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올곧지만 무기력한
<대학의 몰락>은 “이 시대에 적합하고 수용 가능한 대학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지”(9)를 묻는 책이다. 그리고 그 물음을 위해 저자가 동원하는 것은 역사적 접근이다. 책 속에서 역사적 접근은 대학의 ‘변질’을 고발하는 주요 방식이다. 원래 대학은 이런 모습이었는데, 오늘날의 대학은 이렇게 변하였다는 사고는 ‘대학의 몰락’이라는 제법 묵시록적인 책의 제목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정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석’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본 책에서 저자는 깔끔한 도식을 만들어낸다. 저자가 책 속 도식에서 강조하는 잣대는 ‘세상과의 비판적인 거리라는 조건’(27)인 듯하다. 오늘날 세상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침윤되어 있고, 여기서 대학도 무관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대학이 추구하는 학문적 이상이 시장의 아이템으로 절하되고, 이러한 대학은 현실과의 불화를 더 이상 꾀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 저자는 시종일관 이 주장을 밀어붙인다.
그러나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오늘날 이러한 주장과 그 주장을 위해 쓰이는 저자의 서술 방식이 ‘대학의 위기론’을 진단하는 전략으로서 무기력함을 숨길 수 없었다. 좀 더 나아가자면 이 책은 요즘 횡행하는 ‘~의 인문학’과 같이 ‘인문학’을 ‘생활용 교양’으로 취급하려는 사회적 분위기에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들었다. (조금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책 뒤에 적힌 네 분의 추천사도 이 책을 ‘정직하게’ 판단하고 쓴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했다)
# 2 ‘인상 깊은’ 현실이 아닌 ‘인상만’ 남은 책 속 대학
특히 저자가 언급하는 대학 내 현실에 대한 문제점들이 큼직하다보니 그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언어들도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굳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굳은’ 언어는 그 어떤 문제점들이 닥쳐도 주변 상황에 개의치 않은 채 ‘성스러운 비판적 사유’를 전개하겠다는 ‘ 옳은 태도’를 보여주는 데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옳은 태도’는 “자본과 시장과 경쟁이라는 이 시대의 대학의 우상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260)는 주장 그 자체의 올곧음만을 도드라지게 하는 데만 그 가치를 다한다고 느껴졌다.
저자는 ‘대학의 기업화’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거리(distance)의 힘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 ‘거리의 힘’은 오늘날 대학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대학- 현장’과의 간극을 드러내는 한계로 작용한 듯 보인다. 물론 이것은 대학의 잘못된 현실을 꾸짖는 데 있어 ‘대학의 이상과 목적을 질문하기 위한 사유’라는 실천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책이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이 처한 생활상, 구체적으로 ‘대학생’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사회상에 관련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인상이 짙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아쉬웠던 점은 2장 ‘대학의 역사에서’와 3장 ‘대학과 철학’을 위해 할애한 저자의 ‘논리적 에너지’가 결국 대학의 현실을 ‘인상 깊게’ 살피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인상만’ 살피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 3 대학, 조금 더 들어보자
저자가 ‘대학의 몰락’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방편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에 맞는 ‘몰락의 징후’혹은 ‘몰락의 현실’들을 더 듣고 챙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이것은 비단 저자뿐 아니라 근래 ‘20대 담론’과 엮어 ‘대학의 위기’를 논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학점 쌓기? 토익 공부 치중? 경영학의 인기? 취업난? 경쟁? 효율성? (이미 많은 논자들이 제기하였듯이) ‘대학의 위기론’이 하나의 담론적 유형으로 우리 사회에 인식되면서 그러한 위기론을 강조하기 위해 드는 사례 혹은 개념들도 너무나 안이하게 관습적으로 분류, 배치되고 있다. 이러한 분류, 배치를 통해 문제가 되는 것은 ‘대학의 위기는 이 정도 알았으면 되었다’로 섣불리 귀결되어 이후 기계적으로 제시되는 온갖 해결의 언어들이다. 여기서 대학의 위기에 대한 ‘해결어’(특히 ‘20대 담론’과 묶어서)에 대하여 정작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꼬집어 볼 대목이다.
관심 있는 사람은 알다시피, ‘대학의 위기론’은 ‘20대 담론’과 마찬가지로 말하기 신난 사람들만 더욱 신난 구조가 지속 되고 있는 것 같다. 이를 통해 대학을 감싸고 있는 문제들을 더욱 끌어내지 못함으로써 문제점들을 단순하게 유형화시키고, 그 문제점 안에서만 대학의 몰락과 동시에 대학생의 몰락이란 비난 섞인 비판이 온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인기 있는 대화거리가 되었다.(여기서 인기 있는 이유가 ‘재단하기 쉽다’와 유사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대학의 몰락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학에서 힘겹게 ‘생존’하고 있는 자들의 언어를 더 듣고 모으려는 진심어린 노력이라고 본다. 이 정도면 다 들었지 않았는가,라는 오만함을 버리고 대학 내 현장의 언어를 당사자들이 더 말하게 함으로써, 그 말함의 표출을 ‘분노의 힘’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 인문학은 너무나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넘친다. 정작 ‘말하도록 돕는’ 인문학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저자가 “인문이라는 학문의 언어는 원래 고백과 증언의 언어였다”(51)라는 언급한 대목을 지나칠 수 없었다. 단, 대학의 문제를 논함 가운데 이런 고백과 증언의 언어가 ‘대학의 위기론’을 설파하는 사람들만이 확보한 제한된 권리로만 행사된다면 유감일 것이다. 이는 정작 ‘인문학’의 길이 아니라 ‘인무(人無)-학’의 길로 빠지는 지름길이 아닐까.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면서도 ‘대학의 몰락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더불어 걱정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은 이 책을 통해 느낀 유감이자 이 책에서 얻게 된 어떤 교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