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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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우리의 '회의'skepsis일진대, 정작 우리의 입김 속에서 흘러나오는 '체념의 음표'는 '회의의 긍정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우리 시대의 정치 철학이 강조하고 있는 '민주주의를 위한 회의'는 '교과서적 민주주의'가 주는 환영의 커튼을 찢어버리기 위함인데, 이 커튼은 도리어 '사유의 광합성'을 막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는 답이 없는 투쟁에 지쳐 있다고 말한다. 고로 이 시대의 '지식-권력자'들은 의사형태의 답을 유포하며, 사람들에게 '여기 답이 있으니~'라는 허언의 남발을 일삼는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무서운 비극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이 허언에 '속는다'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속는다'는 것이다. '알고도 속음'은 우리들의 지성이 '불가피하게' 공중에 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 '적재적소'의 지성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이 시대의 비극, 그리고 이 비극이 만들어내는 삶의 아련한 기운에 대해 때론 합심하고 때론 분열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알고도 속음'이라는 태도가 낳는 것은 삶이란 오선지위에 그려진 '체념의 음표들'이다. 이 음표들이 만드는 것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우리의 신체는 '생명의 오선'에 걸쳐 있다는 비극이다. 고로 우리의 감각은 그 오선 위에서 전시되고 소비되며, 이 비극은 전시됨으로써 버려질 운명에 처해진다. 왜 우리는 '버려질 운명'인가. 우리는 그 운명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아감벤의 저서를 통해 고민하고 싶은 주제이다.  

문화연구가 그토록 강조해왔던 '차이의 정치학'은 우리 시대의 '저항의 연골'을 닳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비단 문화연구가 갖고 있는 쾌락의 가능성, 쾌락의 능동성이 주는 잠재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러한 '쾌락'을 긍정하면서 발생한 보다 넓어진 '저항의 외연'속에서 문화연구는 고도소비사회의 비극을 '양심적인 형태'로 외면해왔다. '양심적인 형태'란 무엇인가. 이는 문화연구가 고도소비사회의 비극은 마냥 지나쳤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현대사회를 짚어가는 중점 속에서 나타났던 '배제의 지점'들 혹은 '차등의 지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그 지점들은 알고는 있었으나, '접합'이나, '맥락'이라는 이름으로 그 지점들이 주는 '정치적 고민들'을 정치학과 사회학에서 해야 할 것으로 간주해버린 것이다. 결국, 지금 현재의 '문화연구'가 (특히 한국의 문화연구가) '가시적인' 비가시적 존재(열심히 아둥바둥거리지만, 전혀 영향력없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처럼)가 된 것은, 무엇이 정치이며, 무엇이 권력이며, 무엇이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이론적인 회의 대신, 그 회의의 '단물'을 문화연구를 하는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언론학의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차용해온 데 있다. 아감벤의 사유를 통해 발생하는 문제들, 특히 우리 시대의 정치를 사유하는 아감벤의 언어- 공간에서, 나오는 '기본의 언어들', '핵심의 언어들'을 임마누엘 월레스틴이 [지식의 불확실성]에서 희망의 어조로 전망했던 문화연구는 왜 검토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토록 '사람'을 중심으로 놓는다는 문화연구의 '기만'에 있다. 문화연구의 '기만적인 태도'가 아감벤의 사유에서 경청해야 할 것은 이 '늑대같은 도시'에서 그 도시를 수놓는 인간 군상의 분열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분열을 조장하는 '권력의 장치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장치들, 특히 아감벤이 의식하고 있는 푸코의 장치들은 "우리가 삶을 살도록 하는 상태'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생명'이 인구라는 '실험실의 언어'에 복속되어 가고 있을 때, 철학이 주는 각성이 침투해야 할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존재들에 대한 시비를 넘어 선, 우리를 보다 안전하게 만드는 존재들에 대한 불만이다.  

