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라는 낯선 경계 - 코리안 뉴 웨이브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국가, 섹슈얼리티, 번역, 영화
김선아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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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몇 가지 일련의 정치경제학적인 변화를 제 프레임에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아전과는 다른 재현의 정치학을 구사한다.정치적인 변화로는 물론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 노태우 정권(1988~1993)을 마지막으로 한 군부독재시대의 종말, 새로운 문민정부의 탄생, IMF 국제구제금융 지원, 그러나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분단이 그것이다. 한편 이러한 국민국가의 정치적 변화는 본격적인 소비 사회로의 진입,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전지구화라는 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이러한 현실은 영화에 직접적이며 바로 반영되는 게 아니라 영화 프레임이라는 경계 혹은 틈 사이로 새어들어 온다. 1996년에 더 낭가서 1990년대 이후 한국 극영화에서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군부 독재 시대가 마감하는 그곳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군부 독재라는 억압의 사슬이자 악의 축과 그에 대한 저항과 피억압이 바로 한국영화의 리얼리즘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군부 독재 정권 같은 국가 권력의 어떤 통합적인 이미지가 사라졌을 경우 리얼리즘의 미학적 변화는 대체된다.-서문 6쪽

한국영화가 동시다발적인 욕망과 힘들로 인해서 헤게모니의 장이 된 것은 1990년대에 일어난 이러한 정치경제학적 변화와 맞물려 있다. 동시다발적인 욕망은 크게 현실 역사를 프레임으로 끌어들인 영화와, 현실이 스며들 틈 없이 완고하게 제 장르를 구축해 가는 장르 영화로 나뉘게 된다. 이로서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는 두 가지 길에 나선다. 한 갈래는 군부독재 정권이 사라지면서 발생한 당대의 텅 빈 재현의 공백을 외상으로서의 한국역사에 대한 재현으로 메우는 길이다. 다른 한 갈래는 소비 자본주의화에 따른 여가의 장이자 오락 산업으로 '방화'라는 오염된 용어를 벗어나서 한국영화를 쇄신하려 했다. 이처럼 한국 영화가 끊임없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다는 건 거의 시대적 요구였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영화의 새로운 정체성은 결국 1996년을 전후로 해서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로 갈라진다.-서문 7쪽

일반적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는 황금기로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영화는 암흑기로 기술된다. 영화는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을 거치면서 국가의 억압에 자유롭지 못했으며 이는 검열 제도라는 엄연한 현실에 영화인들이 무릎을 꿇어야 했다는 걸 보여준다.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호명은 단순한 상상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군대나 감옥 등 억압적 국가장치가 동원된 물리적이며 강압적인 것이었기에 그 시대에(상상의,표현의)자유란 이미 한계가 내재해 있는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 한국영화는 유신헌법을 거치면서 점점 더 지쳐갔으며 본격적인 소비사회로의 진입과 비디오 시장의 활황 등으로 새롭게 열린 이데올로기의 빈틈은 에로 영화 장르 등이 메우게 된다. -서문 8쪽

코리안 뉴 웨이브 영화는 1980년에서 1995년까지 한국영화를 말한다. 코리안 뉴 웨이브는 한국 영화 역사를 기술할 때 1980년을 서사, 스타일, 주제 등에서 근본적인 변형이 일어난 시기로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 영화의 변형을 '리얼리즘의 부활'이라고 명명한다.'코리안 뉴 웨이브 담론'은 크게 세 가지의 불연속적인 배치로(2)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80년대 민중민족문화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사회적 현실을 담은' 리얼리즘 영화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1980년대 중반에 상업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신인 감독들의 영화를 '코리안 뉴 웨이브'라는 범주로 연결짓고 있는 것이며, 셋째는 '코리안 뉴 웨이브'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코리안', 즉 한국적인 것 혹은 한국적 이미지에 대한 제 정의로 이루어져 있다.-2쪽

다시 말해서 민족영화는 영화를 만드는 국가나 감독의 국적 문제가 아니라 민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를 말한다. 그리고 이 민족을 만드는 데에는 영화 뿐 아니라 그 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 제도들, 집단들, 개인들 모두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민족영화를 사고한다면 민족의 현실이나 역사를 다룬 영화가 자동적으로 민족영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민족영화라는 것은 그것을 민족영화라고 명명하는 행위자가 필요하며 민족영화로 수립하기 위한 제반 제도와 집단적인 수행의 주체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3쪽

