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철(05.9.16). 비디오 시대의 종말.  씨네21.

(전략) 지난 몇년간 수많은 비디오가게가 문을 닫고 업종전환을 시도했다. 내가 궁금한 것은 이런 사태로 얼마나 많은 테이프가 사라졌을까이다. 요즘 길을 가다 비디오가게 앞에 테이프를 쌓아놓고 파는 풍경을 자주 본다. 가끔 괜찮은 영화가 있나 살펴볼 때가 있지만 건질 수 있는 물건은 드물다. 그래도 눈길이 가는 건 저 테이프 무더기 속에 보석 같은 영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과거에 비디오로 나왔으나 아직DVD로 나오지 않은 작품 가운데 수많은 영화가 이제 더이상 구할 수 없는 작품이 됐다. 외화도 외화지만 한국영화도 구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70년대부터 90년대 한국영화 가운데 비디오가게의 경우는 구할 수 있는 테이프를 실로 몇 개 안된다.(중략)문득 예전에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푸념이 떠오른다."한국영화 필름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나, 상영 끝나면 밀짚모자에 두르는 장식으로 써버렸어. 그렇게 다 없어졌지." 옛 영화의 필름들이 유실된 것처럼 지금 옛 영화의 비디오들이 사라지고 있다. 비디오라는 매체가 명을 다하는 마당에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옛날 영화인들이 한탄했던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CD가 나오면서 LP를 몽땅 처분해버리고 뒤늦게 후회한 경험이 떠오른다. 가끔 LP가 그리울 때처럼 비디오테이프를 그리워할 날도 오지 않을까.  

김송호(05.8.29).<스타워즈 에피 3>dvd만 출시..비디오의 종말 징후? 씨네21.

dvd가 vhs 비디오를 대신하여 홈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음은 이미 상식 수준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미국의 대형 할인점들이 잇달아 비디오 취급을 중단하거나 대폭 감축시키는 등 점차 비디오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징후가 나타날 예정이어서 관계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문제의 주인공은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지난 여름 팬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 공개되어 다시 한 번 극장가를 압도했던 이 영화가 미국에서 11월 1일(한국은 11월 3일)dvd로만 출시된다는 것. 따라서 <스타워즈 에피소드 3>은  <스타워즈>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은 작품이 된다. (중략)특히 <스타워즈 에피소드 3>의 dvd 단독 출시는 한때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장의 비디오를 판매했을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표적인 킬러 컨텐츠를 잃게 된다는 점에서 비디오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정한석(06.4.11). DVD 수집가 이용철. 씨네21

(전략) 수집가란 소장 목록을 자랑스러워할 때는 있어도 누군가의 손에 선뜻 넘기지는 않는다. 왜 안 그렇겠나? 수집가에게 수집이란 사물과 교감하고 기억을 소유한다는 것인데 그걸 쉽게 남에게 나눠 주긴 힘들다. 달리 말하면 수집품은 인생의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고 얻은 것들일 테고, 그 수집품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건 자신이 걸어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아낀다는 말이나 같은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게 정당한 거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암암리에 수집가의 그 지독한 명예율을 저버린다. 덕분에 한국의 영화 시청각 문화는 숨은 지원자 하나를 얻은 셈이다. 물론 "잘 알고 지내는 공적인 집단"에만 한해서지만, ebs나 시네마테크 등에서 참고 자료가 필요하거나, 프린트 지연으로 자막 작업을 손대지 못할 때 급하게 구조신호를 보내는 게 바로 이 사람이다. 90년대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시절 종종 열악한 화질로 영화상영을 하던 그때에 직접 자신의 DVD를 틀지 않겠냐고 제안한 이후, 인연은 지금까지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그를 소개하고 싶다. 이 사람은 매일같이 세브르 도자기로 식사를 하는데, 그것은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 같이 만찬을 즐기도록 향연을 베푸는 정말 이상한 수집가다.  

홈비디오 문화를 스승으로 모셔온 영화광 

(전략) 독특한 건 그 시절 한국영의 영화광들이 으레 거치던 문화원 무용담이 이용철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셀프 메이드'라고 부르면서 아마도 그게 자신의 특이함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일반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영화까지 보고 싶다는 갈증은 "8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말하자면 돈을 벌면서 커졌고, 영화에 대한 수집벽도 동시에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그래서 그에게 영화 스승은 홈비디오 문화다. 그때 vhs를 모으면서 "대부분의 유명감독들의 영화를 보게 됐고", 요즘 그를 점점 더 깊은 생각으로 몰아가는 "피터 왓킨스 감독을 알게 된 것도 그때쯤"이다.   

DVD보다는 VHS, VHS보다는 스크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용철은 몇년 전까지도 DVD와 VHS로 같은 영화가 있으면, VHS로 보는 걸 더 선호했다. "DVD는 넣으면 기계하고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기계적인 느낌이 싫었어요. 그런데 VHS는 돌아가는 순간 마치 필름이 돌아가는 것과 많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또 한편으로 그는 VHS보다 스크린을 더 선호한다. (중략)예상과 달리 화려한 홈시어터 장비를 구비해놓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전문 리뷰어들은 내 욕을 많이 해요. 저 사람은 왜 화질에 대해서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씨네 21>이나 내가 썼던 다른 지면을 읽는 사람들은 나하고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av만족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dvd를 보는데, 단지 그 사람들이 엉망인 제품을 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 정도인 거에요. 저는 테크놀로지를 좋아하지도 않고요. DVD를 사는 것도 기술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작품을 따라간다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김태진(04.4.9). 어떤 매체로 영화 라이브러리를 꾸밀 것인가? 씨네21. 

