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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발칙한 한국학
J. 스콧 버거슨 외 지음 / 은행나무 / 2009년 10월
평점 :
'무례한', '불온한'과 같은 제목이 남발되는 시대에, '발칙한'이라는 수사가 사뭇 의심되긴 하지만 스콧 버거슨의 본 책은 '의심'대신 '안심'을 해도 된다고 본다. 그러나, '안심'이란 단어가 자칫 이 책의 저자들인 버거슨과 그의 친구들이 내놓은 성실한 '한국 독해'를 일종의 '재미주의'로 판단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안심'대신 '수심'[愁心]이란 단어를 꺼내야 할 듯하다. 한국을 바라보는 외국인들의 책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한 지금, 나는 우리와 그들이란 시선의 구분을 고민하는 외국인들의 '한국 비판'을 '흥미로운 출판 기획'으로서의 일부가 아닌,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느낀다.
미래의 한비야를 꿈꾸며, '자신만의 여행서'를 꿈꾸는 이들, 여행의 자유로움과 세계에 대한 넓다란 경험의 충족을 희망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국-밖'의 세계는 '나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장소로 인식되는 것 같다. 허나 '여행책 시장'이 형성된 가운데, 자신의 '체험거리'를 엄청나게 진열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의 권리와 윤리, 그것을 아우르는 사유는 사실 '한국-밖'의 세계를 두텁게 사유해보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다. '트렌드 세터'로서의 여행 리더들이 되고 싶은 욕망이 득실득실대면서, '세계를 경험한다는 것'의 가치는 이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구호인 '실용'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수잔 손탁이 [사진에 관하여]에서 남긴 명언처럼, '사진'을 찍는다는 것 하나로, 그 사진에 담긴 장소의 명성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으로, 그 세계를 다 이해한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손탁의 그 이야기가 언제나온 것인데 아직도 그럴까요?라는 질문을 쏙 들어가게 만든다.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사유한다는 것이 '방법으로서의 여행'에 국한된다면, 우리는 그 세계가 가진 갈등의 깊이를 매만질 수 없을 것이다. '방법으로서의 여행'이 강조되고 각광받는 요즘, 그러한 '방법론'은 세계에 대한 '신비화'를 조장하고, 자신이 고수하는 여행의 윤리를 합리화하는 데 일조할지 모른다. (고로 한비야와 그 아류들은 '윤리적 소비'의 한 측면에서 비평의 대상으로 충분히 올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세계 -경험'을 욕망하는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스콧 버거슨의 이 책은 한국을 독해하고 묘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도리어 '한국-밖의 세계'를 사유하는 데 갖고 있는 우리들의 특정한 오류를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한국-밖'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한 여행서 혹은 문화비평서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아이 러브 뉴욕' 같은 구호들을 조금 가려보려는 안일한 '문장의 노력'들과 이미지로 가득한 여행서들 속에서 우리는 때로 자신이 간 곳에 대한 '성실한 비판'을 토대로 그 곳을 한 번 부딪힐 만한 곳으로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오히려 이런 부딪힘의 시도는 '봉사와 헌신'이라는 상징성으로 '도와줄만한' 나라에 가서 '도와주겠다'는 어떤 윤리의 욕망을 비판하고 싶은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 윤리의 욕망은 다들 알다시피, 그 나라를 '구제'하겠다는 선의에도 피해자가 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여전히 이런 여행의 윤리는 어렵고 복잡한 게 사실이다)
한국에 오래 거주한 스콧 버거슨에게 물론 '여행자'라는 칭호를 붙이는 건 적절치 못할 게다. 하지만, 그의 책에서 강조되는 '엑스팻', 즉 한국에 온 외국인으로서, 그는 '한국 안'에 거주하지만, 언제나 '한국 밖'의 사람으로 인식되는 존재인 그와 그의 친구들은 '원치 않는 여행자'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엑스팻이라고 하는, 한국-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정작 그 '안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그들을 호명하는 존재들의 비평이 담겨진 본 책은. 한국민들이 대체로 관심을 가지지 않아 낯설어 하는 문제들을 끄집어 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 예로 북한의 문제는 이 책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분단'이라는 문제는 까놓고 말해서 젊은 세대들에게 관심이나 있는 문제인가. 스포츠 경기에나 신비롭게 비춰주며,미사일로 위협할 때나 선글라스를 낀 김정일과 그의 가족들 모습을 '상징으로 소비하며' 깔깔대는 차원에 머무르는 북한에 대해 우리는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는가.(오히려 한국사회는 북한을 상징적으로 소비하면서, 그들의 실체를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북한과 한국 사회의 갈등적 간극을 국가 자체에 내버려둔 채, 우리 사회는 그 국가의 정치 탓만으로 우리의 무관심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베라의 책도 그렇고 버거슨의 본 저서도 이런 부분들을 간,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원치 않는 여행자'인 엑스팻으로서 버거슨이 느낀 한국에 대한 당혹감은 마지막 장에 (나는 이를버거슨의 '촛불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잘 나타난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버거슨과 의견이 갈리지만, 버거슨은 촛불을 실패한 쿠데타라는 시선 아래, 그 쿠데타에 가려진 의미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나름 성실하게 수행한다. (이 장은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느낀다) '자유주의자'로서의 버거슨이 느끼는 촛불에 대한 염증은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측면이다. 무엇보다 그가 이명박에 대한 비판의 시선이 그 이전 김대중과 노무현을 향했던 비판의 시선을 망각시키고 있는 지점은 없는지, 왜 '촛불'의 시선이 그 이후의 중점 사안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지, '문제화'시킨 부분은 비평의 시선에서 이 역시 정독을 필요로 하는 대목이며 중요하다고 본다.
허나, 나는 이러한 정독을 통해, 버거슨의 '사실주의'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적' 시선에서 오는 난점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일례로 버거슨의 '촛불론'에서 조/중/동에 대한 역사적 맥락은 조금 결여되어 있다. 그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을 예로 들며, 촛불을 든 이들이 하나의 그릇된 신화로서 조/중/동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조/중/동을 향한 이들의 시선이 단지 '그릇된 신화'가 아닌 것은 한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조/중/동이 실제로 쌓아온 부정적인 '누적물'들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버거슨은 '시위대' 대 '전경'의 구도를 집중적으로 조망하는 데, 지난 2008년 촛불의 문제에서 '시위대'가 시민을 '촛불의 공간'으로 집어넣었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들은 촛불에 대한 시민들의 자발적 의지에 대한 독해를 그가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다만, '촛불'이라는 상징성 가운데, 그 상징을 꾸준히 유지하고, 더 발화하려 했던 시간 속에서, 시위대 혹은 시민들에게 나타났던 폭력의 장면들. 그 신화 안에 가려진 폭력성을 폭로하는 부분은 단순히 '조/중/동'의 시선, '이명박의 진영'이라는 편협한 '위치'의 견해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숙고해야 할 '성찰'의 한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버거슨이 '자유진보진영'이라고 묶은 언론과 언론인들의 자세 또한 감싸줄 것이 아니라, 충분히 비판받을 수 있는 것임 또한 이 책이 가진 좋은 시선이다)
한국을 두텁게 사유하는 노력 앞에서, 그 노력이 '한국을 즐기는 방법'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세계를 성실하게 인식하는 개인의 의지라면, 나는 이런 개인의 의지가 서점가에 빽빽하게 진열된 한국인들의 세계 여행서에도 표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책을 통한 한국 밖 세계 여행은 '류시화스럽고, '한비야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