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르 동문선 문예신서 363
라파엘 무안 지음, 유민희 옮김 / 동문선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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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中 / 장르 카테고리의 경험적 성격은 항상 정의하기보다 인정하기가 더 자주 혼탁하다. 왜냐하면 장르의 혼합은 엄격한 분류 계획을 완전히 무산시키고, 많은 영화 장르는 다른 매체 속에 이미 존재하는 장르를 연장하고 재창조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론이 장르의 기본적인 개념에 집착하고 있는 한, 틀림없이 많은 장르는 이론에 있어 불완전한 대상인 것 같다.(중략) 우리는 영화에 있어 반대 명제를 주장할 수조차 있다: 영화 장르가 장르 영화를 한정할 수 없다 할지라도, 대중문화 속에 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그 강력한 정착과 같이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 속에서 장르의 두드러진 성격은 영화를 예술적인 영역 밖으로 내던지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 장르는 거의 불안전하기 때문에 역시 잘 찾지 않는 개념이다.결국 고정되고 변별적인 성격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모든 장르이론이 아주 빠르게 이르고 있는 아포리아를 피하고 특별한 사례 연구에 내재되어 있는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르 문제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이 적합하다. (중략)카테고리 논리란 영화 텍스트 전체의 일치에서 기인한 소산이나 이 영화 텍스트가 순응하고 있는 -11쪽

규범을 장르로 만들고 있다. 약 20년 전부터 몇몇 앵글로색슨 연구자들이 특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장르는 역시 담론적 행위이고, 커뮤니케이션 도구이(11)며, 문화적 / 이데올로기적 /사회적 매개물이다. 영화 세계의 다양한 관계자들인 프로듀서, 영화인, 비평가와 평범한 관객 등을 통한 장르의 명칭과 인정, 때로 부인 행위 역시 영화 텍스트의 비교 분석 만큼 '장르성'의 연구에서 중요하다. 그러므로 영화 장르는 영화 장르만이 아닌, 역시 제작과 해석의 카테고리이다.이런 관점에서 영화 장르 이론은 텍스트적 접근과 컨텍스트적 접근을 양립시켜야 한다.-11,12쪽

제3장 장르는 무엇에 소용되는가? 中 / 분류 혹은 분석적인 논리는 장르의 기능적인 차원을 한쪽으로 제쳐두고 있다. 이 논리는 이것이 형식화시킨, 공통적인 특성을 제시하고 있는 영화 전체를 장르로 간주하는 것이지 서술한 변화, 반복 작용을 장르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보았다시피 장르는 공동체가 인정하면 존재한다 : 릭 알트만이 제시한 의미 / 통사론적 정의의 용어를 다시 취해, 장르는 안정된 통사론으로 의미론을 조직할 때, 다시 말해 대중에 의해 확인될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이 정돈될 때 나타나고 그 자체로서 인정된다. 이 영화는 다양한 장르성 층위로 영화적 형식에 연결된다. -87쪽

우리는 시네마에서 장르를 상업적인 작품의 효과적인 모델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르는 상업적인 작품에서 전제로 하고 프로그램 짜는 형식을 제작자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 새로운 주제에 영화의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제작자들은 위험을 최소화하고 작품을 합리화한다. 아주 흔한 이런 생각은 분명히 대중문화에 대한 경멸적인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88쪽

장르 영화의 제작은 특유한 자질들의 반복과 동시에 변화를 가정하고, 변증법적 표준화/차이화 속에서 새겨진다. 이것은 규범적인 논리와 대중문화 속에서 '문화적 재산'의 제작과 소비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개혁 논리 사이에, 결합 중 하나이다. -88쪽