모든 영화 애호가의 꿈은 자신만의 영화 라이브러리를 갖는 것이죠. 하지만 막상 라이브러리를 꾸미기 시작하면 곧바로 '어떻게' 채우느냐에 못지않게 '무엇'으로 갖출 것인가가 심각한 고민거리로 대두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필름이 대상인 감상과는 달리 소장의 전제인 어떤 매체로 구입할 것인가는 각자의 영화 취향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공간, 외국어 독해 능력 같은 요인들의 복합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접어든 이후로는 수록 매체 자체의 물리적인 수명은 반영구적이지만, 정작 매체를 재생하는 플레이어의 교체 주기가 지나치게 짧아져 결국 매체의 실질적인 재생 가능 기간은 10~20년 정도로 오히려 아날로그보다 더 단명하는 긴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ld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소장 매체의 선택은 애호가들의 절실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영화 소장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은 역시 필름입니다. 하지만 35mm 필름은 가격이 워낙 비싸고 부피도 커서 소장용으로 판매되는 필름은 대부분 16mm나 8mm로 옮겨진 것들입니다. 비디오 테이프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유일한 소장 매체였던 필름은 우리나라에도 의외로 많은 수가 개인 소장용으로 들어왔었지만,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대중적인 영화 소장 시대의 막을 연 마그네틱 방식의 비디오 카세트 테이프는 소니의 베타맥스 방식이 1969년에, 마쓰시다의 vhs방식이 1970년대에 각각 개발되었지만, 국내에 본격적으로vtr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 부터입니다.  

(중략) 일반 가정의 4:3tv 화면에 맞추기 위해 와이드스크린 비율인 원필름의 좌우를 잘라내고 중앙 부분의 영상만 수록하는 비디오 테이프의 가장 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80년대 중반부터 ld와 같은 마스터를 사용하여 원래의 화면비율을 수록한 와이드스크린 포맷의 비디오 테이프들이 셀스루용으로 1천 타이틀 가까이 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2.35:1 비율인 이 와이드스크린 버전들은 일반인에게는 아래위의 블랙바에 의해 영상영역이 지나치게 좁아 환영받지 못했고, 오리지널 화면비율을 선호하는 영화나 AV애호가들은 일찌감치 컬렉션의 대상을 LD로 옮겼기 때문에 기대했던 만큼의 호응은 받지 못했습니다. 화면비율과 무관한 고전영화들도 컬렉터들의 골치를 썩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작권 보호 연한이 만료된 고전영화들은 한 작품이 여러 제작사에서 다양한 버전으로 출시되기가 일쑤인데 러닝타임이나 더빙, 음악 등이 각각 다른 버전에서부터 컬러버전이나 SP버전들까지 뒤섞여 있어 카탈로그만을 보고는 어떤 것을 구입해야 제대로 선택한 것인지를 확신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김태진(04.4.16). 어떤 매체로 영화 라이브러리를 꾸밀 것인가 2.씨네21.

수평해상도 240선과 돌비 서라운드까지만 수록 가능한 포맷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비디오 테이프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15만종(미국 기준)이상의 타이틀을 출시함으로써 현재까지 발표된 가정용 영상 저장 매체들 중 가장 방대한 목록을 구축했습니다. 비디오테이프의 낮은 해상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원단 소재의 개선과 크롬,메탈 증착 방식이 개발되어 정보량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S-VHS방식이 80년대 중반에 선보였습니다. (중략)S-VHS테이프는 판매 및 대여용으로는 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니아들의 녹화용이라는 좁은 영역에만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중략) 레이버 픽업을 사용한  디지털 방식으로 LD의 포맷이 바뀜에 따라 LD는 수평해상도 400선에 달하는 고화질과 레터박스 방식을 이용한 오리지널 화면 비율의 제공, 돌비 디지털과 DTS5.1채널 같은 디지털 입체 음향채택, 멀티 트랙을 활용한 음성 해설 삽입, 제작 다큐멘터리에서부터 스틸 갤러리에 이르는 현재 DVD에 적용되고 있는 다양한 부가 영상 등을 일찌감치부터 수록함으로써 영화 애호가들에게 홈 무비 라이브러리 구축에 이상적인 매체로 찬사와 환영을 받았습니다.(아쉽게도 이러한 점은 미국과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국내판 LD들은 비디오테이프와 동일한 마스터리로 4:3에 돌비 서라운드 사양으로만 제작되어 국내 AV애호가들로부터는 철저하게 외면받았습니다.) 

김태진(04.4.23). 어떤 매체로 영화 라이브러리를 꾸밀 것인가 3.씨네21. 

