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콘 <생활의 발견>이 화제라고 한다. 사실 이 코너가 지향하는 개그 컨셉이 그리 색다른 것은 아니다. <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두 분 토론>처럼, '생활을 읊는 개그'는 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 같다. 어쩌면 <생활의 발견>은 이런 개그 컨셉이 대중들에게 가장 잘 먹힌다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코너인지 모른다. 개그맨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그란 것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같아서 우리가 배를 잡고 웃는 장면이 결국 우리의 삶 그 자체임을 확인하는 과정임은 여전히 신기한 대목이긴 하다. (나처럼 '진지함'세포가 온 몸에 박혀서 타인을 웃기려는 능력이 없음을 '자학'하는 사람에겐 그 신비감은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 개그를 평할 때, 우선 '일상성'이라는 용어를 갖다 쓰면서 그것을 '미덕'으로 간주하는 시선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90년대스러운 것'같다. 다만 '일상성'이란 용어가 그동안 한국의 영화비평계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달라진 위상을 갖게 되었는지 검토해 보는 것은 내가 <생활의 발견>과 같은 개그 컨셉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줄 것 같다.  

 

# 2 -1

한동안 한국의 영화비평계는 '일상성'이란 용어를 무척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렴풋이 내가 이 용어에 대한 궁금함을 갖고, 이 용어가 자주 들어간 한국 영화를 찾아보던 때가 1990년대 후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영화잡지를 뒤적거리면서 나는 '일상성'이란 용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 줄 몰랐지만 이 용어가 자주 들어가 있는 영화들을 보면서 "아..이런 게 일상성인 것인가" 수준으로 그 용어를 '어림짐작' 알고 있다 생각했다. 이 용어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알지 못하고 같은 진부한 죄책감 놀이에서 벗어나 당시 이 용어가 반영되던 영화 특성에 대한 담론을 살펴보면 우리의 '지루한' 삶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 그런데 그것을 스크린을 통해 확인하는 '나'가 받는 어떤 놀라움, 작은 재미들에 대한 재치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이 용어가 흥하면서 영화배우들이 우리처럼 손톱을 깎고, 기계치인 아버지에게 텔레비전 트는 방법을 알려주고, 서로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들이 '소소하게' 펼쳐지는 상황 같은 것이 더 미세하게 다른 영화들에 퍼져 나갔다. 누가 일기를 써보라고 하면, 그 일기에 "오늘 나는 아침부터 뭐 했고, 점심엔 뭘 했고..."같이 적는 것처럼. '일기'같은 영화들이 한 때 유행이 되었다.  주류의 이런 정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정서 전염'처럼 계속 확산/전파되어 단편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규범'처럼 나타나기도 했다. 일상을 낱낱이 보여주기, "아, 맞어 정말 우리 이렇게 살잖아"라는 말이 나오게끔 만드는 장면을 재현하기가 저널리즘 영화비평계의 찬사를 구할 수 있는 수단, 미래의 박찬욱, 봉준호를 꿈꾸는 이들이 한국의 이런저런 영화제에서 입상할 수 있는 '창의'로 간주되기도 했다. 

 

   

 

 

 

 

 

 

 

 

# 2-2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널리즘 영화비평계에서 '일상성'이란 용어를 미덕의 흔적이 아닌 퇴보하는 영화의 흔적을 찾고 싶을 때 쓰기 시작했다. 정확히 어느 시기, 어느 영화라고 다 지칭할 수 없지만 비평가들은 '일기'같은 영화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공교롭게 그런 시선을 접할 때 나 또한 '일기 같은 영화'에 진부함/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조금 '입맛'이 까다로워졌다고 할까. 일상을 스크린을 통해 '보고'받는 것 이상의 의미를 얻고 싶었다. 내겐 그 작품이 에릭 로메르의 <비행사의 아내>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스토리와 그 의미를 구구절절히 읊기 보단, 뭐라고 할까. 일상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지만 어떤 '정신착란적'인 행위들이 영화 속에 드러나는 것. "에이 또 그 이야기야?"와 "에이 설마 일상에서 저런 일이 있을까?"라는 그 질문 사이를 왔다갔다 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는 영화(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를 그래서 가끔 다시 찾아본다)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 3 

