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내용 소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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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내일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가져가고 싶은 세 가지 물건은?" 한때 TV 토크쇼에서나, 아니면 친구들과의 수다 자리에서나 자주 등장했던 이 질문. (요즘은 이 질문이 자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싱거운 대답을 한다는 인상을 줄까봐 자신의 개성에 맞는 사물들을 고심해 본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조난 사고를 당해 아무도 없는 섬에 떠밀려 왔을 때, 우리는 장난으로 했던 '무인도 퀴즈'의 지난 날을 추억하며 슬퍼할지도. 신을 믿는 누군가는 섬에서 회개 기도를 하고 있을지 모른다. 카메이 토오루 감독의 <낙원(2005>)는 마치 ,"무인도에서 가져갈 것 세 가지? 쳇"하는 투로, 살기 위해서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케이블 채널에서 자주 방영해주던 영화였는데, 사실 드문드문 봤던 몇 번은 그저 그런 <캐스트 어웨이>의 일본 버젼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어제 영화를 끝까지 다 보고 나서 생각할 거리를 여럿 안겨다 주는 이 작품 속 장면들이 내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자 주인공인 마치다 시온은 전도유망한 정치 신인으로서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이다. 선거 유세를 위해 어촌에 내려왔다가,사고를 당해 자신을 안내하던 한 어부와 무인도에 남게 된다. 여기까진 충분히 많이 봐 왔던 장면들. 그리고 이후에 이런 저런 장면들이 나오겠지?라고 하는 예상 속 장면들이 물론 있다. 좀 과장되고 군데 군데 어설픈 대목들이 있지만, 작품이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 그건 '사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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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사회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겪는 많은 과정들이 있다. 가정, 학교, 일터 등 다양한 곳에서 사람은 '사회인'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학습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타인을 의식하며, 접촉하는 가운데 나와 타인의 관계를 규정짓는 언어를 익히고 신체 기술을 터득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배웠지만, 막상 사회는 그렇지 않다. 일정한 권력이 사람과 사람의 위치를 수직적으로 변화시키고, 누군가는 명령을 하는 것을, 누군가는 명령을 받는 것을 선호한다. 현실 정치를 꿈꾸는 여자인 마치다 시온은 무인도에서 철두철미한 준비도 없고, 가만히 넋을 놓고 있는 어부 사카키 히데오가 못마땅하다. 그녀는 자신을 포함해 두 명의 사람이 있는 이 곳에서 '사회 실험'을 한다.(이미 무인도 생활을 하던 중국인이 있는데, 논의를 위해 이 부분은 생략한다) "넌 명령을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이지?" 라는 직언으로 시작해 남자의 약점을 공략한다. 그녀는 단 한 명의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위에서 군림하길 원한다. 그녀는 이러한 '사회 실험'을 통해,무인도에도 내가 사회에서 했던 명령들, 행위들이 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물론 이 확신은 그녀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씌여진 하나의 가면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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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은 어부인 사카키 히데오가 오랜 무인도 생활을 통해, 그가 이 섬에서 그냥 살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는 대목이다. 이는 여전히 이 무인도를 탈출하고 싶어하는 마치다 시온의 태도와 대비됨으로써 더욱 부각된다.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오랜 감옥 생활로 인해 감옥 자체가 사회보다 더 편안하고 익숙해져버린 모건 프리먼의 경우처럼, 사카키는 사회로 돌아간다는 것이 두렵다. 그리고 마치다가 이 섬을 나가도록 작은 뗏목을 만들어준다.(원래 그는 마치다가 섬을 자신 몰래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동굴 안에 있던 뗏목을 바다에 보내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뗏목을 타고 바다로 향하던 마치다를 부여 잡는 사카키는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가는 것이 두려워 자신과 함께 살자고 그녀의 다리를 잡는다. (만약 그녀를 편안히 보내주었다면, 이 영화는 시시한 휴먼 드라마 였겠지만, 약간은 얄궂은 이 반전으로 인해 영화가 가진 '날 것'으로서의 인간은 더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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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떠돌던 마치다는 결국 사람들이 있는 사회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선거는 끝난 상태다. 성공적인 정치인으로서의 첫 출발을 하고 싶었던 그녀의 희망은 산산히 부서졌다. 그녀는 선거관리사무소에 가 직원에게 따진다. 선거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선거가 가능하냐고.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집착하지 않는 카메라의 시선을 던진다. 영화의 마지막, 마치다의 이런 거센 항의, 분노와 대비되는 것은 너무나 평온한 어촌의 풍경이다. 고로 영화는 그녀의 사회적 부재를 둘러싼 주변의 조용한 시선을 통해, 그녀의 부재를 더욱 강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 부재의 비극은 그녀의 몫이다.