현재 20달러 내외인 DVD와 15년 전에 40달러 전후였던 LD의 가격은 그동안 급등했던 물가 상승을 고려한다면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1988년에 2장짜리 <카게무샤>LD의 가격은 7만원 정도로, 당시 대학가의 1달 방세와 맞먹었습니다.)어지간한 애호가들도 구입에 부담을 느낄 정도였던 LD의 비싼 가격이 국내에서의 LD보급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그것이 LD가 대중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에 비해 DVD는 처음 출시될 때부터 비디오 테이프보다도 더 싼 2만원 내외로 가격이 책정되었기 때문에 영화 애호가들은 부담없이 비디오 테이프에서 DVD로 소장의 방향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거치형 시스템이 아닌 컴퓨터의 DVD롬으로 자신의 방에서 독립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공간적인 장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Djuna(01.2.2). 초보 영화광의 그때 그 시절.씨네21. 

<비틀 쥬스>라는 영화에 대해 알게 된 건 당시만 해도 유일한 영화잡지였던 <스크린>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영화 관련 정보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영화가 국내에 수입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도 꽤 길어서 영화잡지에 실린 간단한 기사만 가지고도 꽤 오랫동안 우쭐거릴 수가 있었습니다.  

(중략) 몇 년이 지난 뒤 이 작품이 드디어 <유령수업>이란 제목으로 출시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팀 버튼은 우리나라에서 거의 무명이었고 <비틀 쥬스>도 알려지지 않은 영화였기 때문에 저처럼 소식 빠른 사람들은 '무식한'비디오가게 주인 앞에서 으스댈 기회를 잡았습니다. 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모 평론가가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더군요. <유령수업>이 있냐고 비디오가게 주인에게 물었더니 "저흰 그런 저질 비디오는 안 가져다 놔요"라도 대답하더라니요. 당시 그 평론가가 남몰래 품었을 가벼운 경멸과 우월주의는 저 자신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중략) 여전히 <비틀 쥬스>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당시 제가 이 영화에 느꼈던 진짜 흥분은 드문드문 쏟아지는 해외영화 정보를 가지고 으쓱거리던 '초보 영화광'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비디오무비>(1997.10.) <비디오무비>자료로 활용하기.115쪽.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람의 그 정도 차이를 쉽게 판별할 수 있는 리트머스 용지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은 누구나 쉽게 '매니아'가 되고 매니아를 '자칭'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정말일까란 의심이 들 만큼 목소리만 높여 보기 좋은 겉치레만 멋들어지게 행세할 뿐 깨놓고 들여다 보면 알맹이도 없는 '가짜'들이 많다. 

강한섭(1993). 강한섭의 영화이야기. 285-295. 

비디오 때문에 터지는 분통 

290쪽 

지금 시장에는 하루에도 다섯 편이 넘는 비디오 영화가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한국에 소개된 비디오 영화의 총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다. 그러나 정말 조금의 과장도 없이 그 비디오 영화들은 거의 불량품들이다. 영화의 수준과 내용이 죄다 저질이라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비디오 카세트로 옮겨지는 과정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저질이라는 것이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비디오 프로그램은 악명 높을 만큼 끔찍한 화질을 자랑한다. 전자 기술의 비디오 테이프는 광학 필름에 견주어 원래 상대도 안될 만큼 화질이 열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다. 비디오 테이프에 담겨진 영화, 특히 한국 영화는 돈 몇 푼 아끼려고 깨끗한 영화 프린트 대신에 극장에서 수없이 돌린 낡은 프린트를 그대로 사용한다. 화면에는 장대비가내리고 소리는 지워져 잡음과 함께 들린다. 외국영화의 한심한 화질은 매 한 가지다. 그래도 원본 그대로 다 보여 주면 그나마 참을 만하다.  

그러나 한국의 비디오 영화는 절단되어 있다. 검열의 가위가 영화를 이리저리 잘라 버린다. 그것도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문제가 되는 정부의 검열이 아니다. 그거야 영화관에서도 매 한가지니 새삼스럽게 비디오에서 성토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비디오 영화제작자가 휘두르는 경제적인 이유의 검열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디오 영화는 120분의 공테이프 길이에 끼워 맞추느라고 마음대로 잘려진다. 곧 95분의 상영시간을 가진 영화라면 5분 이상이 잘려 90분 짜리 테이프에 담기고 133분짜리 영화는 90분이나 120분 짜리 테이프에 담기느라고 길게는 40분에서 짧게는 10분 넘게 삭제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그 절단되는 필름들을 생각하면 비통해지지만 누가 그 부분을(290) 결정할까를 생각하면 차라리 웃고 싶다. 발에 신발을 맞추는 게 아니라 신발에 발을 맞추는 그 용감성과 뻔뻔함이여! 또 비디오에서는 영화의 화면 비율, 곧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텔리비전 브라운관에 맞추어 변형된다. 비율이 적어도 2대 1인 영화가 브라운관의 가로 세로 비율인 4대 3에 맞추다보니 영화 화면의 양끝은 저절로 잘려지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특히 가로 세로 비율이 큰 시네마스코프를 사용한 영화는 거의 3분의 1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비디오 영화들에서 소리는 들리는데 배우가 안 보이는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을 영화 감독이 대단히 실험적인 기법을 사용해서 만들었나 보다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블랙코미디다.  

