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쇼쇼 - 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
이성욱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6월
품절


90년대 들어 성 문제에 관한 문제제기의 앞머리는 언제나,우리가 얼마나 성적 억압을 받아왔는가 혹은 성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억압적인가에 대한 성토와 폭로였다. 그래서 이 성토와 폭로는 다시 말해 지배적 성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라는 내부적인 것과 지배적 성윤리를 정립하고 존속시키는 외부적 사회장치에의 반란과 해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셈이었다.(중략)푸코는 프로이트의 억압가설을 반박하면서 근대사회는 나름대로 성에 대한 지식,정보,윤리,유통,확산,실천의 메커니즘을 발명,존속시켜 왔다고 주장했다.-83쪽

80년대 의식화 학습과정에는 전형적인 커리큘럼이 있었다. '시각교정'용으로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등이 선택되었고 혹은 광민사에서 발생한 '노동의 역사'나 '노동의 철학'등에서 출발하기도 했다. 좀 더 나중인 80년대 중반에는 '철학에세이'에서 시작하여 소비에트 철학 교과서로 넘어갔다. 생각해보면 우리 세대가 거친 성 학습의 이력에도 일종의 자생적인 '커리큘럼'이 있었던 듯 싶다. 백과사전에서 시직하여 다음 단계는 여성지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이다.-90쪽

tv에서든 성이 어떤 형태로든 거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이 기억난다. 60년대 말 쯤의 tv에는 어린이 시청불가 프로그램이 종종 있었다. 명화극장 같은, 대개 밤늦은 시간대의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먼저 조그만 병아리 그림이 나오면서 아이들에게 해로울지 모르니 아이들은 어서 재우고 시청하라는 권고였다. 말하자면 이즈음 '음란비디오는 마마나 호환보다 무섭다'고 경고하는 것의 60년대 판본인 셈(95)이었다. -95,96쪽

만화방은 영화와 더불어 성에 관한 중요한 학습소였다. 아이들 만화야 그렇지만 70년대 초 나오기 시작한 성인만화는 참으로 별경이었다.-96쪽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비판 문화'잉태 : '검열'이라는 강박관념으로 나타난 퇴폐문화(1960~1970) 대중문화는 어쨌든 대중과 가장 친한 문화이다. 대중들이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또 자연스럽게 대중문화 텍스트에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현상은 그 공과를 떠나 대중문화의 일상적 위력을 충분히 일러주고도 남는다. 그래서 지배블럭은 언제나 대중문화에 대해 두 가지 전략을 취하게 마련이다. 하나는 대중문화를 지배 이데올로기의 숙주로 삼기 위해 대중문화의 생산과 유통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검열이다. 물론 후자는 전자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은 이런 측면에 대한 비판이었던 셈이다. 한국에서 근대적 대중문화가 출발한 이래 그것은 일본 식민지 통제 전략,그리고 해방 후 독재정권의 장악 및 활용의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음은 우리 모두의 체험으로 확인된 바이다.-133쪽

80년대의 대중문화는 오히려 독재정권의 고전적인 3s정책에 의해 외면적인 활황을 맞이하는 듯하였지만 80년대가 한국전쟁 이후 가장 격렬한 대립과 투쟁의 연대였다는 점을 상기해 볼 경우 검열의 논리가 정치적 측면에서 얼마나 강력하고 치밀하게 시행되었는가는 따로 확인해 보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짐작되는 바이다.-137쪽

진보 표방하는 한 피할 수 없었던,모순 해결을 위한 문화:'계급'이라는 강박관념으로 나타난 민중문화(1980) 광주민중항쟁으로 문을 연 80년대.그 항쟁의 경험은 80년대 문화예술분야에도 획기적인 변동을 야기했다. 이른바 문화예술과 계급투쟁의 동일화라는 목표의 설정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광주'가 80년대 전체의 머리 위에 세례한 것은 소위 사회주의 사상으로 요약되는 계급 이데올로기의 복원이었다. 기실 문화예술과 계급 혹은 사회주의 사상과의 관계는 카프의 사례가 일러주듯이 한때 문화예술의 주류적 흐름이기도 했다.-137쪽

문화예술의 계급적 실천이 보다 더 중요한 화두로 자리하면서 당대의 문화운동은 보편적 운동 및 과제에 포괄되는 특수한 운동 및 과제라고 정리되었다. 보편과 특수의 구분이 말해주듯이 예의 정리 속에서는 문화 예술이 보편적 과제 다시말해 계급문제의 해결 과정에 문화예술적 직능으로 복무하는 활동으로,다시말해 중심에 의해 관리,통제되는 활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138쪽

생각해 보면 80년대는 계급문제의 첨예함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 문제들이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격동한 연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따라서 근대적 미의식의 핵심이랄 수 있는 미적,예술적 고유함이 80년대에는 미처 주장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그런 사정이 곧 문화예술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사고보다 문화예술 활동가를 곧바로 '문선대'로 간주하는 무의식을 자아내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그런 측면은 문화예술에 한정해서 볼 경우 일단의 상처로 비쳐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 문제와 문화예술의 관계를 가장 진지하고 직정적으로 사고했던 80년대의 경험은 근대적 미의식의 또다른 성질인 문화예술의 정치성을 유례없이 실험해 보고 체험해 본 과정이 아닐 수 없다.-140쪽

무반성적인 소비가 부른 극한적 부산물 :'소비'라는 강박관념으로 나타난 거품문화(1990) 80년대 말의 이른바 3저 호황은 우리나라도 문화의 소비가 가능하다는 것을 예시해 주었다. 근대화의 최대 과제를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오랜 가난의 극복에서 찾고자 했던 우리의 현대사는 드디어 문화예술도 소비의 영역이 될 수 있다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60년대에 시작된 개발독재가 가속을 걸기 이전까지 최소한의 의식주에 허덕이던 시대만 해도 문화예술의 향유와 소비는 팔자 좋은 나라에서나 가능한 아주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상황이 급변하여 사회적 관심과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의식주가 아니라 어떤 의식주가인가 하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가 아니라 사람들의 표현 욕망과 현시욕을 충족시켜주는 특별한 의식주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기 시작한 셈이다.-141쪽

문화산업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90년대는 대중들의 일상전체가 심미적 대상으로 등장하게 된다.요컨대 일상의 심미화가 현저한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상의 심미화는 일상을 심미적으로 꾸미는 요소와 계기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 심미적 효과의 생산을 위해서 대중은 다양한 문화예술적 용재들을 사들이고 소비할 수밖에 없다.심미성을 필요로 하는 곳은 다양했다. 주거 공간도 그러하고 노동의 공간 휴식의 공간도 그러하거니와 자신의 몸 그 자체도 심미적으로 디스플레이해야 할 공간이었다.-142쪽

일상의 심미성은 몸을 비롯해 현대생활 전부를 장악하는 일련의 메커니즘으로 자리하면서 이른바 미학적 대중주의를 낳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말하자면 대중들의 평범한 일상적 차원에서도 심미성에서의 욕망이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해지면서 미학성에의 추구와 안착은 말 그대로 대중적,대량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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