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민성(가명)은 몇 달 전부터 동료 석진(가명)의 전화를 피하고 있다. 석진이 주도한 모임을 가면 어떤 부딪히고 싶지 않은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민성은 한때 석진이 부러웠다. 흔히 '넉살 좋음'으로 표현되는 저 둥글둥글한 대인관계도 그렇거니와 처음 만난 사람의 이름도 한 번에 다 외우고, 자신이 만나는 사람에 대한 정보량이 대단했다. 

한데 민성은 석진과 이야기할수록 석진이 분위기를 띄우고자 던지는 상대방의 약점을 소재로 한 유머가 자신과 맞지 않음을 만남이 더해질수록 느꼈다. 민성은 이 유머를 시작으로 석진의 장점으로 생각했던 넓은 대인관계 자체에도 부담을 느껴갔다. 
어느 대학. 어느 학과 어느 교수의 연구테마부터 그 교수의 사생활까지 쭉 훑어내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에 대한 반감도 생겼다.

민성이 결정적으로 석진의 전화를 피하게 된 것은 민성을 둘러싼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정보로 챙겨온 석진이 술자리에서 그 정보들을 풀어버린 어느 날의 일이었다. "너 이 새끼 겉은 얌전해가지고 속은 시커먼 노무 새끼" "너의 그 예의 바름을 내가 다 풀어줄게 임마" 

민성은 뭔가 들킨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부인하고 싶은 감정도 생겼다. 외향적인 석진이 구사하는 가학적 유머가 자신의 방어수단인 연극적 자아를 타겟으로 삼은 순간 민성은 발가벗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부끄러움이었지만 점차 분노로 변해갔다. 허나 대놓고 싸울 수는 없었다. 민성은 기본적으로 심리적 에너지 소비가 싫은 '에너지 절약주의자'다. 그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분노는 부재중 전화 만들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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