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경제학계는 크게 두 패로 나뉘어 있다고 말한다.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 진영과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 진영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민물 경제학 fresh-water economics이냐 짠물 경제학 salt-water economics이냐를 구분하기도 한다. 대체로 민물 경제학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보수 성향,짠물 경제학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진보 성향의 학자들이다.사실, 일반 국민이 보기에는 진보 성향의 학자라고 해 봐야 약간 진보적일 뿐이다.민물이든 짠물이든 자본주의 시장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다. -6쪽
사실 수백 년의 긴 역사에서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고질적 실업이나 부동산 투기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 기간은 극히 짧았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경제학원론 교과서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최근 부쩍 높아지고 있는데,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일반 서민이 가장 걱정하는 25%에 경제학자들도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10쪽
요즈음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유난히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단어를 자주 내뱉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시장 원리에 대한 무식을 은근히 비꼬는 말이다.그래서 경제학자들, 특히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일반 대중에 대한 경제 교육의 강화를 외치고 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경제 교육이란, 반기업 정서를 질타하고, 앙꼬 없는 찐빵과 같은 경제학의 기본 논리를 가르치는 교육이다. -11쪽
(전략) 우선 떠오르는 의구심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철저하게 손익 계산을 하면서 합리적으로 행동하는가이다.요즈음 극성을 부리고 있는 성범죄가 과연 복잡한 손익 계산을 거친 합리적 행동일까,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다.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부터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요즈음 신경 심리학자들이나 두뇌 과학자 등 첨단 분야 과학자들도 인간이 과연 그렇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는지를 의심케 하는 과학적 근거들을 무수히 많이 제시하고 있다. 70여년 전 케인스도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일일이 손익 계산을 해가며 합리적으로 행동할 여지는 별로 많지 않다고 주장했다. -12쪽
만일 첨단 과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경제학의 가정은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사실, 이런 비현실적 가정이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실로 오랫동안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했으며 그래서 결과적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담만 일삼게 되었다는 비판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를 경제학자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역시 이들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현실적 가정은 '경제학의 실패'를 낳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12쪽
세계 경제 위기가 터진 직후 2009년 7월 영국 여왕이 경제학 분야에서 영국 최고 명문인 영국정경대LSE를 방문했을 때, 여왕은 이렇게 물었다. "훌륭한 경제학자들이 많은데 그토록 심각한 세계 금융 위기를 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는가?" 어느 경제학자가 대답했다. "여왕 폐하, 경제학은 이제 망했습니다."-14쪽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공정한 방관자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우선, 순전히 개인적인 것에 관해서 공정한 방관자는 자제심을 가질 것, 자신이 세운 규칙을 잘 지킬 것, 자존심을 가질 것 등을 요구한다. 예컨대 금주를 결심한 사람이 저녁 술자리 초청을 받았을 때, 공정한 방관자는 술자리 참석을 자제할 것을 요구한다.사회적인 일에 관해서 공정한 방관자는 양심적으로 행동할 것,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것,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할 것 등을 자기 자신에게 요구한(136)다. 즉, 마음속의 공정한 방관자는 곧 양심이 되며 각기 다른 사람들의 상충된 요구를 공정하게 저울질하는 판사가 된다.그래서 마음속의 공정한 방관자는 각자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136,137쪽
물론,그렇다고 사람들이 항상 공정한 방관자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열정이 강렬할 경우, 예컨대 술 마시고 싶은 욕망이 충분히 강할 경우에는 공정한 방관자의 요구를 묵살하고 술자리에 참석한다.개인적 욕망(열정)에 따라 행동한다고 해서 무조건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각 개인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행위 동기(열정)도 있다. 동정심과 정의감이 바로 그것이다.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보다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며 이 결과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다수의 사람들 마음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동정심이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된다. 그래서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의 서두를 동정심에 대한 이야기로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그만큼 애덤 스미스가 윤리적으로 동정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다. -137쪽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애덤 스미스는 동정심이나 이타심보다는 정의감을 더 중요하게 보았다.동정심이나 이타심이 종잡을 수 없는 것임에 반해서 정의감은 훨씬 더 예측 가능하고 믿을 만하다고 보았다. 그는 대자연이 우리 인간의 마음 속에 정의감을 심어 놓았다고 주장했다.이런 천부적 정의감 때문에 사람들이 공정한 방관자의 요구에 부응해서 도덕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사람들(138)의 정의감이 의외로 강하다는 것을 수많은 실험들을 통해서 보여줌으로써 애덤 스미스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138,139쪽