상영 시간을 자르고 화면의 부분을 자르는 데 쾌감을 느꼈던지 몇몇 비디오 제작사들은 절단의 미학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그것이 바로 영화의 중간 부분을 동강내어 영화를 두 개로 절단하는 것이다. 비디오 시장이 급속히 커지고 영화 한 편의 판권이 억대를 넘어서게 되자 그들은 테이프 하나로도 충분할 영화를 테이프 두 개로 만드는 재주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일에 125분의 영화라면 그 넘치는 5분의 길이를 최대한으로 이용해 영화를 1부와 2부의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120분이 넘는 영화를 자르지 않고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160분용 테이프가 시판되고 있으니 그걸 사용하면 될 것이고 그 남겨지는 테이프가 아깝다면 테이프 생산 회사에 알맞은 길이로 주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어김없이 120분을 조금 넘는 영화를 테이프 두 개로 만들어 파는 그 고약하고 염치없는 장사속이 비디오계를 활보하고 있다. 291. 

292쪽 

우선 아무리 큰 가게라도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비디오 영화는 오직 세 나라의 영화들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국산영화와 중국영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국영화 밖에는 없다. 국산영화라는 표현 뒤에 숨겨진 한국영화에 대한 불신고 업신여김, 그리고 홍콩영화를 중국영화라 부르는 혼돈과 둔탁함,게다가 나(292)머지 그 수많은 국가의 영화를 외국영화로 몰아부치는 그 저돌성과 분별없음.293. 

293쪽 

이렇게 세계를 한국과 중국, 그리고 외국으로 3등분한 다음에 영화장르는 보통 드라마, 에로영화, 그리고 공포영화로 역시 3등분 된다. 에로영화, 거기에서도 국산 에로영화의 진열대로 다가서면 갑자기 비디오 가게는 홍등가의 불빛으로 붉게 물들어간다. 그 제목들을 읽어보자. '목마부인', '싸릿골 마님' '찬란한 욕정' '굿바이 매춘' 등등.(중략) 이 풍요롭지만 거의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진 비디오 대여점을 거쳐 비디오 문화는 우리들의 가정에 닿는다. 거기서 새로운 영상의 소비 행위가 미래의 영화관을 예고하면서 일어난다. 80년대 중반 뒤로 나타난 가장 중요한 문화적인 사건의 하나가 우리의 가정용 텔레비전 수상기가 점차로 대형화되어 극장의 스크린을 닮아간다는 점이다. 게다가 스크린을 가정의 텔레비전을 닮아 축소되고 있다.  

(중략) 영화는 보통 어두운 공간에서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은 채로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감상하는 행위를 전제로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정신 집중의 소중한 경험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정신 집중의 소중한 경험을 준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혼란했던 신경조직이 한 올 한 올 가로 세로 잘 정렬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다 이러한 영화감상의 환경과 방법에서 나온다. 그러나 비디오는 이와 전혀 다른 혼란한 감상 행위를 전제로 한다. 

294쪽 

비디오를 보는 공간은 너무 밝고 지나치게 시끄럽다. 게다가 손님도 찾아오고 전화도 걸려온다. 한 편의 작품을 감상하기에 비디오의 소비공간은 낙제점이다. 아니 비디오 영화를 보는 것은 작품의 감상이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무엇인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걸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중략) 비디오 시장에서 인기가 있는 영화들은 비디오 감상의 이러한 혼란스러운 환경과 부주의한 관객에게 맞추어 강도 높은 자극의 영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유없이 빠른 장면 전환, 그리고 남용되는 카메라의 움직임, 번득이는 특수 촬영들이 인기 비디오 영화가 뽐내는 특징들이다. 게다가 비디오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돌발적인 사건의 시작 - 단순한 논리의 전개 - 그리고 급작스러운 결말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이 다 먹고 마시고 떠들고 움직이는 관객을 위해서 만들어진 비디오의 참담한 미학인 것이다.  

(중략) 비디오 관객의 손에는 원격 조종기(리모트 콘트롤)라는 마법의 물체가 들려져 있다. 이것으로 관객은 재미의 극대화와 감각 자극의 영속화를 위해 만들어진 상(294) 업 영화의 처방에도 만족하지 않고 최소한의 사고를 요구하는 부분을 건너 뛰게 된다. 그래서 조금 덜 재미있는 부분은 화면 탐색(서치)기능에 의해 스쳐 지나치게 되지만 매우 재미있는 부분은 반복과 느린 동작(슬로우)기능에 의해 거의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 295. 

295쪽 

솔직히 말해서 나는 비디오를 심심해서 본다. 거기서 의미를 억지로 가져다 붙이자면 최근의 영화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본다. 비디오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영화의 매우 긴 예고편을 보는 기분이다. 비디오를 통해 감동을 받을 준비가 나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계속해서 극장에 갈 것이다. 

이런 비디오도 있다 

296쪽  

우리의 비디오 가게에는 멋진 영화가 실종된 상태다. 아무리 열심히 동네 가게를 들락거려도 볼만한 영화를 찾기란 쉬(296) 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나라 비디오 산업과 그 시장의 믿을 수 없는 허상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한 해에 2천6백여편의 비디오 영화가 출시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중에서 동네의 비디오 가게에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고작해야 30퍼센트 정도다. (중략)필자도 얼마 전에 이 수치를 확인하고 어리벙벙해졌다. 그럼 나머지 70퍼센트의 비디오 영화들은 어디로 가나? 또 소비자에게 접근도 하지 못하는 상품은 왜 만드는 것일까? 단답식으로 말하자면 그 영화들은 대개 비디오 제작회사에서 비디오 도매상으로 배포되고 한 달쯤 뒤면 다시 제작사라로 반품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판매하기보다는 도로 반품 받기 위해 상품을 만드는 기가 막힌 현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97쪽 

