은 할 말이 없었다. 조용히 차려진 안주만 먹은 채 시간을 보내다 올 뿐이었다. 

선형은 과부하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든 만든 자린 깨지 않고자 아파도 참고 약속 자리엔 있어야지 했지만 조금씩 힘이 들기 시작했다. 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늘어났다. 친구들은 주선자가 빠지면 무슨 재미냐며 그럼 다음에 보자고 연락을 주지만 선형에겐 그게 더 부담이었다. '분명 이 사람들 나 아니면 모임 못 잡을 텐데...'

선형은 약속취소의 기술이 늘어만 갔다. 멀쩡한 아빠는 중병에 걸린 환자가 되었고. 널널한 회사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곳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마음상태가 싫어 하루 연차를 내고 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모임을 위해 만든 카톡단체방의 수를 보고 새삼 다시 놀라 그 방들을 지우면서도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근데 뭔가 마음이 불편해 약속을 취소했던 문자메시지를 쭉 살펴보았다.
가슴이 뛰고 갑작스레 지난날 저지른 큰 실수의 순간까지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음감기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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