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찬노숙. 토론 시간 동안, 우석훈 선생이 지금의 '짠한'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반복해서 사용한 사자성어였다. 텔레비전으로는 KBS1을 틀어놓고, 모니터로는 칼라TV에서 중계하는 <시선분산>을 보고 있었다. 토론회를 보면서 정책 하나하나 주의깊게 따지고, 조목조목 정리해보려 했지만, 사실 그럴 수 없었다.
토론회 분위기는 진중권 선생이 마지막에 잘 표현해주었듯이, '지루'했다. 이유는 노회찬 후보가 준비에 소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티격태격하는 분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디어적 관점으로 보자면, 실제 대상이 엄연히 있는데도, 모니터로 그 실제 대상을 '구경'하면서, 상대해야 하는 상황. 실제 대상이 '가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노회찬 후보는 셀프 트레이닝을 한 것이나 사실 다름없었다. 복싱으로 치자면, 섀도우 트레이닝이라고 할까.
지금 이 상황은 토론회 사회를 맡은 김종철 씨가 잘 말해줬다. 육상 선수가 트랙에 나가 시합을 뛸 준비를 하는데, 정작 그 선수에게 마련된 트랙이 없어, 선수가 직접 트랙을 만들어 경기에 임해야 할 상황. 물론, 법 안에서, 일정한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 사실도 간과할 수는 없지만, '짠하다'라는 느낌을 이성에만 맡길 순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발언 때, 우석훈 선생의 울먹거리는 모습에, 나도 약간 마음이 착잡했다.
토론회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단어 중 하나는 '문화'였다. 내가 그렇게 문화에 대해 많이 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늘 문화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누군가 내게 이에 대해 이야기할 자리를 마련해준다면, 나는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역사에서 '문화'란, 정치나 경제의 산출물로 취급받았다. 정치나 경제가 '재현'해야 할 어떤 가치관. 그래서 문화는 다분히 '기능적'인 개념으로 취급받았다. 문화는 도덕과 일치되었으며, 공동체라는 이름 안에서, 국가가 선점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문화를 '삶의 여백'이 아닌, '삶의 필수', 레이먼드 윌리암스 식으로 말하자면, '삶의 총체적 양식'으로 보기 시작했다. 내 삶 곳곳이, 문화가 될 수 있고, 문화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삶의 풍요로움. 그 안에서 갈등과 화합을 늘 보여주었고, 지금도 우리는 이 생각에 변함이 없다.
1990년대, 일견에서는 너무 대중문화가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을 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문화는 인기였고, 이제 우리는 그 단계를 넘어, 문화를 공기처럼 생각하며, 이 안에서 문화는 우리 안의 '환경'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우린 이것을 '환경'처럼 취급한다고 해서, 그저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문화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질문이 포함된 가치에 대한 논쟁들, 그리고 언어와 언어를 교류/공유하면서 생성되는 노력들, 이것들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인간적인 삶'을 위한 근본 투쟁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점철된 하나의 양식화된 삶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 '디자인'에 내재된 인간적인 삶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고민 안에서, 우리는 디자인을 위한 인간이 아닌, 인간을 위한 디자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한 미관의 형성과 그것으로 인해 생긴 일시적 풍요로움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는 '반영의 정치', 이 '미학적' 가치판별을 통해 생성된 삶의 미와 추는, 과연 누구를 위한 예술이며, 누구를 위한 역사이며,누구를 위한 문화인지 되물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미학의 사회화'를 고심해야 한다. 이 고심 속에서,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아름다움, 혹은 누구나 문제삼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체감하면서, 우리의 행복을 일원화하려는 엇나간 수고로움에 대해 이성적인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함 또한 물론이다.
덧붙임) 마지막에 진중권 선생이 오세훈 후보가 두려워하는 것이 두가지가 있다고 했다. 말빨에는 노회찬 후보를 두려워하고, 얼굴에는 (원래 사회자로 내정되었다가 취소된) 조국 교수. 그러자, 노회찬 후보가 하나 던진다. 세상에는 두 유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조국을 좋아하는 사람과 조국을 싫어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