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직접 방송을 보지는 못했는데, 모 방송에서 지방선거 예측결과를 보도했나 봅니다. 당연히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했을테지요. 한나라당이 생각보다 압도적인 차이로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내용이라고 들었는데, 이 결과에 대해 제가 잘 가는 커뮤니티 몇몇을 돌아보니 많이 분개하시는 분들을 발견했습니다. "국민들이여, 아직도 정신 못 차렸습니까.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릴 겁니까"류의 말들. 하지만, 이런 분개를 넘어 좀 깊은 생각을 가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뭐, 여론조사 저것 믿을 것 못되요. 나 이런 류 전화오면 확 끊어버리는 데 뭘, 이런 조사 어떻게 믿어 등의 그 과정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는 것을 넘는 어떤 해석 과정을 넘어선 무엇 말이죠.
여론조사가 주는 섹시함은 바로 그 숫자가 주는 불끈불끈한 매력적인 '능력 재현 기술'일 것입니다. 특히 '누가 되어야 한다'같은 당선의 입장에서 볼 때, 숫자는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매력을 한 번 더 신봉하게 되는, 혹은 조명하게 되는 기능을 가집니다. 어쩌면 이런 기능은 수행적일 수 있습니다. 즉, 원래 이 사람의 힘이 대단해서 그 숫자의 힘은 당연하다는 논리가 되는 차원도 있겠지만, 반면에, 그런 숫자의 힘을 신봉함으로써, 그 숫자가 그 사람의 힘을 '만들어주는' 역할도 무시 못하는 것이겠지요. 이것은 아마, '미디어 이벤트' 성격이 강하고, 갈수록 '이미지 정치'가 강조되는 현대 정치 세계에서, 더욱 더 강조될 것 같습니다.
이런 여론조사가 갖는 수행성의 신화를 물리치기 위해서 저는 문화연구자 이엔 앙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급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두 사람을 끄집어내는 이유는 둘 다 '숫자놀이의 신화'를 학술적으로 타파해보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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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현대 문화연구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학자인 이엔 앙은 <Living room wars>라는 유명한 아티클에서 '시청률 조사의 폭력'을 주장합니다. 즉, 갈수록 시장 논리의 개입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시청률'이라는 명목으로 '감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죠. 이는 '시청률 조사 기기'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런 시청률 조사가 사람들의 시청 행위 구석구석을 분류화,명목화 시키면서, 시민들을 또 다른 '판옵티콘'안에 집어넣었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주장엔 이런 논지가 숨어 있지요. 숫자의 힘을 의심하자. 그 숫자 안에 있는 자본주의의 간섭을 인식하자. 시장중심주의의 영향 안에서, 우리가 미디어를 소비하는 모습을 그렇게 분류해버리는 게, 과연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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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장면. 이 장면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사회학의 문제들>이란 책에서 언급한 것입니다. 부르디외는 여론조사라는 것은 결국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사람의 도덕적 의지가 설문조사 항에 숨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런 도덕적 의지가 일종의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 같은 '문항에 교묘하게 숨겨지면서, 그런 도덕적 의지를 정치적 응답으로 바꿔 낸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는 우리들이 역사적으로 미디어에 관련된 유해도 조사를 면밀하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유해도 조사의 신화 파괴는 생각보다 쉬운 게. 바로 부르디외가 언급한 그 대목이 고스란히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즉, 이건 우리네 일상에서 쉽게 하는 질문 놀이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내가 질문 낼 께. 하나 맞춰 봐"라고 시작하는. 만약 그 질문이 어떤 수치를 물어보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가치를 판단하는 문제라면, 질문을 내는 사람은 이미 답을 내려놓고 그 답을 응답자에게 유도하는 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 미디어를 평소에 얼마나 자주 보시나요? 이 미디어는 우리나라에 나쁜 환경을 초래할까요?"라는 질문이 나오면, 거기서 우리는 어떤 응답을 하게 될까요?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으로 포장된 이 '도덕적 문항'은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현실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두 학자의 견해를 통해, 우리는 여론조사가 갖는 숫자의 이면,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실 이 부분도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선거의 경우, '정치공학'이라는 표현이 부쩍 늘어났고, 선거 전략에 대한 이런저런 과학적 분석이 나타나면서, 더 복잡한 부분들이 있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이런 '여론조사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가끔 우리는 '만들어진 결과'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숫자를 곧이 곧대로 믿으라고 하는 그 '신봉의 강요'가 노리는 결과는, 현실에 대한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더욱 더 '열정적으로' 냉소주의를 가지기를 요구하는 것이라 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시대는 보다 '열정적인 냉소'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정치의 맛을 끊지 못한 채, 이런저런 불합리한 정치적 관행의 덫에 빠져 나오길 싫어하는 정치인들은 이 '열정적인 냉소'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열정적인 냉소'. 우리는 이 뜨거움과 차가움이 섞이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 지 잘 압니다. '미지근함'이지요. 내가 참여해도 결국 그 놈들이 될 텐데라는 그 미지근함 말이죠.
'열정적인 냉소'를 무찌르기 위해선, 여론조사가 가진 '수행성'의 힘을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도 바쁜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봄직한 일상 속 정치 행위가 아닌가 싶습니다. 때론, 그 숫자의 힘을 가지고 이런저런 조합으로 '정치 컨설턴트'를 자처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숫자의 힘에 너무 큰 분개와 너무 큰 실망감, 너무 큰 환호를 보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연못에서 나오기. 일단 '저지르고 보기'라는 정치적 유희를 의심하기.
이 의심이 지향하는 미래는, 이엔 앙이 말했던 '불확실성'입니다. 오히려 그 숫자가 주는 분명함에 대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적극적, 능동적 정치적 의지는 지금의 그 당연함을 전환시킬, 우리들의 소중한 정치적 의사 표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필사적인 '도전 의식'이 아닌가 싶어요. 여기서 제가 소망하는 '불확실성'은 우리의 의지를 꺾는 이 현실을 평하는 부정적 언어의 시장으로 진입하는 도구가 아니라, 가장 뜨거운 정치적 열정의 복권을 말합니다.
하나,하나 해 가면 됩니다.
이번 선거는 꼭 투표합시다! (결국 이 잡글의 한 줄 요약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