앨리슨 랜드버그는 영화, 텔레비전, 박물관 등에서 재현되는 이러한 전례없이 새로운 공적 기억의 형식을 '보철의 기억PROSTHETIC MEMORY'라고 명명한다. 랜드버그는 이 보철의 기억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서 설명한다. 첫째, 보철의 기억은 개인의 산 경험의 산물이 아니며, 자연적이지 않은, 매개된 재현과 연루해 있다. 이는 영화를 보거나, 박물관을 방문하고 텔레비전을 보는 경험으로 기억이 이식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보철적 기억은 감각적인, 육체에 쓰여 지는 기억을 말한다. 이는 마치 베르그송의 물질적 흔적으로 육체에 남은 기억과 같다. 랜드버그는 베르그송을 인용하는데, 베르그송에 의하면 기억은 (현재에)저장된 육체적 행동과 같다. 즉 과거의 어떤 자극에 의해 행동했던현재에 남아있는 물리적 흔적이다. 따라서 순수 기(17)억이나 비물질적 기억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갖고 있을 수 없게 된다. 결국 베르그송을 따르자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감각적인 경험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일 수 있는 일종의 기억하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보철이라는 것은 상호 교환가능성과 변환 가능성을 갖고 있다-17~18쪽

랜드버그는 주로 상품 형식을 띤 기억의 이식이 이에 포함된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보철의 기억'이라는 새로운 기억의 테크놀로지가 이전 시대의 사회적 통합과 집단적 정체성을 위한 사회적 기억의 틀, 즉 가족 종교 사회 계급 등을 벗어나서 타자성과 타자를 인식하고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사람들에게 부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기억의 테크놀로지는 대중문화 시대에 어떤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특정한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에게 기억과 정체성을 주입하고 구성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기억의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개인에게 이식된 기억은 더 이상 자기자신의 기억이 아니다.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유산이 아닌 감각적으로 스며든 이 기억을 영화를 통해서 획득하면서 비로소 관객들은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18쪽

시간 여행이나 현재를 이탈한 시간에 대한 강박적인 귀환은 서구의 기술적 근대화를 따라 잡기 위해서 혹은 그 내성화된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영화 테크놀로지를 도구화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 여행'이라는 <박하사탕>과 '2004년 한국 영화'라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이제 한국 민족영화가 역전된 방향,즉 실패한 민족주의의 역사를 다루는 방향에서 역사를 상품화하고 이미지로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소비 자본주의와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본격적인 상품으로 등장, 가속화되고 있는 영화의 장르화와 상품화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가속화되는 장르화 및 상품화가 실패한 민족 내부의 역사를 망각하는 기억의 테크놀로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실패한 민족의 역사를 기억해 내는 데에서 망각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 혹은 애도가 승리로 바뀌어서 그 민족의 역사가 점점 더 상품화되어 이미지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과정이 바로 당대의 시간 여행 영화가 역사를 대면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역사는 테크놀로지를 매개로 구축된다. -59쪽

이미지와 스펙터클을 위한 영화 테크놀로지의 구축은 민족의 실패한 과거를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애도하는 과정을 거친다. 즉 영원히 따라 잡을 수 없는 근대의 게임에서 상실한 민족이라는 대상-원인에 고착되어 있었던 강박을 테크놀로지로 전이함으로써 근대를 성취할 수 있고, '자기 민족 되기'와 '근대 민족 되기'가 비로소 화해하는 것이다.이렇듯이 비서구 국가, 특히 피식민지의 역사를 지닌 비서구 국가가 시달리고 있는 주체적인 '자기 민족 되기'와 서구의 '근대 민족 되기'간의 분열은 비서구 국가-민족의 근대성과 근대화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59쪽

비서구 국가-민족은 제국주의 시기, 정확하게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이후 근대화, 즉 테크놀로지와 산업의 발전을 통해서 서구를 따라 잡으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기술적으로 열등한 국민국가가 앞선 기술을 지닌 국가와 경쟁하고 싸우기 위해서 기술적 근대화는 필수적인 대항 수단인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의 등장과 맞물려 있는 시간 여행 영화들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비서구 국가의 테크놀로지의 근대화를 통한 근대의 극복을 논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그 잠재적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서구 국가인 한국에서 테크놀로지 발전은 영화 문화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즉 영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근대의 극복인 것이다. 이러한 테크놀로지와 문화가 절합되는 과정에서 한국이라는 민족 정체성은 새롭게 확립된다.-60쪽

가혹했던 근대의 역사는 이제 기술적 근대화를 통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처분 가능한' 상품이 된다. (61) 이미지를 통해서 역사를 재현하는 민족 스펙터클인 영화인 이 영화(<태극기 휘날리며>)는 서구의 내성화 도구로 테크놀로지를 사용, 새로운 테크노-민족주의를 구축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과거로 민족의 시간을 매끈하게 봉합한다. 테크놀로지는 공유된 과거 자체를 가까이 보고 그것을 스펙타클한 이미지로 재현함으로써 민족주의적 욕망-비로소 민족의 과거를 스펙터클로 재생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을 만족시킨다. 그러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과거, 모순 없는 민족의 과거, 현재에 복속될 수 있는 과거가 이제 우리 눈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61 /68쪽

