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블로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 명인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 리뷰를 몇 개 발견했다. 2008년 2월 6일의 글. 지금 다시 들춰 보니, 대학 졸업을 곧 앞둔 상황에서  내 어떤 황량한 마음이 담긴 영화 리뷰 같다.  

 

끌로드 샤브롤의 1969년도 작품, [야수는 죽어야 한다]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저는 미리 말해두었습니다!)


끌로드 샤브롤의 1969년 작품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샤브롤 특유의 찝찝함이 느껴지는 인상적인 스릴러다. 샤브롤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히치콕과의 연관성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영화 속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앞에서 언급된 ‘찝찝함’이란 단어와 스릴러라는 장르가 갖는 특성을 나란히 둘 필요가 있다. 샤브롤의 세계를 이해하는 단서를 찾기 위해서다. 스릴러라는 장르를 통해 관객은 ‘누구’의 문제에 자연스럽게 길들여져 왔다. 누가 범인인가, 누가 저 사람을 죽였는가, 누가 살아남았는가, 누가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가. 마이더스의 손이 되고 싶은 제작자들은 극장 속 관객이 그 ‘누구’를 쉽게 찾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 기술자들을 필요로 했다. 이야기 기술자들이 ‘누구’의 존재를 영화가 끝나기 몇 분 전까지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반전이다. 뒤집어짐의 쾌감. 대중은 오랫동안 그 쾌감을 맛보기 위해 관람석을 채웠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 기술자들이 거둔 성과를 안다. 브라이언 싱어의 [유주얼 서스펙트]나 나이트 M. 샤말란의 [식스 센스]는 현대 영화사의 흐름 가운데 자신 있게 뽐낼 수 있는 반전을 가진 영화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나는 한국의 영화 관람 문화 속에서 소위 ‘반전 강박증’이 팽배해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반전 강박증’이란, ‘누구'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해 스릴러라는 장르를 반전의 가치로 환원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의 최근 영화 경향을 보면, 특히 스릴러는 표방하는 작품들이 거의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를 포장하는 기술은 늘었지만 관객은 냉담하다. - 여담이지만 나는 작년에 나왔던 [리턴]을 지극히 평범한 수준의 영화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 “에이 뭐 이렇게 시시해” 스릴러가 갖는 '누구'의 문제, 그것으로 긴장감을 형성하고 관객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당위의 차원으로까지 가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끌로드 샤브롤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갖는 독특한 행보는 바로 이런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찝찝함’ 때문이다. [뉴 웨이브]의 저자이자 영화평론가인 제임스 모나코는 이 작품에 대해 ‘부르주아 실존의 잠잠한 표면을 깨부수는 테러는 결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개인적으로 그 테러에 책임이 있는 특정 인물이 없다’라고 말한다. 샤브롤의 영화는 ‘누구’강박증에 벗어나 있다. 쉽게 말해서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시선으로만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조급하게 범인을 찾는 데 골몰하지 말고 좀 더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이 좋다. 영화의 첫 장면은 노란 옷을 입은 미셸이란 소년이 바닷가에서 무엇을 잡고 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다른 한 편, 조용한 마을을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가 나타난다. 바닷가를 나와 마을을 거닐던 소년, 그리고 차 안에서 크게 웃고 떠드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 서로 대조되면서 이상한 느낌이 만들어진다. 교차 편집을 통해 더욱 고조되는 불안감. 결국 그 불안감은 미셸이 뺑소니사고를 당한 것으로 선명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저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셸을 너무나도 잔인하게 지나쳐버린 차 안의 남자와 여자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할 사람이 우리가 보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영화는 아들인 미셸을 보고 절규하던 아버지 샤를르의 모습을 잠깐 보여준 채, 어느덧 냉정한 모습으로 일기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는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  

 

샤를르는 경찰을 위시한 법과 제도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복수를 택하는 방식은 공교롭게도 ‘연기’다. 연기를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샤를르라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모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이름을 택한다. 마크 앤드류. 이제부터 그는 샤를르가 아닌 마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단서를 하나 둘씩 찾으면서 자신의 아들을 죽인 남자와 여자에게 접근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런 영화를 보면서 갖는 감정은 주인공의 명석함에 대한 감탄이다. 그러나 샤브롤의 이 작품은 주인공의 뛰어난 두뇌를 찬양하지 않는다. 샤브롤이 문제로 삼고자 하는 것은 감정이다. 감정은 변화와 친숙하다. 이제 우리는 이 영화가 뺑소니사고의 범인을 찾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그 이상의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는 샤브롤 특유의 의식을 찾는 게 중요하다.  

