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2005). 웰빙 시대의 소비문화 "비판"을 위하여. 문화과학 통권 35호. 72~85

74-75. 

따라서 소비문화라고 말할 때의 문화란 소비에 관한 문화가 아니라 오히려 소비라고 불리는 행위 자체의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비란 생산, 유통, 소비라는 경제적 활동의 다양한 수준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분업 자체(74) 가 일반화된 연후의 소비, 그리고 생산에 의해 결정되는 경제적 활동이나 실천에 관한 상상적이고 소외된 표상 그 자체로서의 소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소비란 생산과 대칭적인 위치에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소외된 표현, 혹은 생산과정에서 이뤄지는 사회적인 적대나 착취에 대한 인식을 소비자라는 상상적인 표상으로 치환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가정에 따를 경우 우리는 소비문화를 말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착취적이고 적대적인 성격을 망각하고 있는 주체, 즉 이데올로기적인 주체로서의 소비자의 주체성을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76 

노동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노동자라는 자신의 경험적인 현실에 근거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참여하는 공동체(지역사회나 종교적 모임을 비롯하여 스포츠 동호회, 영화 클럽 같은 취향의 공동체)를 통해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주장 역시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것이라고 단지 체험이 어떻게 현상하는가를 보여주는 데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중략) 한편 자신들을 임금소득자, 생산자, 취미의 주체, 성정체성이나 성별, 다양한 윤리적,사회적 관심의 주체로 동일시하는 것을 확인하고 강조하는 다양한 사회학적인 주장들 역시 우리에겐 익숙하다. 그렇지만 이 모두는 노동의 소멸이나 쇠퇴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이 더욱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맑스의 주장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노동의 이데올로기가 소멸했거나 쇠퇴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노동이 소멸했다거나 그것의 의의가 반감되었다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바뀐 것이 있다면 노동의 정체성이 변화되었고, 노동과 다른 사회적 활동 사이의 연관일 뿐이기 때문이다.  

77 -78

"경제와 정치 혹은 문화, 이 가운데 무엇이 사회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차적인 요소인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답변은 이런 것이다. "아무거나" 그러나 사회의 특성을 지배하고 변형시키는 일차적인 요인으로서 무엇이 그 "아무개"가 무엇이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경제이다. 이를테면 지식정보자본주의나 디지털경제, "기호와 상징의 경제'를 들먹이는 이들의 주장처럼 우리는 지식과 정보, 취향의 제조가 가장 중요한 가치의 원천이 되었다는 점을 극구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란 심급이(77)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거나 아니면 노동이 규정적인 계기로서의 의의를 상실했다는 주장으로 번역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미학화'되었든 아니면 '체험과 정서'가 주요한 경제활동이 되었든 그 어떤 것도 결국에는 자본이 자신의 내적인 장벽으로서의 자본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움직임으로부터 귀결되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문화 비판에 관한 최근의 흐름, 즉 소비문화의 비판의 재귀성이란 흐름을 다시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81 

"VIP 마케팅"이니,"1인 마케팅"이니 하는 최근의 마케팅 기법의 유행이나 컴퓨터 정보통신의 폭발 이후 더욱 섬세해진 고객관계관리같은 다양한 마케팅 테크닉은 단적으로 "인구"소비자가 아닌 각각의 개인을 대상으로 함을 알려준다. 그/그녀의 인구학적인 배경이 아니라 전기적인(biographical)이력 그리고 각 개인의 구체적인 반응과 선택에 따른 정보의 수집과 평가, 홍보는 이미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현실이 되었다.  

82 

트렌트는 사회 법칙과 달리 트렌드는 매우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의 문법을 가리킨다. 따라서 과거의 시대엔 사회 법칙이 있었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사회를 재현하는 인식원리이자 목표였다면 이제는 구조와 법칙이 아니라 트렌드를 찾아내야 한다! 트렌드란 이미 주어진 규칙에 따라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행위가 이어짐으로써 행위방식과 선택이 결정되는 우리 시대를 가장 잘 표상한다! 

