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대[歡待] :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
"환대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는 거처의 확고한 존재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또는 그보다 진정한 환대는 오직 비호-부재의 해체로부터, 자기-집 부재의 해체로부터만 개화할 수 있는가? 어쩌면 집 없는 경험을 해본 사람만이 환대를 베풀 수 있을지 모른다."
-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중에서-
좋은 책의 좋은 구절을 딱 잘라 가져오는 것이, '좋은'에 담긴 뜻, 즉 책 속의 수많은 해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미리 밝혀둔다. 그리고 그것을 무릅쓴 양해를 구한다. 나는 문득 오늘 롯데와 삼성의 경기 후, 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자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그리고 일찍이 감명깊게 짚어놓은 구절들을 하나, 하나 되짚어 보았다.
누군가에게 환대를 표시한다는 것은, '나'의 안정성과 '너'의 불안정성을 확인하는 의례일지도 모른다. 내가 처한 기본적인 환경이 불안한데, 당신을 기분 좋게 맞이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나의 집에 들어왔을 때, 그리고 그 들어오는 누군가가 '떠도는 자'였을 때, 나에게 요구되는 것,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안전'과 '안정'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 두 요인을 충족시킬 사물을 배치하고, 구입하며, 그것을 활용하여 당신에게 건넨다.
하지만, 그 이전에 '떠도는 자'에게 우리가 본능적으로 내미는 것은 포도주와 빵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거기서 시작되는 환대 이전의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이후 발생할 예상치 못할 장면, 그 불확실성. 그래서, 사람들에게 '환대'는 익숙한 자들이 익숙한 자들끼리 누려야 하는 사회적 의례가 되기도 한다. 그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 말이다. '안정'의 표상이 타인의 몸을 뒤덮으면, 나는 '안전'의 표시로 그를 맞이한다. 그리고 나의 친절이 따라 나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질서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건, '환대'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나와 너의 비대칭성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이방인'과 '집없음'의 관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환대'에 대해 다시 묻는다.
나는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있는 저 두 사람의 모습에서 '환대'의 어떤 기운을 느낀다. 단순히 '레전드'로 남을 은퇴를 앞둔 야구선수와 그의 팀을 상대한 외국인 감독이라는 장면 자체의 소비가 아니다. 한 사람은 평생 거주할 줄 알았던 '집'에서 잠시 방황을 하며, '집 없음'의 고달픔을 체험한 적이 있다(그리고 곧 집을 비워야 한다)[양준혁]. 다른 한 사람은 '타국'이라는 낯선 곳에 있으면서( 자신이 늘 거주할 줄 알았던 집을 나와 )3년째 '이방인'의 자리에 있다[로이스터].
나는 여기서 '집-없음'이 자아내는 환대의 진정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이 선수가 정말 한국야구사를 빛낸 자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상징성을 알고 있는 외국인의 인사, 그리고 이제 곧 그라운드를 떠나는 실력과 인품을 겸비한 한국 선수의 겸양된 태도라는 인상을 넘어, 이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환대'에는 우리가 모를, (그리고 그들 각자가 마음 속에 더 간직하길 바라는) 그들 각자의 삶에 대한 순식간의 회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교류가 있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은 텔레파시라고 불리우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로)
차라리, 우리가 이 장면에서 '환대의 이유'를 밝혀내어, 그 명시적인 이유에 맞는 감동을 얽어내기보다, 그들에게 나왔던 '환대 그 자체의 기운'이 정작 숨기고 있는 내밀한 감정들, 그것이 정말 그들만의 것임을 이해하고 그들의 장면으로 남겨두는 게 환대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보다 삶의 고수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순히 '사람좋은'이란 표현에만 가둘 수 없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집-없음'에서 비롯된 환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안정과 안전에 대한 이질감을 견뎌낸 사람들만이 취할 수 있는 저 의례에서, 낭만을 넘어선 우리네 삶의 환대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