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최고의 명강의 10주년 기념판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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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끝이다. 그 뒤에 무엇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과학적으로 거론할 가치도 없는 영혼, 영생을

인간은 버리지 않으려 한다.

 

인간의 뇌는 이율배반적이고 모순투성이다.

이성적으로 아닌 걸 알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믿을 수 있는

독특한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동안 나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은 다음에 달라진 게 있던가?

남는 건 그저 슬픔이나 사라진 것에 대한 허무 같은 감정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영혼의 존재를

만들어 내고 믿으려 한다.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죽음 이후의 삶(?)을 논한다면 2가지다.

영생과 환생이다.

환생은 영혼은 지금 그대로의 나이지만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리셋되기에

결과적으로 나지만 내가 아니다.

윤회의 업을 해결하려는 과정으로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이라는 면에서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인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죽음의 극복이다.

비록 육체는 소멸했지만 내가 나임을 증명해줄 수는 있는

모든 기억이 담긴 영혼이 그대로 천국에 존재하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에 정확히 부합한다.

 

문제는 영생의 가능 여부인데 현재까지 존재한다는

객관적인 근거나 증거는 당연히 없다.

오직 성서의 하나님 말씀과 따르는 사람들의 깊은 신앙심이 전부다.

 

그래서 영혼 등 사후 세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나?

 

500페이지가 넘는 지루한 논리 전개 끝에

인간에게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나쁜 이유는 살면서 누리는 혜택을 더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영생보다 더 낫다 외 별다른 의미를 찾지 못했다.

 

철학은 죽음을 그저 생물학적 종말로 치부하며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죽음이 두려운 건 우리의 감정이지 이성이 아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죽음을 철학적으로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무거운 담론을 이성으로 정리하는 게 가능할까?

애초에 죽음이 너무 무서워서 결국 종교를 만든 게 인간이지 않은가?

영혼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따져서 없다고 한들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사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에 그 정체 모를 경험이 두려운 것이고

나라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무게에 무섭다는 것이다.

 

살아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더는 못하기에 두렵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서 무섭기도 하지만

내가 사라짐으로 나의 세계가 소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더 두려운 것일 수 있다.

기나긴 인생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담긴

허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없으니

죽음이라는 게 참 낯선 일이기도 하다.

공평하게도 이 세상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아쉽게도 그 누구도 진짜 죽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기에

죽음이란 내 옆의 누군가 죽는 간접적인 경험으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죽었을 땐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지만

정작 내가 죽었을 땐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 방법은 없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는 우리가 어떻게 그 느낌을 알겠는가?

다른 누군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죽음에 어떤 감정을 가질 뿐.

 

존재가 소멸하면 그 존재의 세계도 소멸한다.

나의 죽음은 내가 소유한 세계가 사라짐을 의미하지만

그걸 인지할 난 이미 사라졌으니 아무런 의미도 없다.

 

즉 죽음 이후는 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논리와 상관없이 살아 있는 내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사이에서

남은 삶과 죽음의 공포를 반비례로 느끼며 산다.

 

평범한 인간이 평균의 이성을 가지고 죽음을 극복하는 건

애초에 가당치도 않다.

극복은 고사하고 논하는 것도 불편하고 힘들다.

과연 누가 죽음을 직시할 수 있겠는가?

 

두렵고 불편하고 피하고 싶고 아니 그냥 생각도 하기 싫은데..

그래서 죽음은 그냥 묻어 놨다가 때가 되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그냥 잊어버리고 즐겁게 살다가 순서가 되면 가는 것.

죽을 때 고통스럽더라도 내 생애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다고 생각하고

꾹 참고 갈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한 대처방안이다

더는 전부 가식이고 거짓이라 생각된다.

 

난 죽음이 무섭다.

사는 게 행복하고 좋아서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고

죽기 전에 병들어서 고생하는 게 싫고

내가 차가운 시신으로 변한다는 게 어색하고 징그럽다.

 

오죽하면 죽은 자에 대해 삼일장, 천도제, 사십구재가 있고

이집트 사자의 서’, ‘티벳 사자의 서등 영혼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방법까지 적어 놓은 매뉴얼까지 있겠는가?

 

사실 영혼이 없다면 이미 죽은 자에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정작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남은 자를 위로하려는 게 진짜 속내가 아니겠는가?

 

결국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성찰의 동력으로 삼으며

앞서간 망자(亡者)로 인해 내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나를 추스르고

내 차례가 될 때까지 죽음에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내가 결론 내린 산자의 죽음에 대한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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