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578
“강간범을 거세시켜야 할까? 그러지 말란 법도 없다.” 의회 토론에서 미셸 알리오마리 프랑스 내무장관이 한 말이다. 인권에 대한 이런 시대착오적인 관점(눈에는 눈, 이에는 이)은 다른 분야에도 확산되고 있다. 정신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의료개혁의 결과로 수십 년간 쌓아온 성과들이 뒷걸음질치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가 몰고 온 변화들은 정신질환자를 치료가 필요한 한 인간이 아닌,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고 있다.
2008년 12월 2일은 프랑스 정신의학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현직 프랑스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정신병원(파리 근교의 앙토니 병원)을 몸소 방문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그가 한 발언 때문이기도 하다. 역대 프랑스 국가 최고통치자들 중 이처럼 정신병에 낙인을 찍는 발언을 했던 예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단호하다. 그가 보기에 정신병 환자들은 위험한 존재다. 그런 생각은 그의 발언들 속에서 잘 드러난다. “여러분의 노력은 매우 만족스러운 결과들을 내고 있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이 퇴원시킨 환자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병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많습니다”에서부터 “정상인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때로는 실현 가능성이 적은 희망 때문에 (…)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까지. 그의 발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는 정신병 환자들이 한 인간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정신병 환자들의 문제도 심각하지만 버젓이 길을 활보하는 사람들 중에도 위험한 환자들이 많습니다.” 그의 발언들을 더 잘 음미하고 싶다면, 전문가들의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 노숙자들 중 30%가 정신이상으로 고통받고 있다. 다시 말해 정신질환자라는 말이다. 이들은 병원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차가운 길에서 죽어간다.
사르코지는 자신의 생각을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는다. “교도소와 병원, 경찰 간 3자 공조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3자 간에 균형과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좀더 분명해진다. 위험은 도처에 있다. 교도소 안도 위험하고 교도소 밖도 위험하다. 오늘날 정신병은 무엇보다 안전의 문제이다. 이제 정신병 환자들도 아동성범죄자와 테러리스트들에 이어 공포에 떠는 대중에게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통계자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일반인의 범죄율보다 높지 않다.(1) 또한 정신질환자들이 작거나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 중 상당수가 치료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정신병원에 필요한 건 안전요원이 아니라 충분한 수의 전문의다. 정신질환자들은 무관심과 따돌림, 폭력의 희생자로서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경우가 많으며 ‘정상인들’에 비해 기대수명도 짧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몰아세우는 사르코지의 재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희생자를 가해자로 둔갑
그의 발언은 우연한 시점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르노블에서 한 정신분열증 환자가 젊은 남자를 살해한 사건(2)이 있은 며칠 후에 그와 같은 발언이 나왔다. 언론플레이에 능한 사르코지에게는 대중의 감정을 이용해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좋은 기회였다. 그는 곧바로 ‘정신병원 보안강화 계획’이라는 정책을 세우고, 여기에 3천만 유로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신병원의 출입을 통제하고 환자의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환자들의 동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환자들에게 위치추적 장치를 부착해 탈출하면 경보장치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필요한 모든 병원’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폐쇄병동이 도입되고, 200여 개의 폐쇄병실이 마련될 것이다. 또한 기존 5개의 폐쇄병동에 4개의 중환자병동(UMD)을 추가하기 위해 4천만 유로가 투입될 예정이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코지는 강제 입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그는 잘못된 통계 수치를 법 개정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강제 입원이 전체 입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3%에 이른다. 환자 자신의 동의 없이 정신병동에 입원시키는 경우를 강제 입원이라고 하는데, 그중 대부분은 제3자, 주로 환자 가족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2008년 4월 보건부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환자의 행동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판단해 강제 입원을 시킨 경우는 전체 입원의 2%에 불과하다. 사르코지에게는 2%라는 수치가 인용하기에는 너무 적었을 것이다.