지금 대한민국에는 전국에 3만 군데가 넘는 비디오 가게, 즉 비디오 소매점이 있다. 3만 군데, 이것이 어느 정도의 수효인가를 알려면 다시 한번 통계 숫자가 필요하다. 일본은 우리보다 인구는 세 곱절, 국민 소득은 네 곱절이 넘는 크고 잘 사는 나라다. 그런데 그 나라에는 비디오 가게가 1만2천 군데밖에 없다. 이것은 단적으로 우리나라의 비디오 소매점들이 지나치게 영세하고 너무 많다는 해석을 내려준다. 한 비디오 가게가 기껏해야 1천개가 넘는 정도의 테이프를 가지고 있을 만큼 규모가 작기 때문에 제작사가 아무리 새로운 영화를 비디오로 출시하더라도 일반 소비자에게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이상한 비디오 경제학이 지배하고 있다.

303쪽 

우리나라 영화는 거의 누구나 그 사정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극장이나 브라운관에서도 만나기 힘든 흑백시대의 고전들을 보고 싶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영화들은 찾아볼 수 없다. 상업성이 안맞는 것도 주요한 이유지만 영화 프린트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더욱 큰 이유다. 최근까지만 하더라(303) 도 한국영화는 극장 상영이 끝나면 폐기처분되기 일쑤였다. 많은 한국영화의 고전들이 필름의 성분인 은을 재추출하기 위해 불에 녹여졌다. 영화를 문화자산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상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304. 

304쪽 

나는 영화관에서 상영된 화제의 영화를 비디오로 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아무래도 극장에서 불을 끄고 대형화면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영화의 진짜 맛을 느낄 수 있다. 비디오는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를 볼 적에 그 가치가 있다. 비디오는 더욱 전문화된, 다양한 정보와 문화의 수용자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으로 김 빠지는 소리를 한 번 더하겠다. 열거한 비디오영화들은 독자들의 동네 비디오 가게에 없다. 거기에는 이미 알려진 뻔한 프로그램들로 가득하다. 멋지고 개성적인 비디오 문화를 즐기려면 시내를 횡단하여야 한다. 그리고 샅샅이 비디오 가게의 진열대를 뒤져야 한다. 누구도 도와 주지 않는다. 가게의 주인도 자기가 무엇을 비치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비디오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은 외롭다. 그러나 그 여행에서 거두어 올 전리품들로 우리는 얼마쯤 행복해질 수 있다.  

홍성남(1998). 비디오로 영화를 본다는 것. <필름 컬쳐>34~45. 

34쪽 

'유통'이나 '소비'의 측면에서 볼 때, 영화의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건 분명 아직은 이른 일로 여겨진다. 아니, 그건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화들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영화가 넘쳐나는 세상에 영화의 종말이라니. 물론 현재의 우리는 통상 영사기가 스크린 위에 사출하는 이미지와 사운드보다는 vtr의 신호를 거쳐 tv 브라운관에 맺히는 그것들을 통해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은 영화들을 접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시공간을 가로지르는 무수(34)한 영화들과 만날 잠재적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도 비디오 테크놀로지이다. 텔레비전 역사의 일부로서 시작된 비디오 테크놀로지는 어느새 영화(보기)의 역사에 그 곁가지를 굳건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이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비디오는 1차적으로 영화를 담는 매체와 거의 동일한 것이 되었고 심지어는 영화를 본다는 것과 비디오를 통해 본다는 것 사이의 경계는 사라지다시피 해 버렸다.(예컨대, 한국의 경우 비디오로 '미지의 영화들'을 보여 주는 몇몇 모임들을 굳이 '시네마테크'로 부르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기본적으로는 한국 영화 문화의 토양이 척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디오에 의존한 영화 보기가 자연스러운 행태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는 건 아닐까? 35. 

36쪽 

매체의 경계를 넘어가면서 텍스트가 굴절을 겪는다는 이런 식의 논의는 우리가 비디오로 영화를 볼 때 자주 목격하고 실감하곤 하던 바 그대로이다. 비디오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비디오 매체의 '부정확함'을 인식하는 것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밝기와 콘트라스트의 범위, 해상도, 컬러 재생력 등, 그 어떤 기술적인 요소에서도 비디오는 아직까지 필름을(36)앞서지 못한다. 타시로식으로 말해, 바로 그런 차이, 또는 상대적인 열등성이 비디오 텍스트를 형성하는 주요 요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차이는 그 존재 자체를 기꺼이 인정해 줄만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더 우월한 것, 또는 이른바 '오리지널original'(물론 이 필름-오리지널이란 것도 실제 시공간상에 존재하는 필름의 판본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이데아 같은 것임을 지적해야겠다)과의 사이에서 생긴 격차에 더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비디오로 가공된 영화 텍스트를 볼 때에도 항상 그것을 완결된 존재로 인정하기보다는 셀룰로이드 원 텍스트의 열등한 복제품내지는 파생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 원텍스트는 비디오라는 파생 텍스트를 낳는 모태인 셈이다.따라서 비디오 텍스트는 항상 그것의 필름 텍스트(즉, 원본 텍스트)와 결부되며, 그것을 보고(37) 있는 동안 오리지널의 존재는 우리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요컨대,최소한 어떤 영화 텍스트를 제공해 준다는 측면에서 볼 때, 비디오는 여전히 필름보다 열등한 매체이며 필름에 대해 파생적인 매체, 또는 2차적인 매체로 여겨지는 것이다. 비디오 테크놀로지의 비교 열위는 우리가 가진 이런 관념을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비디오의 질을 향상하고 비디오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들은 '진품'에 근접하려는 욕망에의 실현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38.