이 장치를 가진 권력자들, 그리고 그 권력자들이 배제와 포함의 형태로서 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는시간.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끊임없는 '회의' 대신, 지속적인 '회개'의 시간을 요구받고 있다. 국가는 우리에게 '의사-희망'을 주면서, 그 희망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희망을 '성취'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희망'의 성취가 정작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희망을 둘러싼 인간들의 오류를 전시하려는 시선의 과잉이다. 고로 나는 아감벤이 말하는 '예외상태'에서 법을 넘어선, 그 '초법의 상태'가 강조하는 것은 권력자가 가진 '강권함'을 유지하는 건, 권력자에게 '초법의 상태'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전개되는 '오류들의 고백'으로 채워진 이 시대가 강요하는 회개의 남발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죄-사함'을 떠올리지만, 오늘날 회개의 기능은 그것에 있지 않다. 아니, 그 예전 중세 시대에서도 '죄-사함'이란 개인의 죄를 전시함으로써 그 권력의 위상을 부여받았던 '종교-권력'이 아니었던가. 고로 회개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늘어나는 것은 '거짓 성찰의 난무'이며, 이러한 난무는 성찰을 위한 성찰로 멈춰버린다. 성찰을 위한 성찰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오히려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의례일 뿐이다.  

아감벤의 사유에서 무서운 것은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 자체를 우리가 인식하는 데서 온 이 시대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충격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포함하는 배제, 배제하는 포함이란 관계 속에서 그냥 '살게 내버려 둔' 그 자체에 대해, '알고도 속는' 상태로 우리 스스로를 방치해 둘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리라.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스스로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이 정치적 사유 공간을 '내버려둠의 상태'로 놓아두려는 소극적 인식이다. 결국 이것은 무엇인가. 일찍이 푸코가 우려했던 지식과 권력의 결합이다. 이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이 이미 사회 현상에 적용되면서 시작된 무책임한 '적용의 현상'들이 도리어 '벌거벗은 생명'의 '내버려둠'을 조장하고 있지는 않은가.이는 비단 그러한 적용의 불가능성을 묻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문제는 이 수용소 같은 풍경 속에서, 조에와 비오스의 구별이 불가능해진 '생명정치의 장'인 국가 속에서, 우리가 시도해야 할 작업은 호모 사케르의 서문이지 않을까. 즉  나는 '벌거벗은 생명'이란 개념을 알았다고 만족하는 데서 그칠 우리 지식 사회의 위험천만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진부하지만- 당연한' 우리 시대의 모든 '안정된 존재'들을 회의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회의'가 가능할 때, 우리가 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맞서야 할 것은 바로 '파문'이다. 우리 시대의 미디어들이 예전부터 권력과 결탁하여 무방비로 쏟아내고 있는 단어인 '파문'은 정치적인 단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탈정치적인 언어이다. 사람들은 파문이라는 단어를 통해 '일회적 관심' 혹은 '새로운 비극이 더 나타나 더 새로운 자극이 되길 희망하는 자세'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문'이라는 이 탈정치적인 언어의 자극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 '파문'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관습적인 '해결책으로서 제시된 비평의 언어'가 아니다. 조금은 힘이 들고, 조금은 희미하더라도, 아감벤이 주문하고 있는 것은 유아기에서 나오는 그 '순수 언어'의 가능성. 이 사회의 언어에 물들지 않고, 그 고유성을 확보할 수 있는 언어의 탄생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언어의 탄생을 위해서 또 얼마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세속성'을 탓할련지. 하지만, 우리에게 이러한 탓함이 '체념의 음표'라는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결코 철학을 포기할 수 없다. 고로 이 포기될 수 없는 철학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외쳐야 할 목소리는 '파문에 반대한다!'이다. 우리의 생명에 늘 위기와 불안이라는 '관리적 시선'을 안겨다주는 이 사회, 이 국가, 이 체제는 '드라마틱하게도' 우리 사회가 늘 파문 상태에 있기를 바라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파문의 절정은 오늘날 소외되고 있지만, 그러한 소외로 인해 사회의 '불가피한' 내부에 있다고 인식되는 인간들의 모습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리라. '파문'이 갖는 감각적 기능은 이런 '전시의 상태'에 있다. 우리의 감각이 철학을 통해 다시 항전의 상태를 갖춰야 함은, 바로 이 감각의 '무감각'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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