사르코지는 새 법안에 통원치료를 포함한 의무치료 조항이 명시돼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의무치료 조항은 환자의 기본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 간호사들이 경찰과 함께 몰려와 반항하는 환자에게 주사를 놓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치료 행위는 기본적으로 환자들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신과 의사 기 방이옹의 말처럼, 환자들은 “그를 둘러싼 사회가 그에게 적대적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3) 사르코지도 “환자 본인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치료도 행해져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환자의 동의는 분명한 의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머리가 돈 2급 시민들은 의식이 분명하지 않으니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환자들의 퇴원과 관련한 규정도 강화될 것이다. 환자를 퇴원시키려면 담당 의사와 간호사, 외부 정신과 전문의 3명의 소견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역할은 소견을 밝히는 것에서 끝난다. 최종 결정은 행정 담당자가 내린다. 그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게 사르코지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에 앞서 안전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는 의견을 제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병원 밖에서는 행정자치단체장이, 병원 안에서는 병원장(경영자)이 ‘사장’처럼 ‘최종 결정’을 내리게 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경영자’들은 정신질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들의 역할은 병원을 관리하고 병원 내 안전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어떻게든 예산을 절약할 방법을 궁리하고 불합리한 평가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사르코지는 내무부 장관 시절에 이미 제안했던 계획을 다시 들고 나왔다.(4) 국가 차원에서 강제 입원 환자 명단을 만들어 관리하자는 것이다.
정부에 대한 의학계의 분노
사르코지의 발언에 정신병원 종사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그중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안전의 밤’이라는 제목의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2월 7일, 파리 근교 몽트뢰유에서 열린 한 집회에는 2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가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앙토니 병원에서의 사르코지의 발언은 마른 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이 아니다. 이미 25년 전부터 꾸준히 추진돼온 프로세스가 갑자기 제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이 프로세스를 이해하려면 2차 대전 종전 후 프랑스의 정신의학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2차 대전 중에 레지스탕스 운동 내부에서 정신병 환자 강제 수감- 때로는 평생 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에 반대하는 ‘탈정신병운동’이 발전했다. 이런 경향은 이미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 제기된 문제의식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광기의 인간성’(5)을 탐구한 프랑스 정신의학의 아버지 필리프 피넬이 있었다. 정신병 환자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이 자신의 모습대로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사람들에게는 ‘미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자 수용소의 벽을 허무는 것만으로 그런 생각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광기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고 환자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될 수도 있다. 실제로 오늘날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이들을 ‘공동체’ 속에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온 지역별·기관별 심리치료사들은 새로운 정신의학을 창조했다.(6) 정신과 의사들은 더 이상 ‘의료종사자’(7)가 아니라 환자가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전문 상담사’(8)들로 재정의된다. 이런 정신의학 혁명에 참여한 정신과 의사 뤼시앙 보나페는 “일반인도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으며, 우리는 그 잠재력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누구든 환자를 보살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정신병 환자들도 다른 환자를 돌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병원이 가지는 중심적 역할을 해체시킴과 동시에 ‘치료의 연속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다시 말해 치료팀이 병원 안팎에서 환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평생 동안 환자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관계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조직돼야 한다. 이 운동의 주창자 중 한 사람인 장 에임은 “각 지역에 공립학교가 있듯이 지역별로 사회·의료팀을 두어야 한다”(10)고 주장한다.
환자를 인간 주체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이 새로운 정신의학이 나날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끊임없이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해 개선점을 찾아내야 하겠지만 말이다. 현재 정신의학이 맞고 있는 ‘위기’는 이런 개념의 정신의학이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니콜라 사르코지는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 새로운 개념의 정신의학을 추방하고 싶어한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우선,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광기는 가능한 한 적은 비용을 들여 통제·관리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것이 사르코지가 제안한 정책들이 뜻하는 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신질환자들에게 투입되는 비용은 불필요한 인간들에게 투자되는 불필요한 비용이 된다. 온갖 평가(11)나 증명들을 요구하고 성과에 비례해 재정 지원을 하는 등의 정책을 강요하는 것에 의료종사자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신병원 시스템이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정신적 고통이 그것이다. 가령 정신과 의사들은 우울증에 빠진 주부나 자살 위험에 직면한 기업 간부들도 진료해야 한다. 그러러면 정신과 의사들은 광기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오늘날 광기는 부정된다. 이제 정신질환자는 평범한 신경증 환자들과 똑같이 취급된다.
