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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책이 집에 몇 권이 있는데, 꼼꼼하게 완독한 첫 책 '기념일'은 8월 1일이 되었다. 원제가 '난쟁이와 꼭두각시(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를 모티브로 한)'인 <죽은 신을 위하여>가 그 주인공인데, 책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젝의 본 책을 통해 내가 느꼈던 점 하나. 종교는 변태와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이건 책에 없는 표현이다. 그냥 내가 지어내본 것) 종교, 특히 기독교가 가장 적대적 관계로 간주하고 있는 것, 그것과의 관계를 다시 곱씹어보면, 그 존재는 가장 기독교와 친한 친구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존재는 곧 죄의 존재와 함께 가야한다. 죄가 없으면 기독교는 완전무결한 승리를 세상에 선포하고 그들의 건강함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이것은 우리가 혁명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이다.지젝이 말하는 혁명 다음의 불안)지젝은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오히려 기독교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삶, 그것의 건강함이 아니다. 우리가 건강하지 않음을 우리 스스로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통해 발생하는 죄의식 자체를 기독교는 환영한다. 이 죄의식의 깨달음이 이루어지면 기독교는 곧바로 회개의 제의를 만들고,그들이 '반복적'으로 회개할 수 있는 시스템에 놓여질 수 있도록, 그 연속성을 보장하는 제도를 만든다(지젝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의 큰 핵심 중 하나는 바로 '반복'이라고 주장한다) 

고로 기독교가 사랑하는 것은 죄일지 모른다. 죄의 정화와 함께 은밀히 유포되는 죄와 쾌락의 추구는 지젝이 '도착적 기독교'라고 표현한 오늘날 기독교의 중핵이라 할 수 있다.  

지젝이 잘 설명한 것처럼 금지에 대한 저항의 과정 대신, 금지 자체가 우리에게 위반을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시대, 이 시대의 기운 안에서 기독교 또한 예외일 수 없다. 성과 속의 구분법으로 세상과의 뚜렷한 '차단'을 강조하는 무리에 당신이 속해 있다면, 당신은 그 무리 안에서 편안히 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긴 글을 적어볼 예정이지만, 종교의 열정이 떨어진 만큼, 문화에 대한 열정 또한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 종교에서 믿음을 수반한 열의를 기대할 수 없다. 다만 일상에 스며든 그저 그런 '생활방식'의 하나가 종교다. 문화 또한 그렇다. 문화에 열정을 바친다는 건, 요즘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다. 오히려 문화를 '관리'하는 주체의 모습은 낯익다. 영화문화에서 '컬트'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종교성을 생각해보라. 그 종교적 제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단어의 몰락, 더 이상 컬트라는 단어가 문화의 핵심 담론축에도 못끼는 지금. 오늘날 문화에 자신의 믿음을 투자하는 사람들은 적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적대감은 90년대와는 또 다른 문화에 빠진 이에 대해 느끼는 더 큰 공포감이다. 그 공포감은 그 사람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본주의적 삶에 그만큼 어색하다고 느끼는 편안한 관조에서 오는 내버려두기의 시선일 것이다. (지젝이 초반부에 기독교의 위상을 언급하며 , 문화와 믿음의 관계를 설명한 대목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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