애덤 스미스는 공평이나 사회 정의에 대한 이런 천부적 감정이 정의의 중요한 원천이며,사회를 지탱하는 주된 지주라고 보았다.정의가 없어진다면,인간 사회의 거대한 조직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자본주의 시장의 경제적 효율성도 사회 정의의 토대 위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애덤 스미스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도덕 감정론》에서 강조한 사회 정의가 확립되어야만 《국부론》의 경제적 효율성이 의미를 가진다. -140쪽
최근 도덕심이나 사회 정의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연구들이 많은 나타나고 있다. 도덕심 및 정의감은 상거래를 활성화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 활도에 소요되는 비용을 크게 줄여 준다.경제학적으로 보면 사람들의 도덕심은 매우 귀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최근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가 부쩍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도덕심의 경제적,정치적 유용성을 부각시켜서 구체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141쪽
완전한 합리성이든 제한된 합리성이든 경제학이 상정하는 합리적 인간은 항상 목적을 뚜렷이 의식하고 있지만, 윤리학자들이 생각하는 일상의 인간은 그렇지 않다. 규칙 및 관례가 의도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의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자신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번화가에서 좌측통행 규칙이 더 이익인지 우측통행 규정이 더 이익지 알기 어렵다.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우측통행이 관례라면 사람들은 그냥 남들 따라 우측통행을 한다. 각 개인의 손익 계산에서는 그 어느 것이나 별로 상관이 없지만, 모두들 우측통행의 관례라면 사람들은 그냥 남들 따라 우층통행을 한다. 각 개인의 손익 계산에서는 그 어느 것이나 별로 상관이 없지만, 모두들 우측통행의 관례를 지켜 주면 모두에게 큰 이익을 준다. 다시 말해서 각 개인이 계산하지 못하는 큰 이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145쪽
윤리학자들은 '공유의 위력'에 주목한다. 즉, 개인적 득과 실을 초월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그냥 바보 같이 규칙과 관례를 따르고 지켜 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이익이 발생한다. 교차로에서 교통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이 개인에게는 큰 불편이다. 그렇더라도 손익 계산을 집어치우고 모두 무조건 교통 신호를 지켜 주면, 질서가 유지되고 사고를 방지해 큰 사회적 이익이 발생한다.길게 보면 개인에게도 이익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장기적 이익과 당장의 불편을 비교 분석하고 나서 교통 신호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규칙이니까 지킬 뿐이다. 교통경찰이 있든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보 같이 그 규칙을 지킨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바람직하다. 이 바람직한 결과는 개인의 치밀한 계산 덕분이 아니라 개인이 손익 계산을 중단한 덕분이다. -146쪽
규칙이나 관례를 다수가 바보 같이 준수해 주는 것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진다. 아마도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공정한 방관자는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규칙이나 관례의 사회적 가치에 대하여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공정한 방관자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 규칙이나 관례는 곧 사회적 규범이 될 것이다. 그리고 각자 마음속의 공정한 방관자는 자기 자신에게 이것을 지킬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146쪽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주어진 목표를 최소의 희생(비용)으로 달성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합리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선호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147쪽
애덤 스미스는 인간 심리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경제 현상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그를 경제학의 시조라고 추켜세우고 있지만,그의 이론에는 현대의 경제학과는 달리 경제학과 심리학 그리고 철학이 불가분의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0여 년 동안 정통 경제학자들은 《도덕 감정론》의 가르침은 알지 못한 채, 《국부론》의 가르침만 발전시켰다. 그런 가운데 경제학은 심리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버렸다. 심리학은 고도로 발달된 실험 방법과 통계 분석에 의거해서 실제 인간의 행태를 연구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학문으로 발전한 반면, 경제학은 고등 수학을 이용하여 이론을 정교화하는 추상적 학문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현실의 인간 행테에 바탕을 둔 실천적 학문과 결별하고 경제학이 독자적인 길을 걷다 보니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비현실적 학문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63쪽
주류 경제학은 가치와 가격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상품의 가치는 시장에서 얼마에 사고 팔리는가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가격이 곧 가치를 반영한다고 본다. 경제학 교과서는 가격이 수요와 공급 곡선이 균형을 이루는 수준에서 결정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수요 곡선은 해당 상품이 우리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정도를 반영하며, 공급 곡선은 생산비를 반영한다. 주류 경제학의 주장에 따른다면, 인간 욕망과 생산비가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셈이다. -250쪽
대체로 일반 서민들은 가격과 가치는 무언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도 가치와 가격을 엄격히 구분했다. 간단히 말하면, 가격은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고,가치는 물건을 만드는데 흘린 인간의 땀과 수고를 반영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에 의하면, 가치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가격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가치는 본질에 해당하고, 가격은 현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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