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화'.  내가 알기로는 이 단어는 표준어가 아니다. 그래서  작은따옴표를 붙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가 작은따옴표의 또 다른 효과, 바로 강조의 효과를 안다면, '뒷담화'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둘러싼 가장 흥미롭고 심각한 사회심리적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당신은 '뒷담화'를 한 번도 안 당해본적이 있는가? 다시 이 문장을 살펴보니, 내가 '당해본'이라는 표현을 썼다. '뒷담화'는 사실 우리가 늘상 쓸 때 연상하는, 반드시 부정적인 기운이 있는 것은 아닐수도 있다. '좋은 뒷담화'. 생각보다 가깝게 다가오지 않지만 있다고 연상은 해보자.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가 '뒷담화'라는 표현을 언급할 때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온갖 부정적인 모습들이다.  

당신은 네이버에 '뒷담화'라는 단어를 쳐본 적이 있는가. 생각보다 많은 질문들이 지식in에 올라와 있다. 그렇다면 '뒷담화'는 어떤 과정을 거치는가? 그것을 좀 '경험적'으로 기술해보면 다음과 같은 과정이 만들어질 것 같다. 일단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A의 얼굴이 안 좋다. B는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다. B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A는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인다. 그러다 입을 연다. A왈, " 이거 너한테만 말하는 거다..그  친구 있잖아..C 걔 되게 재수없지 않냐? 하는 헤어스타일이랑 옷도 그렇고,,학교에서 계속 추근대는 것 같아서 좀 그래." B왈, "너 C 보면 인사도 잘 하고, 잘 받아주더만.." A왈, "에이.야 어떻게 걔 면상에 대놓고 싫은 티 내냐." 너무 예를 간단하게 든 것 같지만, 약간의 양해를 부탁하며,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려 한다.  

일단 내가 보기에 '뒷담화'는 도시라는 공간과 그 공간을 주목하는 현대인의 시각성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구경꾼의 탄생>이라는 책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도시는 인간의 시각성과 늘 함께 해왔다. 그러한 시각성은 단순한 공간이 아닌, '구경거리'로서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책의 내용을 보면, 당시 19세기 말 파리는 인간의 시체를 보는 것도 하나의 인기있는 구경거리라고 하니, 인간의 시각성은 상당히 긴 역사적 흔적을 갖고 있는 개념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살아간다. 당신이 친구와 함께 신촌 현대백화점 주변을 거닐다가, 어깨를 부딪히기 싫어 이리저리 동선을 바꾸는 동안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주목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은 곧잘 평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야깃거리가 없으면 '찰나'가 가져다주는 얕은 혹은 깊은 인상들은 도마위에 오른다. 우리는 사실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아도 '뒷담화'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뒷담화'는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자기 검열의 과잉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인간의 이중성은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고 싶은 것과 누군가로부터 주목을 받고 싶지 않은 것의 긴장감을 매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요즘 대세는 '자기 검열'과 '과잉사회화'다. 누군가에게 혼이 날까봐, 누군가의 웃음 소재가 될까봐 사람들은 상당히 착하게 행동한다. 나는 사실 뉴스나 신문을 통해 매번 우리나라가 이제 이런 악행이 벌어지는 나라라고 흥분하다가도, 길거리를 나와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착하려고 애쓰는 사람들'도 제법 보인다는 것에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을 때, 그 주목을 받으려는 문화적 실천이 정작 자신만의 희열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며 사는 사람들이 성의있게 자신을 보여주었는데도 원하지 않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어찌되었든 불행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뒷담화'의 대상에 오르는 유형은 정치인과 연예인이다. 이들은 도시의 구경거리이자, 고로 도시에서 가장 많이 주목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자기 검열과 과잉사회화로 인하여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심리적 압박을 받을 때,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뒷담화'는 오늘날 말과 글의 과잉 속에서 '언어상품'의 대표성을 띈다. 텔레비전 토크쇼는 '뒷담화'의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는 미디어 프로그램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MBC 명랑히어로의 한 코너였던 <두 번 살다>라는 프로그램을 나는 상당히 인상적으로 봤다. 이 프로그램의 포맷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상의 장례식을 위해 가상적 죽음을 체험하고 싶은 연예인 한 명이 초대되고, 그 연예인이 원하는 분위기의 빈소가 마련된다. 그리고 '천상의 방'이라고 하는 곳에 MC와 함께 들어가, 자신을 찾아오는 조문객들의 반응을 모니터로 살핀다. 프로그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주인공 연예인을 조문하기 위해, 지인들이 찾아오고, 자리에 앉아 '가상적 고인'을 기리기 위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 상황에서 '뒷담화'는 비록 가상이지만 형성된다.  천상의 방에 들어가있는 주인공 연예인은 모니터를 보다가, 자신을 지나치게 험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사진을 열고, 경고 혹은 반박을 할 수 있다.  

'뒷담화'때문에 죽은 사람을 보았는가? 우리는 많은 연예인을 잃었다. '뒷담화'는 언어가 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젊은 날 고민이 많을 때 늘 써먹었던 인간관계 상의 그 '가면 놀이'라는 표현을 불가피하게 끌어온다. 삶은 연극무대라면서, 이 연극무대에 살아남기위해서는 우리는 더욱 좋은 연기를 펼쳐야 하며, 그 좋은 연기를 위해 뒷받침될 수 있는 가시적인 신체 기술을 사용한다. 마음은 씁쓸하지만, 더욱 상냥하게. 현대 사회학에서 가장 기발한 이론을 만든 학자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어빙 고프만은 일찍이 이러한 사회 현상을 예견했고, <자아 표현과 인상 관리> , <오명>이라는 책 등을 통해, 현대인의 자아가 표현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기술했다.  

'뒷담화'는 '비밀'과도 연관이 있다. 사실상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지키고 싶어 하지만,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비밀'이 아닐까. 소위 입이 싼 사람들이 많다. 이 현상을 두고 젠더적 관점을 언급하며, 여자들이 특히 심하다라고 확 선을 긋는 사람이 있지만, 남자인 내가 봐도 요즘 남자들의 '입의 가벼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투명인간의 심화'라고 스스로 지칭하고 싶다. 여기서 '투명인간'이란 으레 우리가 아는 '보이지 않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들어있는 모든 말을 해야 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우리 일상 속에서 생각보다 많다. 재미있는 예를 들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시 A와 B의 이야기를 끌어오자. 

A가 기분이 안 좋은 얼굴로 B가 있는 카페에 들어 왔다. B는 물어본다. "너 왜 그래..?" A는 망설이다가 말한다. "있잖아.예전에..아니다..너 이거 내가 말하기 전에 비밀 지켜줄 수 있지?" B는 고개를 끄덕인다. A는 B를 믿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면서, 그 사람은 내가 좋아한다는 걸 모르니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커피를 마신다. 며칠 후, B가 친구 C를 술집에서 만난다. C가 술을 마시다가 B에게 말한다. "야, 너 아냐? A 가 D 좋아한대.." B는 놀랜다. 그리고 말한다.     "어.. 야 근데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D는 말한다. "나? A가 말해주던데.."  요즘 비밀은 그렇게 비밀같지 않다. 언젠가 공개될 비밀. 봉인이 쉽게 풀리는 비밀. '뒷담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연예인들이 오늘날 수난을 당하는 이유도 '투명인간'을 강요하는 미디어를 비롯한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말 실수가 많은 것도 갈수록 자신을 드러내기를 강요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입이 달다. 너무 쓴 말을 많이 해서. 나도 방금 뒷담화를 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