82-83 

어쨌거나 이제는 더 이상 신세대론은 사회학자들이나 문화이론가들에 의해 분석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때 널리 회자되었던 P세대론(이는 국내)(82)광고기획사가 내놓은 작품이었다)이나 수많은 문화적 부족(오렌지족에서 메트로섹슈얼, 딩크족 등)에 대한 분석과 보고는 모두 광고, 마케팅, 시장조사 등을 담당하는 트렌드 분석가의 손에서 나왔다. 이런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비가 현실의 소외된 표상이기는커녕 직접적으로 사회적 현실을 재현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따라서 인구학이 사이코그래픽스로 대체되었듯이, 사회학은 이제 트렌드분석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비를 분석하고 정의하는 인식 수단이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 소비 사이에 연관이 변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소비를 통해 현실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생산된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83 

물론 그것은 제품으로서의 상품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의 서사를 위한 매체로서의 상품, 즉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오브제로서의 상품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물신주의 비판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만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건 혹은 사물을 전연 신비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 그 대상을 의학적이든 생태적이든 다양한 성분과 제조방식으로 환원함으(83)으로서 그것을 가능한 사물로서 다루는 것이 우리 시대의 소비문화의 역설적인 모습 아닐까. 그리하여 생겨난 결과는? 당연히 우리의 예상과는 정반대이다. 우리는 그 대상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다루는 시늉을 취하면서 그 대상을 가장 신비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물신주의 비판을 메타물신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이영자(2010). 소비시장과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 현상과 인식 제34권 1/2호.pp. 101~124. 

104쪽 

라이프스타일은 '누가 될 것인가', '타인들에 의해 어떻게 인지되고 싶은 사람인가'를 모색하는 '자아의 기획'으로서 자아감각을 꾸며내고 타인과 구별되는 '개성'을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문화적 상징의 수단이다. 개인적 정체성이 구성되는 형태로서의 라이프스타일은 정체성을 구별 짓는 기준으로 적용하는 취향과 감수성의 유형을 결정짓는 실천들의 체계를 말한다.  

105 

소비상품들이 정체성들을 구성하는 상징적 자원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개인의 내면화된 가치나 독자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라이프스타일 대신에 소비시장에서 생성되는 문화적 코드들의 조합에 의존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106 

소비시장이 주도하는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은 라이프스타일의 '자유로운'선택을 매개로 자본주의 문화경제의 구조적 강제를 자아의 기획을 위한 '주체적'과정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중략) 여기서 정체성의 위기는 자아의 기획이 소비시장에 점점 더 포섭되는 상황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시장의 논리를 추종하는 '상업화된 자아'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정체성이 소비문화의 키워드로 부상하게 된 것은 소비시장에 의존하는 자아의 기획을 기정사실화하는 라이프스타일 담론들이 매체와 소비시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어 온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107 -108

'생활자 마케팅'은 기업이 소비자 개인의 의식주의 기본생활, 레저 / 문화생활을 분할 담당하는 '생활디자인 매니저'로서 '생활기획업'('생활설계업')을 발전시킨다는 전제를 담고 있다. 즉 시장표적으로 설정한 생활자군 별 욕구, 기대, 생활양식 등을 파악하고 각 생활자군 별 라이프스타일을 개발하여 각 라이프스타일에 알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소비자의 욕구와 변화에 대한 기대를 최대한 반영한다는 명분으로 라이프스타일의 상품소비가 능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환상을 줄 수 있다. (중략)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은 마케팅의 논리의 문법이 소비자의 생활세계와 개인적 취향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소비의 문화경제학이 시장의 영역을 넘어 생활양식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다. 라이프스타일의 상품화는 소비시장으로 하여금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적 가치와 정체성을 창출하는 문화권력을 행사하게 한다. 

116 

라이프스타일 마케팅은 자아의 기획을 하나의 소비사업으로 삼아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면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고 변화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라이프스타일을 탈근대성에서 중시되는 되기(BECOMING)의 상업적 구성들로 만들어 소비자로 하여금 자아의 기획을 끊임없는 '되기'의 시도들로 만들고 '그 누구'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함으로써 라이프스타일 상품들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119 

상품미학은 '사용가치를 약속하는 외향'을 통해 인간의 욕구와 본능의 구조들을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감성을 식민화하는 것이라면, 라이프스타일 시장은 상품미학에 의해 식민화되는 감성구조의 라이프스타일들을 유포하는 장으로 기능한다.  

정락길(2010). 시선의 윤리학적 성찰 : 세르즈 다네(Serge Daney) 비평 세계를 중심으로. 프랑스문화예술연구 제32집.p.619-661. 

