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정말 오늘만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이, 몇 년 후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약간의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그 회의감이 보다 좋은 쪽으로 스며들면 좋으련만, 옹졸한 가슴은 계속 그늘의 발달에 솔깃한다. 제발 사라졌으면 하는 일들을 '변덕'이란 주머니 안에 넣어두면, 그 자체로 다시는 안 일어나겠지라는 안일함이 찾아오리라는 기대를 하건만, 인간의 변덕은 '변수'가 아니라, 결국 그 어떤 하나로 수렴되는 '상수' 가 아닌가라는 개똥철학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변하니깐, 변수가 아니라, 그 변하는 일 자체가 다시 그 변하는 일 자체로 똑같이 찾아왔을 때 찾아오는 모멸감이라고 할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일들은 정말 그 기약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내일에는 찾아오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 불확실한 잔인무도함은 불확실하기때문에 또 다른 변화된 미래의 시간으로 오기보다는, 오히려 언젠가 찾아올 고정된 '불확실함'으로 찾아온다. 그래서 변하는 것은 변하는 게 아니다. 지긋지긋한 원한의 굴레들, 분노의 홍수들, '대중'이란 이름과 '변덕'이란 이름, 그리고 그 사이에 '어쩔 수 없이'라는 체념의 언어를 집어넣을지라도, 사실 그 체념은 기대를 갓 포장한 것이었기에,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를 촉구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성을 쌓아갈수록, 그 지성이 주는 불확실함 때문에 주변 동료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그리고 당신들보다 부족한 나에게 찾아와서 길을 물으면, 나는 난감해지고, 또 난감해진다. 그 길을 물을 때마다, 이미 그 길을 가는 방법을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 이들의 '가면의 질문'을 눈치챌 때면, 인생이 시험같다는 진부한 표현은 어느새 내 등 뒤의 땀으로 바뀌어 있을 때가 많다. 어느새 뜨거워진 백팩, 그리고 겨드랑이에서 흐르는 머스크향 섞인 체취들, 사막을 걷는 듯한 기분을 주는 축축한 발가락.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다는 사람에게 찾아가,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알고 있음을 자랑하기 바쁘다. 그리고 그 분주함을 자기 존재의 당위로 삼으면서, 타인을 지성으로 짓밟으려 한다. 지성 자체에 대한 순수함을 가진 아이들은 마음을 다친 채로, 이 공간을 떠나 볼까라며 애써 쓴 웃음 짓는다. 그러나 안다. 그들의 힘 없는 웃음, 그 담백함 하나 없는 과장된 미소는 훈련된 희망이라는 것을, 그것은 오히려 티내는 절망보다 더 어두운 동굴 속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안다.
결국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희망은 없는 것일까. 인간의 덧 없는 삶 속에서 남는 것이란 결국 지속된 깨달음과 성숙 뿐이라는 부르크하르트의 말을 한 톨, 한 톨 그리면서,,이 밤을 접는다.지성이 나를 사랑할 때까지, 그리고 당신을 지성의 힘으로 사랑할 때까지, 그리고 그 지성을 뛰어넘는 격정의 언어로 당신을 어루만질 때까지. 그 성숙의 고통을 애무하면서, 한 걸음 내딛기. 그것이 역사의 상수라면 나는 받아들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