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를 잡아라
마크 카츠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앎이란 때론 우리가 전혀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았던 존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마크 커츠의 『소리를 잡아라』또한, 앎의 이러한 속성을 체감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앎의 대상은 소리의 존재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저자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음성 매체들의 존재에 대한 경험적 기술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뤄진 이론적 도해의 풍경을 선보인다. ‘녹음의 사회문화사’라고 요약할 수 있는 본 책에서 저자는 기술의 사회적 구성(social construction of technology: SCOT)이라는 관점을 지지하며, 기술과 이용자 간의 상호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녹음이 단순히 소리를 담는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녹음은 소리를 담는 것을 뛰어 넘어, 소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하나의 예술적 산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포노그래프 효과’라고 소개된 저자의 독창적인 개념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축음기의 출현, 디스크와 예술가들의 생산 양식 변화, DJ 배틀이 가져다준 문화적 변혁, 디지털 샘플링 예술이 갖고 있는 정치와 윤리 , 사이버 공간에서의 음악 감상이 몰고 온 감각과 자본, 윤리의 문제를 관통하고 있다.

녹음을 통해 음악가들은 소리를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린 ‘담긴 소리’를 자유롭게 들으면서 거리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견해를 따르자면, 녹음을 통해 소리는 진정 ‘사물’이 된 것이다. 소리가 사물이 되는 순간, 소리에 반응하는 우리의 감각은 오늘날 우리의 감각과 윤리의 만남을 도모한다. 그것은 자본의 매개적 기능 때문이다. 물론 공연에서 직접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는 것은 감각 - 자본 - 윤리의 관계가 비교적 투명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입증하지만, 녹음을 통해 소리를 저장할 수 있게 된 현대 사회에서, mp3는 공개되어 있는 ‘어둠 시장’의 교환물로서 이는 곧 청각의 권리가 양심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 문제를 보다 심층적으로 논의한 것이 본 책의 8장 : 사이버 공간에서 음악 감상하기다.) 그러나, 자칫 이러한 갈등 구도를 진부하게 느낄 수 있는 현대 문화인들에게 이 책이 줄 수 있는 귀한 소리는, 축음기가 출현하면서 나타난 가정 내 생활 방식의 변화, 스트라빈스키를 비롯한 유명 음악가들이 레코드 길이에 맞춰 자신의 곡 분량을 정하고 작곡했던 이야기, 오늘날 대중음악 생산자들이 샘플링을 통해 이미 존재했던 과거의 ‘음- 조각’들을 변용, 접합하는 데서 부딪히는 윤리적 논란들일 것이다. 

 
녹음이 가능해진 것이 신기한 시대를 지나, 우리는 이러한 신기함이 아무렇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져 준 앎의 코스를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지금 내가 글을 쓰며 듣고 있는 권순헌 연주의 <슈만 : 어린이의 정경 중 트로이메라이>와 팻보이 슬림(Fatboy slim)의 <Praise you>를 어떻게 ‘연달아’ 들을 수 있었을까라는 ‘천진난만한(?) 감탄’을 할 수 있을 것 같다.1) (물론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이 감탄의 세기가 기립박수를 칠 정도는 아니다.^^ 암튼, 이 책이 던진 ‘녹음’이란 개념은 예술을 통해 묶인 우리들의 지식과 감성에 어떤 일깨움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책 제목 그대로 소리가 인간의 그물망 안에 들어옴으로써, 소리가 직조해내는 그물망의 색과 형태는 보다 다채로워 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채로움 속에서, 소리의 사물화가 건네는 변혁의 기운은 우리에게 또 다른 감성의 분할을 요청한다. 우린 이 요청에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이미 반응하고 있으며, 그 반응의 민감함을 보다 잘 인식하는 세계의 예술가들은 삶의 희로애락을 창조적으로 그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가 생각난다. 상우가 담고 있던 그 소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1) 녹음을 통해 이뤄진  ‘연달아 듣기’의 의미는 슈만과 팻보이 슬림의 노먼 쿡 사이에 생성된 생과 사의 경계를 포함한다. 즉, 슈만은 죽었고, 노먼 쿡은 살아 있다. 이는 국적의 경계도 포함한다. 슈만은 독일 사람이고, 노먼 쿡은 영국 사람이다. 녹음이 없었다고 가정할 때, 우리가 이러한 조건 아래, 음악을 연달아 듣기 위해 쏟을 원시적 노력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이 글은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http://www.aliceon.net/)에 기고한 제 원고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