사실 요즘 흥하는 개그 컨셉을 보면 '정신착란적'인 캐릭터가 주는 야릇한 웃김은 없어진 것 같다. 대부분 웃겨야 한다는 강박 속에 나오는 것은 인기 있는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 그 자체, 혹은 그 자체를 보는 우리들. 마지막으로 그런 우리들이 겪은 미세한 에피소드를 그대로 보고 하는 개그가 뜨기 위한 전략으로 나타나고 있다. 내가 전문적인 개그맨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건 건방지고 웃긴 일이지만, 적어도 이런 개그가 흥하는 데 있어 그 공감을 채우는 대중의 특성 같은 것은 나름대로 내 색깔을 칠해볼 수 있겠단 생각을 해 봤다. 난 그것을 '말적인 몸'이라고 스스로 이름붙이고 싶다. 

'말적인 몸?' 요즘 개그가 '몸'이 아닌 '말'이 대세란 것은 다 느낄 것이다. (어쩌면 '몸개그'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은 '몸'을 통해 웃긴다는 영역이 그만큼 작다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짝짓기 프로그램이나 심지어 우리네 소개팅에서도 말로 웃기는 사람은 매력이 급상승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이런 개그를 의식하고 내 개그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연구를 일상 속에 하기 시작했다. 유머러스함이 듬뿍 담겼다는 타인의 재주를 글자로 / 말로 확인하면서 우리가 평소에 해 왔던 일들을 남을 웃기기 위한 의도로 혹은 우연하게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대형 커뮤니티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일상 속 웃기는 이야기라며 글을 올리고 수많이 달린 덧글 속에서 자신의 웃기는 능력 있음/없음을 확인하는 것은 인터넷 언어가 글과 말의 중간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그 진부한 커뮤니케이션학적 관점을 대입시켜보는 것을 넘어, 일상 속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을 '개그'의 코드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을 웃기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하고 있음을 엿보게 된다. 

 

# 4  

사람은 입이란 신체기관이 있어 그 기관이 전담하여 '말'을 표현하고 있지만 가끔 <생활의 발견>과 같은 컨셉의 개그를 보고 있자면 개그맨의 퍼포먼스 자체가 사람의 말과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개그맨 A는 남자 친구 역을 맡은 개그맨 B와 함께 고깃집에 가서 삼겹살을 '우리 처럼'시키며 삼겹살을 시킬 때 우리가 쓰는 생활의 언어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의 몸짓은 내게 '몸'보다는 '말'로 느껴진다.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도 개그이지만 그들의 몸 전체가 '말'로 느껴진다는 기분이 보는 내내 들었다. 그러다보니 이 말이 주는 논리적인 치밀함이라고 할까? 개그맨 특유의 '웃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미리 배치된 그 논리정연한 치밀한 퍼포먼스가 '말 잘하는 사람'이 흔히 치는 개그 이상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느샌가 그들이 인정받는 개그는 우리네 일상에서 당연하게 일어난다는 그 굴레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부리고 싶은 욕심은 그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을까?에서 출발한다. 갑자기 터지는 작은 광기, 그러나 그 어색한 놀람 속에 이후 충분히 해석 가능한 행동들.  

"패밀리 레스토랑"과 "김밥천국"의 대립 구도, 항상 계산지는 남자 곁에 두는 점원의 행동'에 대한 발견,  백화점에 가서 남자/여자가 보이는 구분된 행동 등등등 우리의 / 우리가 찾는 개그가 늘 '남녀탐구생활'같은 관점에  치중되어 있다는 건 이 상황 자체를 '웃김의 강박'을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 하는 일상 속 사람들의 강박은 아닐런지. 그 강박을 '웃겨야 함'을 업으로 하는 개그맨들이 더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닌지. 어느 문화평론가의 글 제목처럼 "웃으라고 윽박지르는 세계"에서 우리의 일상을 빽빽하게 전하는 이 '말적인 몸'같은 개그를 통해 내가 요즘 웃고 있는 건 거기서 감지되는 '웃음'에 숨겨진 슬픔 때문이다. 

아직은 덜 여문 이야기. 해석은 각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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