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단턴의 문화사 읽기 역사도서관 교양 12
로버트 단턴 지음, 김지혜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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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때,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면서, 나는 줄곧 한 명의 학자를 떠올렸다. 로버트 단턴. 그는 우리 시대가 보존해줘야 할 학자임이 분명하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의 2009년 도서출판 예정목록을 보고 반가웠던 저자 중 하나였던 단턴의 책은 나에겐 반드시 구매하고 싶었던 저서 중 하나였다. 만약 당신이 책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책과 관련된 많은 연구 성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단턴의 이름은 기억해두는 것이 좋다. <고양이 대학살>의 성과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니콜라 콩테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희귀한 사연을 얻은 이상의 지적 보람을 얻었고, 그것은 단턴이 갖고 있는 책에 대한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매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단턴의 <문화사 읽기>는 사실 그가 새로 낸 책은 아니다. 그가 예전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 하나로 묶은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책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집중된 논의를 펼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늘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의 사회문화사를 중심으로 그것에 파생된 매체의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한 고찰, 또 그가 몸담고 있는 역사학 진영 내부의 증인으로서 기술된 역사학의 역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로 책의 목차는 더 자세히 분류되어 있다)

 

단턴의 본 책에 호감이 가는 이유는 그의 글쓰기에서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써내려간 문장은 진지함을 담보로 하고 있지만, 그 진지함을 부드럽게 풀어가려는 노력을 놓치지 않는 듯하다. (번역자의 노고도 있었음은 분명하다) 단턴은 이 책을 통해 세밀한 학자의 관점을 고수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역사학 내 이론의 진정성과 결부시킨다.  뉴욕타임즈에서 기자로 잠시 일할 당시, 그가 간파하고 있던 뉴스생산조직의 사회학적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이라면, 게이 터크만의 <메이킹 뉴스>와 함께 익혀두면 좋을 내용이다. 또 신문방송학 진영 안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최근 몇 년간 국내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좋은 성과들을 나타내고 있는 미디어조직의 생산자 연구를 참고할 때, 단턴의 설명은 연구주제의 확장을 위해 흥미로운 단서를 제공할 것이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신문방송학이란 전공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이 분과학문 자체가 그리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있는 친구들에겐 상당히 미안하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견고해질 것 같다. 나는 나중에 더욱 자세히 이 부분을 글을 통해 밝힐 계획이지만, 약간 내 견해를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신문방송학은 운명적으로 오늘날 학문 세계 안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고 있는 ‘융합적’성격의 학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중론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선배들이 이 사실을 알고 사회학을 향해, 철학을 향해, 심지어 관련이 전혀 없을 것 같은 문학을 향해 나아갔다. 왜 그럴까. 신문방송학이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표면적인 이유? 그것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 학문 자체에 대한 본원적 사유를 펼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나는 결핍이란 코드를 통해, 사회학을, 철학을, 그리고 현재 역사학을 손대고 있다. 나는 무엇보다 역사학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역사’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는 세대론적 질타의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 또한 있다는 점에서, 나는 로버트 단턴 같은 학자들을 롤 모델로 삼고 싶었다. 내가 속해 있는 분과학문의 한계를 어쩌면 ‘공간의 확장’을 위한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요즘 추세’라는, 어쩌면 상당히 ‘사후’적인, 중요한 현상이 와야, 그 현상을 실효적으로 분석하는 데 재미를 들인 이 신문방송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더욱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역사학과의 조우가 아닐까 싶다. - (이것은 리뷰어인 제가 
가진 생각입니다.)

 

 당신이 서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서점 곳곳에 진열된, 요즘 더 자주 눈에 띄는 역사 관련 서적들의 풍경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풍경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이 가진 ‘맥락’의 힘은 조금 보탬이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당신, 역사를 얼른 공부하시오!”같은 극성스러운 선교사적 멘트를 남발하지 않는다. 단턴은 자신이 아주 열정적인, 그리고 진지한 역사학자라는 것을 그 어떤 경력의 과시도, 그 어떤 학문적 성과의 자랑도 아닌, 자신이 맡고 있는 연구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 쏟아낸다. 그리고 그 애정의 재현엔 역사를 통해 알게 된 수많은 망자의 소중한 고백과 사연들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단턴의 이 고백은 참 멋있다.

“죽은 자를 방문하기 위해 역사가들에게는 방법론 이상의 어떤 것, 믿음의 도약이나 불신의 유예 같은 어떤 것이 필요하다. 다가올 삶에 관해 아무리 회의적이어도 우리는 사라진 모든 생명들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신비주의나 조상 숭배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죽은 자를 올바로 다룰 수 있을까? 내가 만약 단 한 번이라도 그 일을 제대로 했다는 자족감에 젖어 있었다면 뭔가 예기치 않은 일, 라무레트의 입맞춤 같은 어떤 것이 내 감각에 충격을 되돌려주었으면 한다.”

 

 


이 책은 역사학의 한 획을 그은, 한 역사가가 역사학의 내부자로서 내비친 증언이다. 이 증언은 이 책 한 권으로 인해 파생될 또 다른 책들을, 그리고 그 책에 담긴 테마들을 독자로 하여금 찾아보라고 설득하는 듯하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한 말처럼, 책은 여러 번 읽어야 그 속의 보물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책은 공부라는 것을 할 때 가까이 아껴보며 참고하고 싶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책이며, ‘글쓰기’에 대한 책이자, ‘글읽기’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그것이 시간을 경유하여 ‘역사’라는 개념으로 발전될 수 있음을, 단턴은 책을 통해 손수 보여주고 있다. ‘컨텍스트’와 ‘메타’라는 개념을 챙기고 간다면, 이 책에 깔린 가치를 더욱 생생히 접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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