38쪽

 비디오 텍스트가 오리지널을 닮으려 한다는 것이 어떤 함의를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 레터박스 처리된 비디오 이미지는 흥미로운 실례를 보여준다. 화면을 굳이 '훼손'하면서까지 화면 위와 아래에 검정색 띠를 두른다는 것은 이미 오리지널의 존재를 상정한다는 것, 그것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하면서 되도록 그것의 새로운 복원을 열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레터박스 방식은 비디오 이미지가 필름 오리지널보다 열등한 존재임을 실토한다는 것이다. 레터박스는 분명 와이드 스크린의 '형태'를 모방함으로써 비디오 이미지를 오리지널에 보다 근접케 하려는 한 방식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더 광범위한 폭(즉, 공간)을 포섭하겠다는 와이드 스크린의 본래 '효과'마저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레터박싱은 (VCR과 연결되어)텔레비전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크기를 더욱 작게 만듦으로써 실제로는 영화를 텔레비전의 미학에 종속시킨다. 레터박스 방식을 통해 이미지의 크기가 더욱 축소됨으로 인해 비디오를 보는 우리는 필름-오리지널을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할 가능성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는 셈이다.  

39쪽 

영화적 아우라의 상실에 대하여 

비디오 관람의 경험은 어떤 점에서 볼 때는 일종의 상실의 체험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 우리는 오리지널리티(또는 진품성)를 잃어버린 텍스트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상실하는 것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영화 관람이 제공했던 농밀한 체험 혹은 (준) 종교적인 경험일 것이다. 텍스트의 컨텐트만을 담아 내는 비디오 테이프에 복제할 수 없는 그것은 영화적 아우라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고유한 광휘이다. 

40쪽 

아우라적 경험, 황혼녘의 최면적인 몽상, 충일한 감각의 유포리아, 그 어떤 표현을 쓰든, 이것들은 확실히 비디오 시청을 통해서는 도통 얻을 수 없는 경험들이다. 물론 이건 보고 있는 어떤 영화의 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조건과 관련된 문제이다. 비디오 경험의 기본 조건으로서 텔레비전적 환경에서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이 줄 수 있는 일종의 충만한 엑스타시는 대개 증발해 버린다.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이 그 한 가지 요인으로 꼽힐 수 있을 테지만, 여기서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어둠의 부재'일 것이다.  

(중략) 영화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지각 형태에 있어서 이제(40) '일별 glance'의 양식이 '응시 gaze'의 양식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41) 비디오를 매개로 영화 보기가 이처럼 일종의 의식의 영역, 또는 적어도 비일상의 영역에서 일상의 영역으로 이월하면서 그것의 각 체험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의 이름을 잃게 되었다. 즉 비디오는 그것들을 일련의 '익명적인 체험들'로 바꿔버린 것이다. 영화관에서의 경험과 비교해 비디오 관람은 상대적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덜 받기에 비디오는 영화 보기로부터 어느 때, 어떤 장소라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탈취한다. 그렇게 고유성을 상실한 영화보기는 다른 일상적 경험들, 이를테면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행태가 되어 가고 있다.  비디오를 통한 영화 보기의 일상화와 관련해 또 하나 지적해야만 할 것은 그럼으로써 영화라는 것에 대한 경외감이 점차 희박해진다는 점이다.  (중략) 비디오에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영화의 신성함을 희석시키는 데 기여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두가 동일한 형태를 갖춘 비디오테이프를 손에 쥐었을 때부터 이미 우리에게서 영화가 무언가 신비한 것이라는 관념은 자취를 감춘다. 물론 필름에 감긴 영화도 똑같은 모양들을 취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비디오 테이프처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일상용품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42쪽 

비디오 테이프의 물성이 우리의 손에 직접 감지될 때, 바로 그때서야 우리는 영화란 대량 복제된 공산품의 일종이기도 함을 실감하게 된다. 지독한 물신 숭배자가 아닌 이상 여기에 특유의 어떤 독특한 분위기나 정기가 배어있다고 믿기란, 그리고 그런 비디오 테이프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예술품이라고 믿기란 힘든 일처럼 보인다.('특정'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쥐고 전율하는 경험을 하는 것은 아마도 소수의 비디오 수집가나 시네필의 몫일 것이다).  

