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KINO.1995.5.영화의 지나간 100년, 키노의 새로운 101년.  

우리에게 1995년이 중요한 것은 세 가지 이유입니다. 그 하나는 영화의 한 세기를 맞이하는 축제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전쟁과 두 개의 혁명 그리고 수많은 우리 세기의 기록 속에서 영화는 그 영홈을 담고 살아남아 우리 앞에 선 것입니다. 그건 정말 기쁜 마음으로 안고 함께 건배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나 근심하는 것처럼 영화의 죽음을 맞이하는 뉴 미디어의 묵시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인공위성과, 디지틀과 비디오와, 케이블과, 게임과 인터랙티브와, hdtv  앞에서 산산히 사지절단 당하고 찢겨나가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제 더 이상 그 경계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자기 해체의 과정을 밟아가고 있고, 그것을 움직이는 논리는 전지구적 규모의 자본과 정치의 이윤추구라는 용서없는 법칙입니다. 

정성일.KINO.1995.7. 전략으로서의 영화의 개입 그리거 이데올로기로서의 영화. 

이제 영화는 자아가 없는 자본의 법칙에 따라 미디어의 속도 속에서 중심을 끊임없이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해관계는 친구와 적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생산해낸 질문은 소비되는 이해관계의 즉자적 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제 질문은 이해관계의 반영으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진실과 영화-시스템 사이의 긴장관계를 어떻게 위치할 것인가라는 입장에 관한 것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중략) 그 다음 영화에 맞서는 진영. 이들은 영화의 바깥에서 거꾸로 영화의 경계를 세우려고 끊임없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방에서 시도합니다. 이해관계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매우 비판적이고 때로는 세계관에 관한 논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화를 경멸하고, 기이한 대중주의를 끌고 들어와서 영화에서 반 엘리트주의를 선언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략) 더 나아가 영화가 지식과 결탁을 맺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언가 수상쩍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화적 허무주의의 유행에 따라 반 엄숙주의를 내세워서 영화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성찰과 진실까지도 한낱 허깨비와 같은 것으로 죽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질문은 종종 정치적이거나 아니면 권력에 관한 시도가 됩니다.  

정성일.KINO.1998.2. 희망은 유령이 아니다. 영화를 떠나가는 사람들 뒤에 남아서 누가 진정 영화를 위해 남을까. 

우리는 영화가 죽어가고 있는 시대에 (영화의 죽음을 선언한 것은 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불현듯 영화가 모든 유행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보였습니다. 갑자기 직업을 바꾸는 사람들도 생겨났고, 날조된 전문가들이 사방에서 유령처럼 출몰하고, 그들이 영화에 대해서 강의하고 별점을 주고, 심지어 이리저리 참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문학이나 연극, 또는 미술에서 우리는 그런 기이한 현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영화와 록 음악 만이 90년대에 전문가를 과잉생산하는 현상을 가져왔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들이 영화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정말로 그러하다면 우리는 그들을 기꺼이 응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영화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내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자본에는 노동을 끌어들이는 원심력이 존재한다는 베른슈타인의 지적은 더 없이 적절한 것입니다. 영화산업은 더 빨리 영화를 소비하기 위하여 더 많은 영화담론들을 만들어내야만 했습니다. 기꺼이 언제나 동조하는 노동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건 생산과 소비의 이안삼가경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전략은 언제나 느리게, 더 느리게였습니다. 그것만이 소비의 경주로 말려든 그 가속도의 생산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자신에로 돌아와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런데 갑자기 외부적인 이유로 영화의 소비의 속도가 방향을 뒤틀고, 그 토대의 변화에 의해 감속현상을 일으키는 산업 속에서 영화담론들의 생산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영화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이상의 이윤을 창출하지 않을 때 여기에 남는 것은 정말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더 이상 자본으로 전화되지 않고, 더 나아가 권력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할 때 죽어가는 영화를 위해서 그 누가 남을 것인가라고 다시 질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정말로 어떤 형식으로건 영화가 산업과 서로 함께 기생하고 동거하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 이상 영화에서의 순수주의란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영화는 그 스스로 어떤 방식으로건 소비되기 위하여 우리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에 관해서 더 많이 알고 그것을 통해서 퍼즐을 풀고 남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서로 만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영화의 소비주의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정성일.KINO.1998.4. 가난한 영화보기를 위하여 세가지 희망, 그 희망의 원리에 관하여. 

우리는 영화관 앞에서 망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문화이지만, 영화관은 산업입니다. 당신이 영화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 입장료는 분명히 당신이나 당신의 가족, 아니면 그 누군가가 낮에 흘린 소금의 댓가를 치루고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전에 그 영화에 대해서 거리를 갖고 비판과 반성의 사유로 다시 물어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영화관람에 대해 작은 성찰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는 것은 선택입니다. 자신의 선택의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거기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부터 비로소 영화를 보러가는 행위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으로 올라서는 것입니다. (중략) 두번째는 영화를 보는 기회의 상대적 박탈입니다. 정말로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영화를 모두 볼 수 있을만큼 여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며,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영화를 볼만한 좋은 영화가 많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은 정말로 소비의 속도에 휘말려든 나머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새로운 경험의 차원에서 벗어나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리며 더 나아가 현실로부터의 상대적인 박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영화의 속도는 좀 더 늦춰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본 영화를 충분히 다시 생각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삶 속에 그 영화의 경험이 새로운 정서를지닌 자세로 창조되어지도록 이끄는 의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영화로부터 이제 다소 멀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일상생활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의 소비의 속도를 뒤따라 가는 것입니다. 영화관 앞에서 망설이고, 더 나아가 자신이 본 영화를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그 속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좌표를 설정하고 그 위치로부터 영화를 다시 물어보는 것입니다. 영화는 언제나 현실로부터 일정정도 멀리 떨어져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는행위가 현실로부터의 꿈이면서 동시에 각성이 되기 위해서 그것은 언제나 으미있는 체험이며 더 나아가 현실로부터의 거리 지우기를 통해 얻어지는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구성이며, 현실 곁에서 얻어지는 세상의 미적인 형상들에 대한 발견의 순간이어야 합니다. 

정성일. 로드쇼.1991.3. 거짓말장이들에 관한 두세가지 경향. 

우리는 영화를 사랑하며, 그래서 영화에 편들기로 결심한 이들의 진영에 서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주변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잡귀들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영화를 여전히 구경거리 잡동사니 정도로 생각하고 있거나 심지어 잡담에나 써먹는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첫번째, 여기에 해당하는 잡귀들은 이런 식으로 유혹을 시작합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비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그럴 때면 영화등은 사운드 트랙을 틀어놓고 험프리 보가트나 잉그리드 버그만(아마도 <카사블랑카>를  이야기하는 모양인데, 이런 넋두리를 앵무새처럼 늘어놓아도 질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별일이다)을 떠올려보자. 미안하지만 떠올릴 것이라곤 별로 없는 사깃꾼들의 거짓말이 시작됩니다. 영화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며, 생각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비오는 날에도 카메라를 들고 흙탕물 속에서 도대체 나는 왜 영화를 하고 있는가라고 진지하게 고통받는 영화현장의 시네아스트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중략) 두번째, 영화에 관한 인명사전을 열심히 외우고는 마치 영화를 모두 알아버린 것처럼 수다를 떠는 잡귀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자신들이 심각한 영화광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자본은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뿐 아니라, 매스컴의 허수아비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불행한 영화광이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것입니다. 영화는 지식이 아니며, 더구나 인명사전 따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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