그녀의 비극은 사실 무인도에 있었다는 차원을 넘어, 그녀가 사회에서 익숙하게 체화시켜왔던 명령, 규범, 이성적 기획의 부분들을 무인도에서 실현시켜보려고 했다는 점. 그것의 출발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무인도에서 그녀는 사람으로서 내가 '살기 위해' 터득해야 할 것은, 내가 '사람다움'이라고 배워 왔던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는 중간에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있는 해산물을 씹어 먹고 싫어하던 생선도 먹는다. 살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잘 짜여져 있는 생각의 구획이 아니라, 순간순간에 충실하여 몸을 움직여버리는 본능의 몸짓이거나, 미약하게나마 인간으로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자연의 도구적 활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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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떤 모임에서, 정치평론을 하시는 한 젊은 분이 한국은 6.25 이후 크게 망해본 적이 없는 사회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정말 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랬을 때 우리가 처할 극한적 절망의 상태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런 절망의 상태를 느껴본 적이 없는 세대에게 과연, 그러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다가올 혼란이 어쩌면 우리에게는 정치를 다시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과거 LA 폭동처럼, 여기저기서 화재가 일어나고 매일 약탈이 일어나는 상황이 한국에도 발생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그 말 이후 자주 해 보게 된다. 물론 이것은 그러한 상황을 상상함으로써 오는 스펙타클의 스릴도, 정말 그런 상황을 실현시키고 싶은 광기의 차원도 아니다. 다만, 그러한 혼란 자체가 왔을 때, 인간이 행할 사회적 행위. 그것에서 느껴지는 잔혹 혹은 예기치 않은 감동, 사랑,눈물,비애,냉소 등의 사회적 감정 들을 우리는 그 순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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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절망의 상태를 '예언'하는 묵시록자들보다는, 나는 도리어 '극한적 절망의 상태'를 통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봄직한 희망과 사랑에 대한 모습들을 더 가까이 /세심하게 보고 싶어하는 놈이긴 하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와 사회를 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그 절망의 상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점점 이 사회에서 우리도 모르게 늘어나고 있는 건, 영화 속 어부처럼 사회에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는 삶의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보다 비극적으로 보이게 하는 건, 그래도 숨이 붙어있다,라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러한 존재들의 생각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태도보다는, "그래도 지금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잖아.."라는 시선에서, '사회인'이라는 범주가 갖는 그 기본선의 경계를 타인에게 적용 /작동시키는 데서 오는 위안을 더 즐기는 것 같다. 과연 어디가 낙원일까. 저 먼 유토피아와 저 먼 디스토피아 사이의 간극 속에서, 정치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현실의 탐독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할지도. 만약 누가 무인도에 가져 갈 세가지를 묻는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답변을 준비해봤다. 나에게 닥칠 절망의 상황을 정직하게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의 유지. 그것 하나면 된다고. 오늘 우리네 삶에서 "난 사회인이요! 사회인이요!'라는 소리가 빈번해질 때마다, 그것은 '생존의 두려움'이라는 노래의 b-side ver.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