사실 '꿈 공장'은 시네마토그래프 제작법의 상업화로 특징지어진다 : 표준화는 더 신속하고 더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제작하도록 해주는 것과 동시에 뛰어난 규범(아주 한정된 '표준화된' 작품)을 겨냥하고 있다. 반면 개혁은 차이화된 작품들을 생성하고 동시에 표준에 외부적 요소들을 통합시키고 있다. -89쪽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장르 명칭 회피 中 / 할리우드에서, 장르란 제작의 합리화 결과인 동시에 순조로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효율적인 도구라고 말한 거짓이 아니라 해도, 할리우드 광고의 실천은 반대로 장르의 명칭이 훌륭한 판촉의 논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장르는 공적인 영역에 속하므로 그 어떤 제작사에 의해 자사의 영화를 특징지우기 위해 내세워질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제작의 용이성을 제공하고 있지만, 이것은 스튜디오로 하여금 자신의 현재 경쟁자들과 자사를 구분하는 마케팅 전략을 배치하도록 하지 않는다. 이처럼 장르는, 일단 몇몇 스튜디오에 의해 구성되고 공유하게 되면, 이것을 창조한 스튜디오의 특별한 이익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스튜디오는 영화에 대한 광거를 하기 위해, 그 영화의 독창성을 이루고 있는 것을 내세우기를 더 좋아한다 : 스튜디오와 계약을 체결한 영화의 간판 배우들, 저작권의 보호를 받은 연작물이나 등장인물 등이다. 따라서 장르의 경제적 효율성을 평가하기 위해 제작 행위로 그치지 않고, 스튜디오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장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스튜디오의 담론적 행위를 고-93쪽

찰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것은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에 대해 자사가 했던 담화 속에서 두 개의 다른 '목소리'를 구분하면서 릭 알트만이 했던 것이다 : 할리우드 시스템의 성징을 띠는 하나의 목소리는, 이때 장르 영화에 단순한 장르의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자사의 이미지와 이익을 옹호하면서, 특별한 스튜디오라는 식의 스튜디오의 또 다른 목소리는, 담론 속에서 자사의 스튜디오가 다른 스튜디오와(93)공유한 모든 것을 피하고 자사와 구별되는 모든 것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후자의 목소리는 고전 시대에 상급 회사들과 오늘날 여전히 대규모 회사들이 광고,포스터,예고편 등에서 자주 듣게 하는 소리이다. -93쪽

장르의 사회적 기능 中 / 우리는 현 시대는 스테리오타입, 이것의 윤곽 그리기와 고발 등의 시대인 동시에, 이것의 산업적이고 대중적인 확산의 시기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가령 예술은 그렇게 간주됨으로써, 구별과 평범의 논리에 의거해 당연히 구분되어야 하는 반면, 대중문화인 신문(97)연재 소설에서 텔레비전 연속극, '할리퀸'연애 소설에서 상업 영화,유명한 시네토그라프 장르에서 광고 영상과 슬로건 등의 문화는 집단의 표상과 스테레오타입을 품고 있다. -97,98쪽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이런 양면적인 의식은, 많은 비평가들이 상업 영화에 장르 명칭을 미리 결정하기를 더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그들이 작가로 간주된 영화인들이 감독한 장르의 작품에 대해 어떻게 작가들이 장르를 극복하고 초월하는지, 또 어떻게 작가가 습관적인 규칙, 클리셰,스테레오타입화된 장르의 모티프 등과 거리를 둔 사용을 하며, 어떻게 작가가 장르를 존중하는지 등을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 설명한다. 나는 영화인들이 단순히 클리셰가 유통하도록 하는 것 대신, 초대받은 관객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인물에 대한 패러디나 독창적인 사용을 하기 위해 클리셰를 집어들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99쪽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의 도구 中/ 장르는 이데올로기적인 틀의 효율적인 도구로 간주될 수 있다.이(99) 도구는 스테레오타입화되고 반복적인 이야기를 통해 관객에게 사회적으로 규범화된 해결책을 강요한다. 장르 영화의 규칙적인 공연은 지배 계급들의 관심을 만족시키고 있다. 시네마토그래프 산업은 이들의 전형이고 중요 요인이며, 대중을 회유하고 대중에게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공유하도록 이끌고 있다. 장르는 이처럼 규범적인 사회적 가치를 재확인하면서 사회,정치적인 단순한 현상유지를 보증할 수 있다.-99,100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를 신화로 간주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장르 영화 공연에 의식적인 기능을 부여하도록 한다 : 이 장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규칙과 기능을 부여하도록 한다 : 이 장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규칙과 기능으로 체계화된 한 사회의 가치 시스템의 연출을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 사회 구성원임을 인정하도록 도와준다. 이처럼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는 대중으로 하여금 공통의 가치와 참조 체제 주위에서 공감하게 하고 동시에, 갈등을 잠재우고 사회를 유지하도록 돕는 매개물을 상징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 동일한 장르 영화의 규칙적인 소비는 공동체가 장르에 빠진 것으로 해석되지만, 의식처럼 공통의 가치 전체를 인정하는 공유된 기쁨을 둘러싸고 그룹을 연합할 수 있는 그만큼 주기적인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110쪽

