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신을 위하여 -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 프런티어21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7월
품절


오늘날 '문화'를 말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서 '문화'란 기본적인 생활세계의 범주로서 등장한다.예를 들어,종교에 대해서 말할 때,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정말로 믿음을 갖고 있는'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생활양식'을 존중하여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의 일부)을 지키는 것뿐이다(유대교를 믿지 않는 유대인이 '전통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부정한 음식을 금하는 율법을 지키는 경우 등)."내가 그것을 정말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것은 내가 속한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라는 말은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부인된/치환된(disavowed/displaced)믿음을 표현하는 지배적인 양식인 듯하다. 문화적 생활양식이란, 산타클로스를 믿지는 않지만 해마다 12월만 되면 집집마다 또 공공장소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운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아닐까?-13쪽

즉 '문화'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 '진지하게 생각하지'않으면서 실천하는 모든 것을 지칭하는 이름이다.과학이 이러한 문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 역시 과학이 너무 진짜라는 사실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근본주의적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야만인',반문화세력,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치부하는 이유 역시 그들이 겁도 없이 자기들의 믿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마침내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문화 속에 매개 없이 속해 있는 사람들,자신의 문화에 거리를 두지 않는 사람들을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14쪽

영웅이란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배반당해야 하는 존재다.(31) / 진정한 지도자는 종교적,정치적,학문적 지도자를 막론하고,자기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을 상대로 이런 식의 배반을 도발해야 한다.-31,33쪽

사랑하는 사람에게 완전히 반했을 때,그 사람이 우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에게 아기처럼 완전하게 의지할 때,이러한 신뢰를 배반하고,그에게 심한 상처를 주고,그의 존재 전체를 부수고 싶다는 이상하고 그야말로 도착적인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32쪽

삼위일체의 교훈은 신이 신과 인간 사이의 균열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신이 바로 이 균열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다.그는 균열에 의해 인간과 분리된 피안의 신이 아니라,균열 자체,신을 신으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균열이다.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Otherness)이 어떠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할 수 있다. 레비나스-데리다의 타자성은 일자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간극의 정반대,즉 일자의 내재적 이중화의 정반대다.즉 타자성에 대한 단정은 타자성 자체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동일성(sameness)에 다다른다. -42쪽

오늘날의 섹슈얼리티와 예술이 마주친 딜레마를 생각해 보자.끊임(59)없이 새로운 예술적 탈선과 도발을 감행해야 한다는 초자아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보다 재미없고 기회주의적이고 쓸데없는 짓도 없다-59,60쪽

종교의 광신적 옹호자 가운데 오늘날의 세속 문화를 지독하게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은 종교 자체를 저버리는 것(의미 있는 종교적 체험을 상실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이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자유주의 전사들은 반민주적 근본주의와 대결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린 나머니 테러와 싸울 수만 있다면 자유와 민주주의 자체를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은가?그들은 비기독교적 근본주의가 자유에 대한 주된 위혐임을 증명하는 데 너무나 열을 올리다,심지어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기독교 사회에서 우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후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63쪽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우리가 '공식적으로'원하는 것을 정말로 얻게 되는 것이다.이렇듯 행복은 본래 위선적인 것이다.즉 행복이란 사실은 원치 않는 것들을 꿈꾸는 것이다.오늘날 좌파가 자본주의 체제를 상대로 자본주의가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요구 사항(완전고용 실행하라!복지국가 유지하라!이민자 권리 보장하라!)을 퍼부을 때,그들은 기본적으로 히스테릭한 도발의 게임-주인(Master)이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함으로써 주인의 무능력을 노출시키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전략의 문제점은 체제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73)들이 사실은 요구가 충족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73쪽

불안의 원인은 죄가 규범으로 승격되는 상황,즉 욕망을 지탱하는 금지가 결여되는 상황이다.이러한 결여로 인해서 우리는 욕망의 대상-원인에 답답할 정도로 가까워진다-금지가 주었던 숨 쉴 공간이 없어진다. 우리가 규범에 대한 저항을 통해 개체성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규범에 먼저 우리에게 저항할 것, 위반할 것,갈 데까지 갈 것을 명한다.(중략)인류 역사상 상호 작용에 대한 규정들이 이토록 빡빡했던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그러나 이러한 규정들은 더 이상 상징적 금지로 작용하지 않는다.오히려 이러한 규정들은 위반의 양식들 자체를 규정한다.-94쪽

제대로 된 기독교의 구원은 타락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타락을 반복하는 것이다.-133쪽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쾌락과 제약을 결합한다. 쾌락과 제약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케케묵은 얘기가 아니다.오히려 오늘날의 쾌락주의는 대립항들의 무매개적 일치(작용과 반작용의 일치)라는 일종의 사이비 헤겔적 개념이다. 해가 되는 그것이 이미 약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쾌락의 궁극적 사례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초콜릿 판매약(cgocolate laxative)일 것이다. 이 약의 역설적인 광고문을 읽어보자.변비에 시달리고 있나요? 그러면 초콜릿을 좀더 드세요!(변비를 일으키는 바로 그것을 좀 더 드세요)-157쪽

국가 제도가 선포하는 비상시국은 진정한 비상시국을 피하고 '정상 궤도'로 돌아가려는 절박한 전략의 일부다.-216쪽

정말 어려운 일은 묵묵히 혁명을 준비하는 일도 아니요,혁명적 폭발이라는 '사건'의 조건을(218)마련하는 일도 아니다.진짜 힘든 일은 사건이 일어난 후 -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시작된다.-218,219쪽

라캉이 보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배설이 문제가 된다는 점인 것은 그 때문이다.인간에게 배설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악취를 풍기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내장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인간이 똥을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똥을 통해 우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이 노출/외화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똥이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면'이 없기 때문이다.-243쪽

헤겔의 지양(Aufhebung)의 최고의 사례는 이것이다. 즉 오늘날 이러한 기독교의 핵심을 구제하는 것은 제도적 조직의 껍제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이보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종교적 체험을 버리는 것이다).여기서 간극은 메울 수 없는 간극이다.종교적 형식을 버리거나 형식을 유지하며 본질을 잃거나 둘 중 하나다.기독교를 기다리는 궁극적인 영웅적 행위가 이것이다.기독교의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기독교를 희생해야 한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듯이.-277쪽

그러한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인 '현행 기독교'는 우리에게 기만적인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불안 없는 쾌락을 향유할 가능성을 제공한다.지젝은 이것을 법과 죄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한다.즉 규범은 위반의 욕망을 일으키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다.지젝이 현행 기독교를 '도착적'기독교,혹은 기독교를 가장한 쾌락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기독교가 도착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때,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가 처벌받지 않고 삶을 즐기게 해주는 안전장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2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