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좀 '의미있게' 보고 싶은 사람들, 영화보다 '영화-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조금씩 내가 걸어온 여정을 나누고자 한다. 이러한 여정에 담겨진 이야기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수도, 또 그런 이야기들을 조금 더 깊이 판 사람들의 이야기일수도, 아니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딴 세상 이야기일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밝히자면, (영화 연구라는 자장 안에서) 영화를 '사회학적'으로 보는 사람이다. 이것은 오래 전 문화연구의 영향을 받아온 덕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나는 문화연구가 이제는 '미학'에 다시 접근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미학은 어두운 시네마떼끄 안에서 고립된 영화적 묘미를 즐기는 영화광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개념이자 현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주장한다.
이번에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사회학적 시각이 영화의 미학, 특히 영화의 존재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자 했다. 앙드레 바쟁은 문화연구자들의 적이 아니며, 오히려 바쟁의 '완전영화의 신화'와 같은 글들은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다시 해독해봐야 할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영화 연구를 한다는 것은? 영화학자 패트릭 필립스의 이야기대로,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하고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영화 연구의 역사는 사실 이게 전부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충돌, 결합되어 왔고, 우리는 수혜자로 살아가며 새로운 길을 모색할 기회를 잡았다.
영화 연구는 장르, 텍스트, 스타, 산업을 비롯한 다양한 대상들을 연구 과제로 삼아왔지만, 무엇보다 '관객성(spectatorship)'을 둘러싼 견해의 충돌, 누적은 영화 연구가 걸어온 여정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영화 이론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관객성 연구'는 스크린 이론을 둘러싼 순응과 저항, 그리고 그 틈을 벌려 보다 문화적이고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고안된 '영화 수용자 연구'로 전개되어 왔다.
학문을 '잘'하고 싶다면, 무엇보다 필요한 건 언어에 대한 민감함일 것이다(나는 아직도 모자르지만). 영화 관객과 영화 수용자는 그래서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 개인의 시각일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학문적인 검증 안에서 공개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 견해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다양한 책이 있지만, 비교적 쉽게 이 개념을 정리해놓은 패트릭 필립스(phillips,1996)의 <spectator, audience and response>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필립스의 의견에 따르자면, 영화 관객성 연구는 어두운 극장에 들어선 개인이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위치지어지는 방식을 탐색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히 '영화적 장치'라고 하는 스크린 이론의 강령은, 영화를 보는 관객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하는, 구조주의적 접근과의 만남을 선언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개인 - 영화'의 만남, 그러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영화에 대한 감정은 영화를 '시네마'라는 명칭 안에서 특별하고 위대하게 만들어보이도록 했다. 영화는 일상생활과 격리된 경험 그 무엇이었고, 그러한 특수성을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영화 연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영화 수용자라는 것은, '수용자(audience)'라는 명칭을 자주 쓰는 문화연구의 탐독을 필요로 한다. 수용자라는 개념을 자세히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으로 데니스 맥퀘일의 <매스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거칠게 정리해보면, 영화 + 수용자의 결합은 영화의 특권적 경험 대신 '일상 안에 놓여진 영화의 위상과 그것을 규정하는 사람들의 소비 행위'를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영화 소비'(film consumption)'는 영화 수용자를 연구할 때 애용되는 개념으로써, 극장 이외의 경험, 특히 '가정'에서 어떻게 영화가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설명할 때 요긴하다. 이것은 VCR,DVD,케이블 TV, VOD, 다운로드 등의 소비 경험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영화 관객'에서 '영화 수용자'로 전환되는 과정은, 영화 연구에서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필요한 과정들, 보는 것과 함께 가는 다양한 실천들이 고려된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수용자의 실천은 '애매모호한 자유'와 맞닿아 있다. 이것은 영화 수용자의 행위를 다른 한 편에서 규정하는 시장의 힘 때문이다. 영화를 만들어내는, 그리고 영화 수용자의 다양한 영화 문화를 생산해 내고, 그것에 민감하게 접근하는 기업의 행위는 한편으로 새로운 영화 수용자 연구의 딜레마로 작용한다.
시장의 엄청난 조사 능력은 영화 수용자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듯 하지만, 그 자유는 사실 진정한 수용자의 자유는 아닌 상황. 디지털 시대를 맞아, 영화의 존재론을 영화 경험과 함께 사유하는 유명한 학자, 토마스 엘세서 같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동료들을 모은다. 가령 앨세서는 DVD의 서플먼트가 보여주는 풍성한 정보, 영화 잡학이 영화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려는 이들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한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 테크놀로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영화에 대한 소유'는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 안에서 영화의 미래를 모색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영화는 '핫 미디어'이기 때문에, 그 참여도가 적은 매체라고 했지만, 시대는 맥루언의 의견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하는 중이다.
영화를 접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지성의 망안에 포획하려는 것이 나 같은 놈의 일상사지만, 결론은 결국 내 망에 가두어지지 않은 이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자유를 보존해주는 것이리라. 이번 논문에 담긴 내 신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