고전 영화의 종언 

43쪽 

영화관에 들어가는 동시에 우리가 (영화관의 스케쥴, 텍스트의 권위 등에 의한) '통제'를 받는 대상이 되는 것과 달리, 비디오 경험은 우리에게 능동성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일단 비디오 관람은 우리 자신의 행동이 없이는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우리가 비디오 테이프를 VCR에 넣고 작동을 하는 순간(43)에서야 이 경험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영사 기사가 된 우리들은 영화를 보면서 더 많은 노동을 우리 자신에게 부과한다. (자신이 영사 기사가 되게 함으로써 비디오 관람자는 '프롤레타리아화'한다고 타시로는 지적한다). 우리는 어떤 장면을 멈추게 할 수 있고, 뒤로 돌아갈 수 있으며, 흥미 없는 부분은 함부로 건너뛸 수도 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 마음대로 중도에서 영화를 끝마칠 수도 있다. 비디오는 이런 식으로 영화를 통제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텍스트와 관람자 사이의 위계 질서를 뒤집어 놓는다. 선형적인 방식을 따르길 거부하는 이런 행태들은 단순히 영화를 대함에 있어서 우리의 무책임하고 부주의하며 게으른 태도의 소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영화에 대한 일종의 공경심의 결여가 우리로 하여금 지극히 기능주의적인 '통제'를 행사하도록 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전편이 챕터별로 나뉘어 있고, 그런 중간 지점들에 들어갔다 나오기에 아날로그 비디오보다 훨씬 용이한 DVD의 경우는 지루함의 제거라는 기능을 더 잘 충족시켜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텍스트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통제력을 행사한다. 이를테면 리와인드는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하고 프리즈 프레임은 극장 경험이 줄 수 없었던 영화 이미지에 대한 감식을 가능케 한다. 그렇기에 비디오는 우리를 단지 경험의 지평에 위치시키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에게 비평과 분석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건 분명히 '영화적 경험'이 줄 수 있는 엑스타시와는 다른 차원의 쾌락일 수 있다.  44쪽 

45쪽 

(옮긴이 : 타시로나 한센) 이들의 추상적인 유토피아론은 도대체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비디오는 분명 고전적 영화의 해체에 일조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것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무너진 고전 영화의 잔해 위에는 무엇이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우리의 눈엔 아직 그것까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 싶다. 

김지태(1996.6). 컬트 영화. <비디오 무비>. 162-165.  

162쪽

컬트 영화는 여전히 낯설다. <록키 호러 픽쳐 쇼>,<글렌 혹은 글렌다 Glen or Glenda?>,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플라밍고>등 '공인된'컬트 영화들을 우리는 영화 전문 저널이나 평론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일부 시네마 테크의 비정기적 상영을 통해 이러한 영화들을 접할 수 있지만, 컬트영화의 본래 의미인 '특정한 영화에 대한 종교적 숭배'와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시네마 테크라는 '컬트적 공간'에서 우리의 영화광들은 미국 심야극장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던 컬트 영화들을 엄숙하게 확인해 볼 뿐이다. VCR을 통한 영화보기는 그나마의 관객 체험도 허용치 않고 집단적인 열광 현상을 개인적인 발견과 만족으로 바꿔놓고 있다. 젊은이들의 열광적 지지 속에서 뉴욕에서만 14년간 연속 상영됐다는 전설의 <록키 호러 픽쳐 쇼>가 VCR의 반복관람을 통해 은밀하게 확인될 뿐이라면 컬트 영화로서의 생명력은 이미 잃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이런 특수한 영화 체험이 영화광들을 중심으로 '나 만의 컬트'식 자가당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165쪽 

비디오를 통한 개별적 영화 체험의 확산은 컬트 영화의 속성마저도 변모시키고 있다. 심야 컬트 영화에서 나타났던 저항과 위반, 일탈이 사라지고 개별적인 '컬트적' 요소들의 의식적 조합으로 스스로 컬트 영화임을 표방한다. 음반 산업에 포섭되면서 변절된 록 문화처럼 컬트 영화는 거대한 영화 상품 시장에 편입되면서 '컬트적'이라는 모호한 볼거리 혹은 색다른 스펙타클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갖가지 선전문구와 가십성 평론도 여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류미혜,한전영,장성림(1991.12). 긴급제안 컬트영화 걸작 100. <로드쇼> 

193쪽 

온 세상에 갑자기 컬트 '사기꾼'들이 천하대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컬트영화를 알린 것은 전적으로 영화광들의 사랑에 대한 응원과 지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컬트영화는 장사꾼들의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영화광이라면, 그래서 92년 영화의 자존심을 걸고 컬트영화를 지키는 싸움에 나설 것을 긴급히 제안합니다. 우리를 컬트영화 진영에 대한 전면적인 논쟁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먀, 이 100편의 영화는 바로 그 선전포고입니다. 제발 더 이상 순진한 영화광들을 농락하고 짓밟으며 거짓 프로그램으로 그들을 현혹시키지 마십시오.  

도정일(1995.6.13-20). 영화보다 더 큰 텍스트 : 날씬한 관객되기의 훈련.<씨네21>. 

32쪽 

많이 본다고 좋은 관객은 아니다 

영화의 경우에도 좋은 관객은 반드시 유능한 생산적 관객이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유능한 관객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영화 세편씩 보거나 온종일 비디오를 켜놓는 '광'의 경지에 이른다 해서 유능한 관객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감독과 배우의 신상명세를 줄줄 꿰고 스캔들을 외우고 제작에 얽힌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수집하는 것도 유능한 관객의 능사는 아니다. 유능한 관객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사람이 아니라 문학 독자의 경우처럼 영상 텍스트를 '읽어내는'사람이다.  

DJUNA(1996.12.24~1997.1.17). 영화, 억지로 보지는 마셔요.<씨네21>. 