영화는 죄와 벌의 관계를 물으면서도 그 범주 안에 우리가 당연하게 제외시켜도 된다고 보는 주인공 샤를르를 집어 넣는다. 당연히 관객은 의아해 할 것이다. 장 안느가 사악함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주는 캐릭터 폴의 너저분한 욕설과 천박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생각을 보면서 관객은 어느덧 폴의 집에 들어간 샤를르의 심정으로 폴을 대하게 된다. “폴을 죽여. 저 사람이 범인인 것이 확실해!”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샤를르는 윤리의 옹호를 위해, 정의의 수호를 위해 영리한 두뇌를 마음껏 자랑하는 주인공이 아니다. 준수한 외모와 조심스런 태도 속에 어딘가 모를 어색한 두려움이 서려 있다. 폴과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여자인 엘렌 랑송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샤를르의 움직임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그 낌새를 무시한다. 하지만, 이내 그런 낌새는 다시 돌출되고, 샤를르와 묘한 연대를 형성한다. ‘우리는 폴이 싫다’ 그러나 엘렌은 정확히 왜 샤를르가 폴을 싫어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단지 ‘싫다’라는 감정과 그 감정이 바라보는 대상이 ‘폴’이라는 것을 공유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샤를르는 그녀를 가엾게 여긴다. 그는 일기를 쓰며 복수를 다짐하면서도, 자신의 여린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약해지지 말자, 경계를 둘 필요가 있다는 표현으로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폴의 집에 들어간 샤를르는 폴의 아들인 필립을 알게 된다. 영화 속에서 필립은 죽은 미셸과 너무나도 닮은 모습인데(실제로 미셸역과 필립역을 맡은 두 아이는 서로 형제 사이다.)필립 또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드러낸다. 집은 제법 호화스러운 것 같지만, 경직된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건 역시 샤브롤 영화의 재미다. 샤브롤은 부자들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다. 그들도 분명 화려한 겉모습 뒤에 케케묵은 비밀들이 있을 것이라고 계속 찔러댄다. 그리고 이 영화에 숨어있는 분노의 대상은 폴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샤를르만이 폴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처제인 엘렌과 섹스를 하는 것이 거리낌 없는 남자라면 폴은 정말 야수가 맞다. 폴의 가족들은 이 야수에 억압받고 있으며, 아들 필립은 극한의 증오심으로 다른 아빠를 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다른 아빠가 샤를르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이 영화를 통해 느끼는 쾌감은 좀 모순된 표현일지 몰라도 ‘찝찝함’이다. 쾌감이란 단어가 주는 시원스런 분위기와 거리가 먼 감정인데도 나는 이 영화를 지배하는 불투명함이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로저 에버트는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고 해도 딱 한 번만 보면 되는 작품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나는 솔직히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 [디 아더스] 같은 영화들이 아무리 뛰어난 이야기의 몸매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여러 번 보진 않을 것 같다. 이 이야기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누구’의 문제로 치닫는 이런 영화들이 여러 번 손길을 가게 만들지 않는 것은 적어도 내 스스로에게 솔직한 상황이다. 허나 샤브롤의 이 작품은 좀 다르다. 그것은 분명 범인을 향한 추궁에 머무르지 않고 좀 더 큰 상황을 바라보게 만드는 샤브롤의 주제 의식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굳이 끌로드 샤브롤라는 이름과 위대함이라는 표현을 엮어 윽박을 지르는 듯한 거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칭송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려는 건 아니다. 
  

영화는 복수와 자연스레 관계를 맺게 되는 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끄집어내지도 않는다.(이 영화에서 그나마 선명한 피는 미셸의 사고 현장에 남아 있던 핏자국이다.) 영화 전체를 지배할 것 같은 피의 향연 대신 영화 속 주요 배경이 되는 브르타뉴의 애매한 날씨만이 시각을 채운다. 영화는 머리와 가슴의 문제를 끄집어내며, 이성과 감정의 거리를 좁히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면서 죄, 복수, 살인, 가족, 위선, 증오 등을 이야기한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야수는 죽어야 한다]는 유사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듯 하지만,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샤를르가 마크로 변신하면서 마크라는 새 정체성으로 복수를 시작하는 교묘함은 분명 [복수는 나의 것]이 갖는 감각과 스타일에 기댄 복수와는 차이가 있다. 한 번 더 모순된 표현을 사용하자면,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주인공 샤를르가 보여준 복수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반면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샤를르의 캐릭터가 매력적인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자기 영역의 확보다. 그는 경계를 두면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함께 증오의 심정을 느끼는 애인 엘렌, 폴의 아들 필립에게 그는 복수를 위해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복수는 숭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숭고함은 자신만이 체험할 수 있는 신성함의 의미로까지 읽히는 듯하다. 영화가 끝나면 허무한 마음을 숨길 수 없는데, 이는 ‘누구’강박증에 빠져 있었던 나 스스로가 낯선 체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허무함과 낯선 심경은 끌로드 샤브롤의 영화를 좀 더 즐길 수 있는 토대가 되며, 스릴러라는 장르를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scene 이다-샤를르와 엘렌의 식사 scene

이 장면은 [야수는 죽어야 한다]를 본 사람들이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폴을 죽이는 데 실패한 샤를르에게 엘렌은 식사를 하면서 지금 밥이 넘어가냐고 묻는다. 샤를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식사를 하고, 엘렌에게 먹을 것을 얹어 준다. 식당 종업원이 오리 요리를 가져다 드려도 되겠냐고 묻고, 샤를르는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배인이 오리 요리를 가져올 즈음, 샤를르는 엘렌에게 뺑소니 사고로 죽은 아이는 바로 자신의 아들인 미셸이라고 말한다. 엘렌은 예상은 했지만, 충격은 크게 받은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린다. 샤를르가 엘렌에게 미셸에 대해 말할 때, 지배인이 오리 고기를 써는 장면이 함께 나오는 데 이 장면이 주는 긴장감과 섬뜩함은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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