헐리우드 수사학의 진정시키고 규범적인 그물 속에 대중을 가두면서, 이데올로기적 굴레로서의 장르 개념에 반대하여 우리가 표명할 수 있는 주된 비난은 이 장르가 이데올로기적 규범을 수용하면서 수동적인 관객을 가정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장르는 유일하고 보편적인 해석을 강요할 것이다. 장르 때문에 동질적인 모든 것으로 간주된, 영화 관객들은 할 수 없이 이 해석을 하게 된다. 정말로 대중의 아편과 같은 이 장르는 거의 천성적으로 덤불 속에 있고, 비평적이며, 상반되는 모든 해석, 여러 가지 모든 수용 가능성 등을 마비시킨다. -111쪽

장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 中 / 영화를 내보이고, 수용하거나 생각하기 위해 장르 카테고리에 호소하는 것은 영화에 '기대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다. -115쪽

장르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은 장르 영화, 다시 말해 예측할 수 있는 도식을 따라가는 안정된 의미/통사론적 양식을 위해 자주 조사되고 연구되었다 : 이는 장르 개념을 축소하고 그 실제적 용법을 고려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비평가가 작가 영화에 대해 장르 명칭 자체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수많은 연구가 프로듀서와 영화 텍스트들을 장르 의도의 유일한 수탁자로 만든다는 사실에서 온 것이다.그리고 관객의 해석은 이 장르의 의도에 부합할 것이다.-120쪽

영화 장르의 기대 영역은 두 개의 장르성 체제, 즉 소개하는 작가적 체제와 배열하는 관객의 체제를 통해 결정된다.그러므로 관객의 체제는 작가적 체제와 만나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 이런 경우 장르적 기대가 또 다른 해석 시스템으로 교대되지 않는다면, 어긋난 이 기대는 영화의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중략)우리는 장르를 영화를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 대중에게 영화를 수용하고 이해하도록 만드는(즉 대중이 장르 카테고리를 인식하고 인정함)매개물 중 하나로 정의할 것이다.장르 르 영화의 경우, 장르의 쾌락을 예견하는 장르라는 매개물은 가장 중요한 것일 터이다.그러나 작가,스타,게다가 영화가 상영된 영화관의 유형 등, 이처럼 영화와 그 대중 사이에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매개물들이 역시 존재한다. -121쪽

장르는 이렇게 영화로의 가능한 접근 중 하나이고, 영화를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가능한 조건들 중 하나인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 영화는 장르의 의도를 드러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는 우리가 같은 영화를 장르에 모두 관계시키지 않음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데, 즉 우리가 존 웨인이나 존 포드의 영화처럼 <역마차>를 서부 영화로 간주할 수 있는 것과 같다.-121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의 기능을 조사해 본 결과 두 가지 고찰이 부여된다. 먼저 우리가 고찰한 기능이 어떻든간에 시네마토그래프 장르는 좋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렇지 못한 대상이다. 즉 장르는 상업영화 제작에 유용하다 해도, 영화를 판매하기 위해 반드시 훌륭한 논거는 아니다 ; 공동체의 가치를 경축하는 그 의식적인 기능은 역시 이데올로기적인 억압의 형식이다 ; 만약 시네마토그래프 장르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기대를 구축하도록 도와준다면, 이것은 해석을 미리 결정하고 차단한다. -123쪽

두번째로 만약 우리가 관객에 대한 장르의 효과를 이론화시킨다면, 각 장르와 장르의 해석은 이것의 제작 /수용 상황 속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장르의 경제적,이데올로기적,의식적,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인정한다면, 이 기능은 역사적, 사회적 혹은 특정한 수용 상황 속에서만 구체화된다. -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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