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대딸방'과 '술안주'로 전락한 문화연구>라는 제법 과격한 글을 준비중이다. 사실 곧 있을 어느 학술대회의 발표용으로 생각중인데, 그냥 내 '딸딸이'에 그칠 공산이 커 허무한 마음에 끄적거려본다. '문화연구'라는 말을 스무 살때부터 들었고, 곧 십 년을 바라본다. 그동안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나는 어느 교수의 말처럼 문화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데, 이 자체가 학문적 제도화로 나타난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소감에 동의한다. 그래서 문화연구자들은 늘 '정체성 찾기 게임'을 즐긴다. 한국의 문화연구는 이래야 한다 등, ~이다', '~한다' 놀이는 사실 문화연구자들의 진부한 논쟁 거리가 되어 왔다. 이것이 진부할 정도라는 말은 나의 자의적 판단일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나만의 냉소가 들어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학술 공간의 지적 다툼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인간'이 빠져있는 문화연구의 비극은 갈수록 커져만 갈 것 같다.  

사실 이건 비단 문화연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원이라는 공간 자체에 대한 내 경멸이기도 한 것 같다. 늘 내가 이 글들의 연속을 통해 주장하는 것이지만, 인간을 '이용과 충족'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명성 유지를 위해 삼키고 뱉어버리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선을 인식하는  윤리의 도달은 머나먼 이야기일수도. 무서운 것은 처음부터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대학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그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이 신물나는 것은, 결국 이들의 성찰이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문화연구'를 하는 사람들 간의 경계 유지에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술 영역 안에서 '업'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해야, 자신의 생존이 보장되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문화연구'는 내가 존경하는 어느 지인의 말처럼, '대기업의 소비자 마케팅 조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고로 문화연구자들은 갈수록 이런 지적에 괴로워하면서도, 다시 돌아온다. 그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은 '기계적 관행'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요즘 항상 이 문제로 분노해 있고, 갈수록 시민들과 멀어지는 문화연구를 이야기할 때, 불쌍하게 동석한 한 지인에게 이 분노를 배설한다. 그러면 지인은 말한다. "어이, 자네 학문 세계에 염증 생긴 것 아냐?" 나는 웃었다. "그런가?"라는 어색한 말 하나와 함께. 데이비드 로지의 <교수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등..잡히는 책들을 보면 지인의 지적도 맞는 것 같다. 왠지 부르디외의 '재귀사회학적' 정신을 구현하자는 나만의 선언 자체도 구차해 보인다. 나는 단지 대학원이라는 곳이 이렇게 폐쇄적인 줄은 몰랐다는 솔직한 심정에서 꾸준하게 이 곳의 비밀들을 말하려는 것 같다.  

나에게 지금 이곳은 이상한 감옥 같다. 대중들과 함께 뉴스를 보면서 시시각각 소식들을 접하는데도, 문화연구자들은 그 속에서 연구거리를 찾을 때, 논문으로 쓸 만한 것, 그렇지 않은 것이란 분류 체계를 작동시킨다. 그들의 문장은 유난히 호들갑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유난법석을 떠는 문화연구자들의 '오버'는 그들만의 경계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심리선 강화에 일조한다.  문화연구자들은 이제 '문화연구라는 제도 영역의 환영에서 벗어나 시민들과 연대해야 한다.(문화연대는 우리는 예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주장하겠지만, 나는 그것 이상의 노력을 말한다) 문화연구자들의 정체성 찾기 게임에서 나타나는 고뇌의 수준이 "왜 대중들에게 우리 문화연구는 힘이 없을까?"라는 '영향'의 차원으로 간다면, 문화연구자들간의 쟁투는 '그들만의 리그'가 될 것이다. 나 스스로 문화연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연구에게 던지는 문제적 화두는 '시민과의 연대', 지식인과 시민이 '평등한 자리'에서, 그 어떤 이론의 확정지음이 갖는 학술적 폭력의 횡행 없이 평등한 이성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결국 문화연구자들은내가 배운 윌리엄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내가 알고 있는 홀은 그러지 않았다로 귀결된 반복된 문장들을 읊고 말 것이다. 과연 문화연구자들은 시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혹시 그 노력을 학술대회에서, 혹은 제자들과의 술자리에서 받는 "교수님, 연구 테마 참 좋습니다. 어찌 그런 테마를 연구하시나요?"의 차원으로 즐기고 있지는 않은가.  

'무지한 스승'들의 '기계적 관행'만이 계속될 때, 문화연구와 시민은 갈수록 멀어질 것이다. 남은 것은 문화연구자들의 정액, 애액, 토사물, 쓰러져있는 소주병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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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09-12-0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