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용 -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데이브 히키의 전복적 시선
데이브 히키 지음, 박대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2월
품절


시각 정치의 무도장에서 신성불가침의 이미지란 없다. 모든 이미지에는 영향력이 잠재한다. 형편없는 인쇄 미술작품으로 인해 좋은 정부가 전복되는가 하면, 그 안에 담긴 좋은 사상이 맥을 못 추기도 한다. 즐거움과 힘, 아름다움에 유동적인 뉘앙스를 부여하는 것은 오늘날의 문화적인 환경에서 매우 중대한 문제다. -37쪽

아름다움의 임무는 애호가들을 참여시켜 발언권을 주고 그들의 힘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즉,이미지와 구경꾼이 서로 공유하는 가치의 영역을 지정해준 다음, 이 영역 안에서 그림의 미심쩍은 내용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하여 논의를 개진하도록 만든다. 사물에 대한 구경꾼의 시각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절박한 의도가 없다면, 이미지는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아름다워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친밀한 것의 편안함은 언제나 색다른 것의 두근거림을 품고 있다. 이 융합의 결과가 이상적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설득력 있는 흥분, 즉 시각의 즐거움이 된다. -38쪽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미술의 즐거움에 대한 기준을 제도적 기관에 수용된 군마들 앞에서 왠지 모르게 느끼는 슬픔에 두는 것이 좋은지, 미술작품들을 제작 즉시 미술관에 안치해서 영화를 보러 가듯 관람해야 그 가치가 향상되는지, 그 미술작품들이 안치되기 전에 바깥세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하고 말이다. -41쪽

메이플소프의 작품처럼 구경꾼에게 직접 호소하며 치료기관의 '보호'를 멸시하는 이미지들을 마주 대할 경우, 기관의 정체는 드러난다. 바로 다원적 문명사회의 도덕 고물수집장이라는 것이다. -48쪽

즉,20세기의 우리가 미술작품을 일컬어, 우리가 평생 이해하려 애쓰며 우리가 그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우리에게 무언가 요구하는, 매혹적이며 자율적인 존재물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그저 미술작품의 역할을 재배치해서 성경적 가부장의 전통을 잇는 것이다. 즉 관계가 소원하며 아버지의 책임에 태만한 남성의 역할을 그것에 지우는 것일 따름이다. 비록 미술비평가라도 이런 가학적 무시와 태만으로부터 벗어나 쉼을 얻을 자격이 있지 않겠는가. -81쪽

17세기 전시실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깨닫는 것은 그림 화면의(83)변환이다. 들여다보는 16세기의 창이 그 자리에서 회전하여 내다보는 17세기의 창이 된다. 즉,16세기 전시실에서는 우리가 그림을 들여다보는 입장이지만,17세기 전시실에서는 그림이 우리를 내다보는 입장,즉 우리가 보임을 당하는 입장이 된다. 16세기의 후퇴한 화면은 17세기 그림에서 앞뒤가 단축된 화면이 되고 '여성적'공간은 '남성적'침입으로 바뀐다.-83,85쪽

16세기 전시실에서는 현실에서 벗어나 화면을 통해 이상적인 자비의 가능성 안으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르네상스 시대의 초대가 있었지만,17세기 전시실에 들어서면 바로크 시대의 냉랭한 자연주의는 내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자신을 인식해줄 것을 요구한다. 구경꾼으로서의 우리의 역할은 급격하게 변경된다. 16세기 전시실에서는 우리가 구경꾼이었다.즉,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등 뒤로 후퇴하며 아련히 멀어지는 아르카디아의 '천상의 음문'에 들라고 그들의 초대를 받은,환영받는 손님들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전시실에 들어서면 그와는 반대로, 바라보는 우리가 구경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응시와 환영의 권위에 눌려, 그 그림들의 공간 밖에 꼼짝없이 머무르게 된다. 우리는 높이 걸려 있는 리베라의 성인과 엘 그레코의 성직자, 벨라스케스의 군인 등이 무정하게 내려다보는 피고인석에 위치한다.그 인물들 넘머에,그들의 등 뒤에,신비의 매력이란 없다.피신처도 없으며 쉼도 없다. 오직 어둠만이 있을 뿐이다. -85쪽

이렇듯 이미지와 구경꾼 사이에 맺는 전통적인 계약상의 제휴는(이 계약의 서명자는 아름다움이며, 여기에 표준이 되는 미덕이 있다고 가정하는 일은 없다) 고결하다고 생각되는 미술작품과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구경꾼 사이의 상하위계의 제휴로 대체된다. 이것이 치료기관의 서명이다. -108쪽

16세기의 그 이탈리아인들은 파라고네paragone라는 고대의 미술 담론을 부활시켰다. 파라고네는 서로 비슷한 것들에 대한 논쟁적인 비교를 하고, 그것들을 서로 경합하게 하여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다. '신新학문', 즉 인문학의 열광적 추종자들은 부인할 수 없는 가치의 전형들을 구별해냄으로써 객관적인 기준의 확립을 추구했다. 그들은 분류학적 체계를 세워 디자인과 디자인의 관계,그림과 그림 사이의 관계, 미술가와 미술가 사이의 관계, 장르와 장르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고 재고했다. -116쪽

파라고네가 재확립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미지를 보는 올바른 방법은 그것을 '꿰뚫어 읽는'것이었다. 즉,이미지에 묘사하도록 의뢰된 사건들의 해석을 이미지의 현혹적인 깊이에서 가려내는 것이었다.그런데 파라고네는 그러지 않고, 그림의 실제적 속성과 관념적 속성에 주의를 환기하고 그림은 그림끼리 비교한다. 이렇게 비슷한 것끼리 비교 평가됨으로써 그림들의 공식적인 내용은 여러 경합 범주들(최고의 수태 고지 그림,최고의 출애굽기 그림, 최고의 그리스도 십자가 수난 그림 등)로 분류된다.(116)그렇게 해서 신앙심과 정치적 권력의 공인된 도구들이 사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116,117쪽

나는 전통적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이, 즐거움과 고통이 각기 서로 대립해온 점을 습관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비범한 상황들에 대해 진정 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은 중립적인 편안함에서 오는 진부함이며,이 진부함을 다른 것보다 문제시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둘째,미술시장에 관해 논할 때 내가 '상업'과 자본주의'를 동일시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독자들은 알 것이다. 여기서 상업은 모든 인간 문화의 특징이며 자본주의는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듫을 괴롭혀온 체제를 가리킨다.이것은 사실의 문제다.-173쪽

오히려 메이플소프의 외설적인 사진을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예술작품으로 박제하여 논쟁을 차단해버리는 비평가들의 행동이 히키에게는 반민주적이다.-180쪽

대학 제도 내부로 흡수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 구조주의 철학은 빠른 속도로 진보적 성격을 상실했다. 모든 것을 텍스트로 치환하는 얼치기 기호학 방법론은 젊은 이론가,평론가들을 작품 비평에서 이격시켜 세상 전체를 비평하는 돈키호테로 만들었고, 타자성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페티시즘의 등장은 소수자가 만든 수준 낮은 예술품을 함부로 비판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교조적 탈식민주의 연구의 유행은 똑똑한 연구자들을 근대 초기의 시각문화연구에 묶어두는 부정적 효과를 발휘했다.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이 되자, '바로 지금'의 문제와 작품 자체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좌파 미술사학자, 평론가,이론가는 어느덧 희귀한 존재가 됐다.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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