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정우열의 영화편애
정성일.정우열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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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들은 어떻게 불려야 하는가. 영화광을 호명하는 방식에 대하여 중 /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걸 영화광이라고 부르든(197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 영화주의자들이라고 부르든(198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영화 마니아라고 부르든(1990년대에는 그렇게 불렀다)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21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시네필이라고 부르고 있다.하지만 '하여튼'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여기서 나를 이끄는 것은 우리들을 부르는 호명의 방식이다. -66쪽

내게 문제는 영화 마니아가 오디오 마니아와 같은 것인가, 라는 것이 아니라 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1990년대에는 그렇게 부르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우선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영화를 보는 시스템에 관심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나는 지금 홈시어터 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말 그대로 영화를 '감상하는'시스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실제로 영화를 제법 보았다는 사람들조차 영화 촬영이나 사운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믿을 수 없는 만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중략)실제로 이런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서(대부분의 경우)문학적으로나,아니면 철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뿐이다.-68쪽

게다가 대부분 집에서 말 그대로 '그냥'비디오로 영화를 본다.집에서 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오직 하이-파이 음질과 화질의 영화를 고집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는 하지만,'하이-엔드'시스템주의자(!)들의 공통점은 기계의 버전 업에 비례해서, '하이-테크'한 최신 할리우드 영화들로 그들의 라이브러리를 채워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건 그들의 취행이니 탓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과 나는 점점 더 나눌만한 이야기가 없어지고 있다. -68쪽

첫 번째 오해에 대하여.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일종의 수집광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그래서 영화를 음미하기보다는 영화(들)을 남들보다 많이 보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며,희귀한 영화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중략)물론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과거의'채팅상에서 벌어지는 영화 퀴즈방(속칭 '영퀴방')을 들러 보면 그런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유머 버전일 뿐이다. 왜냐하면 영화 제목을 알아맞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 한 편을 놓고, 그 다음이 문제의 시작이다. 영화는 결코 수집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음악이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이끌리는 것을 선택하고, 음미하고,그 안에서 자기의 자아가 반영되어 가는 과정을 다시 되짚으면 되는 것이다. 영화에 관한 글이란 결국 자기의 기대의 지평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69쪽

그런데 1970년대에 영화광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타자로 취급하던 것이,그리고 1980년대에 부르주아적 변종으로 분류되어 비판받던 계(70)급의 분류가 이제는 그 무언가 하나의 분류를 지칭하는 말이 되어 버린 것인데,문제는 그 분류가 매우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을 어리둥정하게 만드는 지점이다.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이들은 지상으로 올라왔으며 종종 당당하게 활동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을 분류해 낼 만한 지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러나 영화 마니아는 존재한다. 이 숨바꼭질을 분류해 내기 위해서는 역설이 필요하다. -70,71쪽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물론 감식안이 있지만,우리들이 갖고 있는 감식안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결국 영화라는 기계장치가 안겨 준 홀림에 사로잡혀서 만들어 낸 환상에 대한 굴복에 지나지 않는 세련된 형태의 페티시즘이라는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그럼으로써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쳐 놓은 결계가 있다.그렇다. 이것은 경계가 아니라 일종의 결계이다. 우리들이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감식안에 의해서가 아니라 페티시즘에 의한 굴복이라면,그 어떤 판단도 오류를 피해 갈 수는 없다.이것은 지난 30년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분류해 내는 방식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정교한 분류-처리이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공격의 목표가 영화가 아니라 (그렇다면 아주 반론은 쉬워진다),오히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1쪽

세 번째 오해는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있다.우리들 자신 중에는 영화를 사랑하기보다는 영화를 빌려 다른 것을 말하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이들은 전적으로 영화 마니아라는 호칭에 대해서 자유롭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그들의 위치 때문이 아니라 입장 때문이다. 일종의 페티시즘에 관한 증세로 만들어 버리는 규정에 대해서 이들은 가볍게(72)벗어난다.그런데 그들이 벗어날 수 있는 이유는 영화를 빌려 이론을 전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이들이 처음부터 영화를 개념으로 설정하고,그 안에서 그 안의 구성 요소들을 끌어내어 이루어지는 사건들과 그 정황들을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설명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솔직하지 못하게 마련이기 때문에 철저하지 못하다.-72,73쪽

종종 그것이 영화에 관한 글도 아니면서 정작 영화가 그 글 안에 들어가서 다른 개념들조차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은 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종종 마주치는 실수이다.그것이 유하처럼 시인의 경우에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그러한 혼란의 경험은 새로운 예술적 체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이름을 내세워,그리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영화 마니아라는 나르시시즘에겨워 심심풀이로 쓰는 영화에 대한 글은 그 사유 자체를 나쁜 의미에서(그리고 아주 진지한 의미에서) 법도 질서도 없는 혼란으로 이끈다.그는 인접성의 오류에 빠지기 때문이다.-73쪽

우리는 자유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결정하게 된 방식을 사후적으로 선택하는 능력이라는 칸트의 조언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사회가 호명하는 방식과의 투쟁이란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위해서 이 투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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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0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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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1 03: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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