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웃는 너의 얼굴이

오후의 햇살 속에 어슴푸레 사라지고

돌아서는 발길이 천만금 무겁구나

 

도로는 차들로 꽉 찼건만 왜 이리 휑한지

차창에 흩날리는 아내의 눈물 몇 방울

무거운 시간은 정지한 듯 아득한 귀갓길

 

식탁엔 먹다 남은 빵 한 조각

방금 일어난 듯 어질러진 이부자리엔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웃음소리

 

잘 갔다 오렴

아빠는 너를 믿는다

 

손꼽아 기다리마

씩씩한 남자로 만날 날을

 

사랑한다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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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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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성질은 머물기 즉 고집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보수적이다.

강해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하다는 진화론처럼 안전하다고 검증된 것만 최소한의 에너지로 움직이려 하는 생존 본능은 우리를 지금까지 살아남게 했지만 부작용으로 어지간하면 변하려 하지 않고 머물고자 하는 고집 센 보수의 기질을 갖게 된다.

 

편안한 게으름에 익숙한 인간이 이러한 생물학적 관성을 이기기는 참으로 어렵다.

당연히 이미 완성된 존재, 즉 더 이상 변할 것도, 발전할 것도 없는 현 상태를 최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세상은 고착화되고 보수적이며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습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들이다.

고집 센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어렵다. 시사 토론의 무한 동어반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주구장창 내 의견만 주장하다 끝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누군가를 설득하기 보다는 선동을 사용한다. 생각을 바꾸는

대신 기존 생각을 강화, 증폭시키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정치변화를 격렬하게 겪는 동안 정치적 역사적으로 왜곡된

가치관을 내면화한 사회에서는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대화와 토론 대신 오직 듣고 싶은 것만 강화󰋯증폭한 선동에만 반응하는 고집 센 수구세력만 득실거리는 암울한 정치 현실에서 보수정치가 태극기 부대를 필요할 때마다 국면전환용 전위대로 사용하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이유다.

 

자유를 독점한 보수

 

우리의 비극은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겼기에 빼앗긴 자유를 되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희한하게도 대한민국에서는 우익이 자유를 제일 먼저 선점하는 바람에 나머지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친일과 반민족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선점한 자유는 그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그들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이념과 주장의 근거가 되었고 심지어 반미와 민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도구로도 쓰였다.

 

보수세력이 늘 자유를 내세우고 보수단체 이름엔 항상 자유두 글자가 들어가곤 했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는 다른 의미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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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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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행합일(知行合一)

 

재미로 읽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양심에 따라 실천하는 삶에 대한 집요한 요구와 그렇지 살지 못했을 경우의 치열한 반성을 피하기가 마땅치 않다.

 

사람들에게 온갖 아는 체를 하며 떠들어 대도 마음 한편에 늘 자리 잡고 있는 불편한 진실, 너는 그렇게 살고 있는냐? 라는 질문은 한순간 입을 다물게 만든다.

 

그저 그런 인간으로 살면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결벽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는 과대망상은 삶에 치이며 사라진 지 오래다.

실천과 반성은 희미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양심 한 쪼가리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저 일신의 안위에 파묻혀 제 눈의 티끌 하나는 땅바닥을 구르며 아파하면서

남의 일은 얼마나 무관심했던가? 내로남불은 일상이었다.

 

행동하지 않는 선은 악의 편이다. 굳이 악의 평범성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단순히 적극적인 악을 행하지 않았다 해서 혼란한 세상에 대한 일말의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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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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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회의적 자아를 가지고 사회적 존재를 배반하지 않는 사유체계를 가진 자

 

대한의사협회에 소속된 의사가 모여 의료법 개정에 반대하면

이익단체의 집단의사표현이고

 

민주노총에 소속된 노동자가 노동조건개선이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집회를 하거나 파업을 하면 불법쟁의가 된다.

 

의사들의 집단시위는 거의 대부분 받아들여지기에 평화적인 시위가 되지만

노동자들의 노동활동은 거의 대부분 불법으로 탄압받기에 폭력이 동반되기 쉽다.

 

그 차이가 뭘까? 그건 집단의사표현과 불법쟁의를 판단하는 자가 지배계층이거나 그 이익에 봉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지배층이야 자기들의 이익에 충실하기 위해서니 그런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의사들의 이기적인 시위에는 잘해야 무관심한 반면에

 

정작 우리와 같은 계급인 노동자들이 하는 시위는 불온시하며 반감이나 불안감을 갖는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우리는 쉽게 판단한다. 우리 일임에도 남의 일처럼.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과 그에 따른 가치관은 결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받아왔던 수많은 교육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습득한 관습과 경험은 알고 보면 지배계급의 세계관인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소수의 지배계급이 정립한 가치관을 나도 모르게 내면화한 피지배자의 신분이 지금의 나인 것이다.

 

나의 자아를 의심하고 내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계속 그들의 하수인으로, AI처럼 살 것이다. 행복한 노예로 말이다.

 

나의 자유의지가 내 생각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회의적 자아를 가지고 사회적 존재를 배반하지 않는

사유체계를 가지는 노력이 있어야

즉  스스로 의심하고 내가 속한 계급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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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04-06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는 것이 더 속 편하지 않을까요? ^^

책을베고자는남자 2023-06-28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유의지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눈꼽만큼의 희망을 가지게 되네요. 결국 내 안의 자유의지를 찾는게 우리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삶의 의미이자 목표인 것 같습니다. 그게 가능한가는 별개지만요.
 
결 : 거칢에 대하여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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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똘레랑스’라는 말이 화제가 된 베스트셀러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2009년에 나왔으니 24년 만에 홍세화 선생님의 책을 읽었다. 내게 그는 리영희, 신영복 선생님과 비슷한 느낌을 갖게 하는 분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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