"주체 없는 재현의 공간은 없으며 공간 없는 주체도 없다. 따라서 경계 없는 주체도 없다." - 빅터 버긴 -75쪽

<이중간첩>은 북한 간첩들의 간첩 활동, 간첩간의 멜로드라마적 감정 등을 다룬 영화이다. 이 영화의 흥행 실패로 알 수 있는 것은 남한 관객-국민이 보고 듣길 원하는 것은 실제의 북한 혹은 북한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한 관객은 바로 남한이 어떠한 역사적 변화도 없이 언제나 억압당해 있는 북한을 개발시키고 진화할 수 있다는, 남한의 식민지 판타지를 유지시켜주는 영화를 보길 원하는 것-105쪽

여기에서 한국성은 임권택 감독의 여백의 공간과 자주 사용되는 테크닉 자체로 정의된다. 그의 영화 공간 자체는 한국이라는 민족성과 투명한 상호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형식주의의 토대의 내용은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성을 구축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는 서양세계의 반대쪽에 무언가 소박하고 청순한, 아직 오염되지 않은 민족적 원재료가 있다는 식의 관점을 지닌 서구의 자유주의적 동양주의자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132쪽

시네필리아의 한국어인 영화광은 폴 윌레먼의 개념으로, 죽었지만 과거의 기억속에는 살아있는 어떤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영어 명명법으로 굳이 '필리아'라는 병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시체애호증인 네크로필리아necrophillia의 과거 지향적 속성을 시네필리아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윌레먼은 이 개념을 역사화 할 때 중재 중인 사회 mediatic society, 즉 문화에서 어떤 모호한 것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각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시기에 바로 이 관객 주체성이 형성된다는 것을 발견한다.-138쪽

영화광의 시선은 미래 지향적인 영화의 존재론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영화광은 시네필리아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듯이 사진의 속성을 영화에서 발견하면서 어떤 특정 순간, 몸짓, 세부 묘사 등을 페티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전지구적 시각 경제의 자장으로 이월해 보면 권력과 자본이 깊숙이 개입해 있는 이 경제에서 오늘날 서구의 영화광은 지표적인 사진 이미지의 시대와 디지털 전자 이미지 시대라는 가상현실의 시뮬라크라 세계가 부딪치는 중재 혹은 혼성의 시대에 제 관객성을 드러낸다. 비서구의 영화들이 동시대 서구 영화(제) 시장 경제에서 교환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물리적 현실을 넘어서는 디지털 전자 이미지에 대한 영화 매체의 존재론 자체의 불안을 해소시켜준다는 데에 있다. 즉 이 영화들은 디지털 시대에 사진적 리얼리즘을 부활 혹은 갱신하여 영화 매체의 존재론을 다시 증명해 냄으로써 서구 정보 기술 자본주의 시대의 포스트 모던 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물질적 세계에 대한 포기를 회귀로 전환시킨다. -139쪽

서구의 시각적 욕망, 즉 기본적으로 '포르노그래피적' 욕망인 동시에 식민주의적 욕망은 디지털의 전자 이미지 시대를 맞이하여 영화 매체를 향수적으로 복원시키려는 비서구의 영화를 수용하면서 채워진다. 또한 거꾸로 비서구 영화를 대면하면서 서구의 두 가지 욕망은 형성되고 의미가 구성되는 것이다.-140쪽

김기덕 영화에서 몸은 디지털 시대의 과잉 산업화와 기계화와는 구분되는 제삼 세계 지역을 지시하는 메타포와 같다. 즉 기계 혹은 사이보그와 같은 탈인간의 형상이 보편적인 전지구화의 상징이라면 인간의 몸은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역할을 한다. 몸이 갖고 있는 물질로서의 자연은 언어를 비롯한 인공적 문명과 대립하면서 동시대 남한의 현실에 침윤해 있다. -142쪽

결론적으로 오늘날 한국영화에서 '작가' 영화라고 불리며 '세계 영화'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한국 영화 감독의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서로 연동된 위상을 점하고 있다. 하나는 영화 매체의 존재론적인 면에서 이들 영화는 지표의 위상을, 다른 하나는 영화 재현의 영역인데 이 부분에서 이들 작가 영화는 동물적이며 육체가 전경화된 폭력의 자리에 한국을 놓으면서 지역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도 추앙받고 있는 이들 작가 영화들이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더들리 앤드류가 말하고 있는 영화의 변증법, 즉 '뿌리를 둔 세계주의' 혹은 '비판적 지역주의'를 보여주고 있는 걸까.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결국 트랜스 내셔널 시대의 한국영화의 (재생된)뿌리는 그 낡은- 지표적인- 영화화면 위에 펼쳐지는 남성들의 날 것의 폭력이 아닌가.-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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