돈으로만 환산되는 치료
우리는 지금 차가운 타산적 이성의 승리를 목도하고 있다. 철학자들의 이성이 아니라 회계사들과 기술 관료들의 이성이다. 광인은 사회와 진정한 관계를 누릴 자격이 있는 특이한 주체가 아니라 뇌질환 환자로서 뇌를 ‘스캔’하고 유전적 형질을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문제 있는 행동을 일삼고 비정상적인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로서, 가능하면 빨리 정상인으로 되돌려져야 할 존재로 간주된다. 주류 ‘생체정신의학’의 이런 ‘과학적’ 시각은 정신질환자들의 소외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그들의 관점으로 보면 정신질환자에게 들어가는 돈은 순수한 의미의 손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젠가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때까지 약으로 광기를 억누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제약산업에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행동치료요법도 다시 인기를 끌게 될 것이다.
광기는 이제 이 세계 속에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러나 광기는 우리에게 삶이 숫자나 그래프로 요약될 수 없다는 것, 사람들 간의 관계가 계약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광기는 불가피하게 ‘경제적 인간’이나 ‘시장형 인간’으로 정의되는 개인의 개념에 대항한다. 이 개념으로 정의된 인간은 소비자이자 생산자로서 불확실한 환경에 적응할 줄 알며, 인간관계보다는 삶의 은밀한 부분까지 침투한 ‘거래’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프랑수아 토스켈은 말했다. “광기의 인간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12)
글·파트리크 쿠프슈 Patrick Coupechoux
저서로 <광인들의 세계: 우리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질환자들을 학대하는가>(2006), <피억압자의 우울증: 프랑스인들의 정신적 고통에 대한 연구>(2009)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범죄학 교수 장루이 스농은 살인범의 2~5%, 성범죄자의 1~4%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정신질환자들이 크고 작은 범죄의 희생자가 될 확률은 일반인에 비해 17배나 높다(2008년 1월 16일, 안전구금에 관한 법률안 상원 공청회에서 한 발언).
(2) 2008년 11월 12일, 뤽 뫼니에(26·학생)가 이제르의 생테그레브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정신질환자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3) ‘안전의 밤’ 운동의 일환으로 보낸 공개 편지. www.collectifpsychiatrie.fr.
(4) ‘광기마저 순수성을 잃어버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7월호 참조.
(5) 피넬은 광인들이 부분적 이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이성에 접근함으로써 치료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6) 레지스탕스 내부에서 ‘탈정신병운동’의 두 조류가 탄생했다. 프랑수아 토스켈로 대표되는 첫 번째 조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제도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조류를 대표하는 뤼시앙 보나페는 지역별·분야별로 정신과 치료를 위한 조직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7)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Gallimard, Paris, 1976.
(8) 뤼시앙 보나페, <소외로부터의 해방: 광기와 사회>, Presses universitaires du Mirail, Toulouse, 1991 중, ‘정신과 의사의 역할’ 참조.
(9) <Recherches>, 17호, 1975.
(10) <Chronique de la psychiartrie publique>, Erès, Paris, 1995.
(11) “미소(항공기 승무원의 미소가 아니다)는 정신병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미소가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쿠르슈베르니의 라보르드 클리닉의 창립자 장 우리가 한 말이다.
(12) <광기 속에서의 종말 체험>, éditions de l‘Arefppi, Toulouse,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