620쪽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의 비평은 영화적 경험 자체의 단독성(singularite)의 드러냄을 통해 현대 시대에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이미지 경험의 세속화와 빈곤화에 대한 지속적 저항이기도 하다.  

621쪽 

경험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은 칸트 철학이 던져준 어떤 난제와 연관되어 있다. 칸트에게서 경험은 인식의 선험적 토대에 부딪히는데 거기에서 경험은 순수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강요에 놓여진다. 이 공간과 시간은 칸트의 철학에서 경험을 넘어선 선험적 형식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다네가 경험하는 영화적 시공간은 이러한 순수형식이 아니다. 이 공간과 시간을 자신의 경험과 교차 시키고 부딪히는 것, 그래서 그의 글은 이론적인 법칙의 해명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그리고 정서에 대한 합의적 상식을 세우기보다는 시네필적 경험을 가로질러 자신의 존재적 단독성을 드러내고 세상 속에 소통시키고 있다.  

628쪽 

무엇보다 다네에게 있어서 시네필적 경험이 제시하는 수동성은 한편으로는 끔찍한 세상사의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해온 관객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실천을 욕망하고 재 몽타주와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시네필이 경험하는 내용은 쾌락원칙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를 상실하여 실제의 구멍에 마주하는 희열(jouissance)의 경험에 가까운 것이고 현실의 세계와 영화적 세계의 뒤섞임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구멍이라 불려지는 간극의 충격을 통해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이기도 하다. 

629쪽 

그들에게 영화는 이미 프로그램화된 상품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육체 속에서 신경들의 이상한 조합이 저절로 행해지는 은밀한 욕망의 이차적 몽타주의 행위였으며 그래서 영화적 장치가 강요하는 수동성은 단순한 수동성이 아니었고 그들의 동일시는 프로이드의 신경증 환자의 동일시와 같은 독특한 매커니즘을 지닌 것이었다.  

638쪽 -639쪽

바쟁이 살았던 시기가 영화기 지식인들에게 진지한 사유의 대상이 되어야하는 중요한 문화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야할 인정 투쟁의 대상이었다면, 다네가 살아갔던 시기는 텔레비전 이후 영화가 점차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하는 시기이자 다양한 특수효과,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화, 그리고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정보화 혁명, 그리고 디지털 영화의 시대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라는 사실이다.  (중략) 80년대 <리베리시옹>지를 중심으로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이미지 전반의 문화에 대한 다네의 고찰은 초기에 적극적인 이미지의 민주화의 가능성의 모색에서 또한 점차 회의적인 시선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애도 작업은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 전체의 문제로 점차 확대되어가고 발터 벤야민의 경험의 빈곤화에 대한 성찰과 거의 흡사한 방식으로 전개되어 진다. 즉 더 이상 현대의 개인들은 타자성에 대한 관심을 거부(638)한 채 예술 작품으로부터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민족 이외의 어떤 접촉의 경험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39쪽 

다네의 이러한 애도작업은 예술의 종말을 고한 헤겔의 문제를 영화에 다시 던지는 것이다. 영화에 던져졌던 역사적 임무, 대중과 함께하는 문화적 공동체라는 주제가 이제 그 임무를 다 했다는것이고 이제 '영화 이후'의 미래가 어떠할 것인지를 사유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651쪽 

다네는 현대 사회의 변화를 70년대 스노비즘(snobsme)의 사라짐이라는 주제 하에서 비틀고 있다. 스노비즘을 임의적으로 어떤 지식이나 대상의 위선적인 소유자라고 정의해보자. 그런데 60년대에 만연했던 스노비즘적 시네필들이 70년대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는 현상을 이야기하면서 다네는 현대 개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비판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화 속에 일군의 스놉(snob)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들이 닮고자 하는 지적 이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닮음의 이상, 그러한 기준 자체가 소통의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하에서 사라져 버린 사회, 그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마구잡이로 소통되는 이 허상의 개인주의는 자기 충족적인 동시에 타인에게 대단히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서 모든 것이 관용되고 용인되어 있다. 이 관용과 끊임없는 용인의 태도 속에서 실제로는 타자와의 관계는 상정되지 않는다. 이 관용의 과도함의 세계, 무관심성이 고도로 양식화된 세계, 모두가 자신의 집에서 편안하게 TV를 시청하는 세계에서 소통은 무한히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지만 하나도 소통 되지 않는 텅 빈 소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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