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1996.2). 영화에서의 세 개의 삼각형, 사랑과 작가주의의 시장 속의 근심. 키노. 

영화에 관한 '팝콘'지식이 온 세상을 설치고 다니며, 꼼꼼한 성찰과 그로부터 지혜를 나눠주는 철학은 능멸당하고,장사꾼들과 싸구려 매스컴이 결탁하여 거짓된 흥분을 일거에 창조(!)해내고, 온갖 기업들이 영화에 뛰어들었다는데도 한국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힘들다는 비명이 터져나오고, 영화 전도사들은 신앙처럼 영화를 내세워 혹세무민하지만 거기 영화를 위해 순교하려는 믿음은 없으며,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관한 담론만이 우리 곁을 유령같은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중략) 마지막으로 영화라는 구경거리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근심에 대한 공격에 남아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나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공격하는 방관자들입니다. 영화는 이미 우리 사회의 중심에서, 뉴 미디어의 시장 속으로 뻗어 나아가, 일상생활 속으로 스며들어, 사회 전체가 영화라는 구경꺼리와 서로 겹쳐고 옮겨져 더 이상 경계를 나눌 수 없을 만큼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산업의 중심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정성일(1995.8). 살아난 영화시체의 여름 밤, 또는 이레이저 시네마.키노. 

영화가 종합예술이었던 적은 없으나 언제나 종합적인 노동이었던 것은 영화의 시간과 관계한 것입니다. 치밀하게 나뉘어진 배급 구조의 순환체계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시장의 분할은 영화(들) 사이의 영화관을 내세운 싸움입니다. 여름은 여기서 특별한 시간입니다. 영화에서 여름은 계절이 아니라 시간으로서의 시장입니다.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여러가지 형태의 휴식(방학에서 휴가까지)이 주어지고,집단적인 휴식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영화관을 확장된 시장을 형성하고, 영화는 휴가를 소비하는 상품으로 우리 앞에 치욕스럽게 열거됩니다.  

정성일(1996.8). 행복의 원리로서의 영화,영화에의 위협으로서의 불행.키노.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영화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비디오라는 물적 형태 속에서 아주 끔찍할 정도로 훼손당해 있었습니다.우리는 매일 불량품에 지나지 않는 비디오를 보며 발견과 감동이라는 자기최면에 빠져 있었으며, 그나마 발견된 비디오들은 매우 불합리한 유통구조 속에서 빠른 속도로 멸종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비디오를 통해 자기증식을 하고 대중 속으로 뻗어나아가는 대지 속의 줄기이며 영화광들의 기억 속에서 부활하는 영원불멸의 행복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영화를 배신하고 원본의 감동을 증발시키고 그래서 감동의 순간을 회의하고 의심하며 기억 자체를 망가뜨리는 기계장치로 유포되고 있음을 지켜보는 정말 참기 힘든 '비디오 감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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