83쪽 

(전략) 문화인 행세를 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들이 꽤 많습니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중 상당수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재미없어요.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게 되죠. 아까도 말했지만 요새는 정보 얻기도 쉬우니 거짓말도 쉽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조금도 없다는 겁니다. 영화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여러 가지 있는데 그것들 중 일부는 영화를 보지 않아도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를테면 지식 과시, 마감 땜빵, 영화퀴즈 풀기, 심지어 평론(영화를 본 뒤 자기 예단을 바꾸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요?) 같은 것들 말이에요. 영화관에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아대며 주변 관객들을 방해하지 않고도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냥 보지 마세요. 영화는 고문이 되어선 안 되니까요. 

정성일(1998.12). 영화 매니아들이여, 무대 위로 나서라!. <월간 말>. 

221쪽 

(전략) 홍콩영화가 일시에 무너졌다. 한국 시장에서의 철수가 아니라 홍콩영화 산업의 자체붕괴에 따른 결과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한국영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것은 다행이었을까. 지하시장의 움직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는 지난 20년간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매니아의 자생적 출현을 낳은 토대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매우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비디오는 무차별하게 출시된 영화들 속에서 '쓰레기속의 보물'을 찾아 내는 즐거움을 안겨 주는 한편, 국경을 넘나드는 불법 비디오 시장을 창출해 냈다. 그 중 가장 먼저 시작되었으며,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 특징은 저패니메이션 매나아군의 형성이다. 80년대의 '비정치적 불법연대'를 이뤘던 매니아들은 비디오 지하시장을 본거지로 '안전한' 즐거움을 얻었으며, 혹은 즐거움은 금지되었더라도 지식의 기쁨을 누렸다. 이 기쁨은 정보를 획득한 이들과 차단된 이들 사이에서 미시적인 권력의 형태로 바뀌었다. 동호회는 확대 재생산되었고, 매우 빠른 속도로 전염되었다. 

222쪽 

그들은 그 어떤 경제적 이익을 바라지 않으며,(그렇기 때문에 통제되지 않는다.) 매우 진지하지만 동시에 변덕이 심하고,또한 경쟁에 민감하다. 유행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일제히 열병에 사로잡혀 커다란 힘을 만들어 내지만, 지나가 버리면 반성적 성찰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  (중략) 영화는 탐욕에 불타는 잡식성을 가졌다. 소설이건 만화건 유행가건 가리지 않고 자기의 자장권으로 끌어들인다. 유난히도 영화가 퀴즈에 어울리는 것은 그것이 잡다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대중문화의 자락을 펼쳐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이광호(2002.6). 영화평론가 정성일. <월간 말>.  

137쪽 

(전략) 영화평론가는 영화를 어떻게 볼까 궁금하다. "처음에는 그냥 편안하게, 두 번째 볼때의 준비물은 세 가지입니다. 메모장은 목에 걸고, 한 손에는 타이머로 커트수를 재고, 다른 손은 롱테이크인지 편집인지를 알기 위해 시간을 재는 워처를 들고 있죠. 영화는 소설과는 달리 보다가 되돌아갈 수가 없잖아요. " 

김소영(). 시네필리아와 네크로필리아. 1051~1069. 

1061쪽 

90년대의 영화 수용적(물론 이때 수용은 생산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그 둘은 상호 영향권 안에 서 있다) 맥락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흐름은 영화과 대학원이라는 학문적 제도와 각종 문화 강좌를 통해 생산되고 있는 영화 연구자들의 급격한 수적 증가와 영화 마니아라고 불리는 시네필리아CINEPHILIA의 출현이다.  

1062쪽 

80년대에도 프랑스 문화원이나 독일 문화원의 시네마테크에 모여들어 필름 소사이어티를 구성하고 '열린 영화'와 같은 잡지를 만들고 8밀리나 16밀리 카메라로 영화를 만들던 시네필리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 수가 많아야 수십 명을 넘지 않는 소수의 그룹이었다. 사회적인 현상으로 감지되어 하나의 담론적 장을 이룰 수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록 마니아나 컴퓨터 게임 마니아 등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가시화된 90년대의 영화 매니아는 동시대의 영화 지형의 변화를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집단이다.  

1068쪽 

(전략) 역사화해서 본다면 시네필리아는 그 자체가 비정치적인 집단이라기보다는 어떠한 문화 정세 속에 놓여 있고 어떠한 지향점을 갖느냐에 따라 영화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수용자와 생산자가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집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미지의 대량적 기계 생산이 이루어지고 스펙터클 사회가 형성되고 극장과 비디오를 통해 영화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상당한 수의 시네필리아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안적 영화 프로그램을 갖춘 극장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주로 비디오들을 통해 영화 사랑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시네필리아이기보다는 비디오필리아에 가까운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중략)현재 대안적 영화문화의 빈곤함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 시네필리아는 이런 '볼 수 있는 자'로서의 예민함보다는 감독의 연보나 작품의 백과사전적인 영화적 지식의 습득을 영화 사랑하기의 원칙으로 삼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경우 스크린 위에서 나와 관계를 맺지만 언어로 환원되길 거부하는 이미지의 어떤 과잉, 친숙한 것이지만 억압되어있던 어떤 것이 주는 감정적 강도의 경험이라는 포토제닉한 그리고 시네필적인 경험의 판타지는 안전하게 백과사전화된 지식의 탐식으로 대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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