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부재하는 것은 '시민'이다. '시민'은 실현되어야 할 이상, 곧 아직 추구되지 않은 현실이다. '시민의 서사'는 이 영화에서 '탄생'이 아닌, '복권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저 사람들에게 핏빛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해서, 그들에게 검투사의 생살여탈을 함성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해서, 그들에게 '시민'이라는 위상을 덧씌울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살여탈권의 주인은 아직 '코모두스'이다. <글래디에이터>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not yet, '아직은'이다. 이 '아직은'이란 시간의 표현 속에서 저 무수한 이들은 '군중 mob'으로 정의된다. 그들은 '아직' '참-권리'를 행사하고 있지 못하다. 황제는 '아직은'이란 시간의 수사를 잘 활용할 것이다. 이 수사 속에서 '시민 되기'의 야망을 겸손하고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공화제'를 열망하는 이들은, 그 열매를 수확할 것이다. 고로 우리가 이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파악해야 할 것은, '의사-권력'이라는 달콤한 선물을 준 코모두스가 행사하는 현실 속의 진짜 권력이다.  

우리는 아직  푸코가 『성의 역사』에서 강조하는 억압과는 다른 차원의 권력론으로 섣불리 해석할 수도 없다. 아직 우리는 '생-정치'라는 말을 여기에 쉽게 덧붙이기 어렵다. 다만 이론의 삽입이라는 흥분을 가라 앉히고, '생살여탈권'이라는 힘 자체에 주목하자.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주권자'라는 이름을. 이 주권자의 통치를. 그 통치 형태를. 차라리 이것은 스튜어트 홀이 『대처리즘의 문화정치』에서 말했던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에 가깝다. 멀리 갈 것 없이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보여준 그 기이한 스펙터클의 정치는, 저 오래 전 로마의 폭군 코무두스가 보여준 통치 방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단순히 시각성이 주는 쾌락, 그 광엄함과 웅장함이라는 스펙터클에서 유사 관계를 따질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정치의 목적이 과연 '시민을 위함'에 있었던 것인가에 봐야 한다. 코모두스의 '권력'은 오히려 군중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 군중을 포섭하는 것이었다.(전두환과 코모두스의 걱정은 자기 생명의 보존이었을 것이다) 이 포섭 전략 속에서 코무두스는 군중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그들을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들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다는 황제의 권위가 가장 가까이 기대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스스로의 생살여탈권이다. 자신에게 두려움이 되는 존재, 자신을 살리거나 혹 죽일지도 모르는 존재들. 코모두스를 둘러싸는 그 존재들이란 정확히 말해,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이상. 바로 '시민-되기'의 열망을 꿈꾸는 자들이 취하는 분노의 눈빛이다.     

 푸코가 말했던 것처럼, 법은 검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 자신이 법이었던 코모두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는 엄지손가락, 가까이에 있는 검. '시민의 열망'을 가진 자들은 검의 논리에 설 수 없다. 법 앞에 서 있는 시민은 곧 검 앞에 서 있는 시민이었으며, 그 '서운한' 공포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콜로세움에 진입하여 막시무스가 코모두스를 다시 대면하게 될 때. 군중들이 외치는 '살려라!'라는 구호는 사실 코모두스가 군중들에게 듣고 싶어하는 것인지 모른다. '시민의 서사'를 회복하려는 즉시, 자신은 '시민 되기'의 열망에서 배제될 수 있음을 코모두스는 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내세우는 그 엄지손가락의 올림과 내림이란 '상징'은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의 권력이 비추는 강함과 약함이 얼마나 약한 경계 속에 있는 것인가를 뜻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자신이 법체로서 갖는 강권함을 '과시'하는 쪽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권력 그 스스로의 강권함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던 코모두스의 연약함에 더 마음이 간다) 그리고 그 약한 경계 속에서 코모두스가 군중들의 엄청난 '결정의 소리'들을 접했을 때, 그가 갖는 엄지손가락의 '결정 상태'는 그 스스로가 자신에게 생살여탈권을 스스로 행사한 것일 수 있다. "시민이여, 아직 나를 죽이지 말아라!. 비록 나는 너희들보다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나에게 검은 검이 아니오, 오직 나의 검은 이 콜로세움에서만 빛을 발하는 엄지 손가락임을".  막시무스는 바로 그 지점을 알고 있고, 그래서 코모두스는 그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폭군으로 묘사된다.  (두려움의 극단적 방어는 살인이 아닐까)  

 어찌 보면 이 '시민-되기'의 열망이 우리에게 사유의 지점을 하나 던져주었던 건, '살려라!' 그리고 '죽여라!'라는 구호 자체의  실효를 꾀하는 자들의 중첩이다. 황제도 군중도 살려라!와 죽여라!를 외친다. 그러나 코모두스는 콜로세움의 핏비린내라는 살인의 풍경을 군중들이 '기호'로 느끼게 끔  만든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의 생살여탈권은 행사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그것을 감상하고 반응할 뿐이다. 이 '행사'의 권리는 코모두스의 것이다. 그러나, 이 권리를 감상과 해석이 아닌 실제 행위로 참여하고픈 집단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시민'이다. 이는 시민의 잔혹성을 섣불리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이 시민으로서 생명을 이야기하는 차원이 아닌, 생명의 존엄을 스스로 수호할 수 있는, 결정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의 권리를 확보하고 싶은 자들이 시민이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군중. 그리고 이 군중에게 던져지는 빵 덩어리들. 그들의 쾌락을 바라보는 황제와 권력자들. 막시무스는 아직 시민이 되지 못한 군중과 시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황제 사이에 존재한다. 그는 황제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자에서 로마시대 황제와 극단의 계급적 위치에 있던 노예의 서사를 감내해야 했던 자였다. 이 파란만장한 자기 서사 속에서, 우리는 그 서사가 감내하는 고통을 알고 있다. 우리가 시민이 되기 위해 쏟아 부었던 역사의 광경들 또한 알고 있다. 고로 우리에게 시민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지만, 그 고요를 떠받드는 것은 여전히 살벌한 늑대의 시간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 그 시간을 망각하게 만드는 오늘날 권력자들의 통치를 날카롭게 보고 싶은 열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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