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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부부 정남과 혜연 . 각자 일에 바쁜 터라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혜연이 뭔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주말에 소소한 집밥을 차렸다. 그런데 둘 다 서로에게 문제가 있어 걱정하는 건 아니고, 각자 바깥일은 집에선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묵묵한 서로의 표정과 마음이 궁금할 뿐이었다. 혜연이 먼저 용기를 내 집밥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근데 정남은 "와 맛있겠다" 이 한마디 이후 멍한 표정을 한 채 밥알을 하나하나 건졌다. 남편이 조용한 편인 건 알았지만 집에서도 바깥에서도 내내 침울함을 드러내진 않는다고 생각해왔기에 혜연은 정남에게 조금 세세한 질문들을 던져보려고 준비했다. 허나 정남은 먼저 "혜연씨 미안해.  나 조금 잘게" 하곤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혜연의 성격이 이런 순간이 닥치면 "야 내가 힘써서 실컷 차렸는데 이거만 먹으면 어떡해?" 하는 편은 아니고, "어, 그..그래. 안 먹은 거 다시 냉장고에 넣어놔야겠다" 하는 편이라, 혜연은 아무 말 없이 혼자서 자신이 차린 밥을 먹고 설거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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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가 끝난 뒤 혜연은 커피물을 올리고 침실을 조용히 봤다. 정남은 곤히 자고 있었다. 혜연은 남편이 깰까봐 볼륨을 줄인 채 못 봤던 드라마를 챙겨보고 예능 프로도 보았다. 프로를 연달아 보니 이 정도면 됐다 싶어 텔레비전을 끄고 다시 침실을 갔다. 혜연은 정남이 조용히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겠거니 싶은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정남은 또 자고 있었다. 혜연은 속으로 '이 사람 이렇게 잠이 많은 편이 아닌데..' 생각이 들어 정남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정남씨 요즘 무슨 일 있어?" 정남은 처음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잠기운이 스며든 목소리로 "혜연씨. 요즘 회사 사람들이 날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라는 말을 갑작스레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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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은 한 중소기업 F의 팀장이다. 팀장직을 맡은 지 4개월째. 입사 뒤 성격이 워낙 둥글어 '뒷담화'가 원천인 직장 안에서도 소재로 올라오지 않는 '심심하지만 원만한' 캐릭터로 각인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직장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선하다'였다. 이는 정남의 둥글둥글하고 성실한 성격을 그대로 대변하는 '선함'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 정남은 선배들이 새로 맡은 일이 생기면 "선(배! 이번에) 하(시는 일 힘드신 것 있음 저한테) 다(말하세요)"라는 말을 자주 건네곤 했다. 이 말이 하나의 레퍼토리처럼 주변 동료들에게 인식되면서 정남에게 별명 하나 지어주자는 술자리에서의 제안에 누가 이런 축약어를 아이디어로 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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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정남 밑에도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고, 정남은 어느새 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근데 팀장이 되고 나서 몇 주 뒤, 정남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몇 번 겪었다. 남을 도와주는 데 익숙한 처지는 자신이 누군가의 일을 '받아 하는' 사원일 때 가능했지만, 정남은 이제 팀장의 입장. 근데 그는 누군가에게 일을 나눠주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부회의 때 자신의 팀에 떨어진 업무가 있으면, 이를 세세히 공유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일단 자기가 묵묵히 쌓아둔 뒤 '밑에 친구들이 요즘 가뜩 바쁘니 그냥 내가 해버리지 뭐'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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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잘 '분배'할 줄 몰랐던 정남은 혼자 끙끙 앓고 있다가 집으로 일거리를 가져오거나 해서 위에서 시킨 것을 마무리하곤 했다. 혹은 조금 더 마음을 쓴다면 자신이 그나마 터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일을 조금 준 뒤 부탁을 해 일을 마무리하는 형태를 취했다. 이런 업무 방식이 지속되자 정남도 뒷담화 소재에 오르기 시작했다.

"야 우리 팀장은 지만 깔끔하게 일해. 아니 같이해서 만들어가는 맛이 있어야지."

"그러다가 뭐 하나 잘못되면 우리는 벙~쪄서 이게 무슨 일이래? 맥락도 모르고 놀라게 하고 말이야.."

 

한 팀원은 조용히 커피를 마시다가,

 

"아 보통 그런 성격 밑에 있으면, 크기가 되기 어려운데.."

 

라는 말을 던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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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이 이런 팀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허나 자신의 이런 성격이 한순간에 고쳐질 리 만무하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그래서 고민은 커졌다. 자신의 업무 방식 때문에 팀 내에서 제대로 뭔가 일이 처리되지 않아 혼날 때가 생기면, "미안해요 미안해요. 이번엔 제 미스입니다"라는 말이 한 번, 두 번  자주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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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연은 이불을 걷어내고 정남에게 근처 공원에 가서 좀 걷다 오자고 말했다. 정남은 조용히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아내를 따라 나섰다. 혜연은 정남의 손을 잡고 조금씩 공원을 거닐었다. 서로 말은 없었다. 정남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혜연이 웃으며 "힘 좀 내" 하곤 등을 툭 치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했지만, 정남이 짓는 웃음의 쓴맛이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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