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마지막 정리로 도통 책을 못 읽었다. '읽었던 책'을 또 읽고, 또 읽고. 그러면서 문득 생긴 '지겨움'이 일종의 구취처럼 느껴질 때까지, 또 그렇게 여러 글자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지만, 세상을 '읽는 것' 또한 게을리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가장 가슴에 와 닿는 풍경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연금 정책 반대 시위'다. 이런저런 소식통들을 접해보니, '프랑스적 저항의 전통'에 맞게, '10대들의 분노'가 포커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어느새 '진부한 부러움'이 된 듯한 표현. "아,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우리나라 십대들, 이십대들은 게임방 가기 바쁜데.."와 같은 비교는 하고 싶진 않다. 차라리, 그런 비교 자체로 시작되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어떤 맥락에서, 이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 '차갑게, 냉엄하게'볼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암튼, 결국 이것은 '교육'의 문제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교육의 뿌리'라고 하는 말이 더 적확할까.  

 

 

 

 

 

 

 

 

'근대'라는 개념이 성립되면서, 그 근대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사람의 '발명'이란 줄을 놓지 않았던 필립 아리에스 같은 학자들의 의견을 나는 부정하고 싶지 않다.  '청소년'이란 건, 지금 이 순간, '그저 그 시기에 그렇게 살아가는 젊음'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 이것은 우리가 '앎'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지혜가 아닐까. 

우리의 아이들은 늘 '관리'받아왔고, 또 그렇게 '돌봄'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있다는 시선 아래 놓여져 왔다. 사람들은 아이들의 '조숙함'을 감탄의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한편으론 그러한 '조숙함'을 하나의 유희적 대상으로 다루어 왔다. 아이들의 똑똑함은 그 스스로의 독립적인 영역이라기보다는, 결국 '어른'이라는 선에 다가올 즈음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는 '신기함'으로만 치부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조숙함'이란 표현은 없어져야 한다고 본다. 저들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른들의)시위'에 동참한다 말인가!"라는 말 자체는 거부되어야 한다. 오히려 이런 시선이 조장하는 건, 그들의 의지에 그 어떤 의미를 덧붙임으로써, 그들이 '어른의 세계'에 진입했다는 거북한 통과의례의 형성이다.  

내가 진정으로 저 시위에서 부러운 것은, '잘못된 것'을 고쳐보겠다 나서는 사람들의 실천, 또 실천이다. 일단 실천 그 자체에 대한 부러움만이 가득하다. 고로, 저 풍경에서(그 어떤 세대적 강조 같은) 신기한 것은 없다. 아직, 인간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살만한 자격이 있다는 감사함, 그 하나의 확인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스스로의 책임감 같은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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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1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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