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에, 숲해설가소식지 봄호에 넣을 시를 고르느라 여러 시집을 뒤적이다가 이정록 시인의 <어머니학교>에 수록된 시 두 편을 골라 팀장님 메일로 보냈었다. 팀장님은 <어머니학교>를 훑어보고는 시 한 편을 더 골라서, 소식지에 넣을 시를 결정하지 못했다.

 

숲해설가 소식지라서 생태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 시를 선택하는 건 기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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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이니까 봄이 주는 이미지에 맞게 생동감이 살아 있고 희망적인 메시지면 좋겠다는 원칙엔 동의했지만, 딱 한 편의 시로 마음이 모아지지는 않았다. 본래 이 코너는 내가 맡은 거라 내 맘대로 정해도 되지만, 서로 의견이 갈리니까 결정하기가 어렵다. 이번 주까지 정해야 돼서 알라딘 이웃들의 생각은 어떤지 귀동냥하려고 선택된 시 세 편을 올려 본다.^^

 

<어머니 학교>는 시인의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을, 시인이 어머니에 빙의된 듯 단숨에 적어내려간 시편들이다. 시인의 어머니는 배움이 많지 않아도 터득한 인생 철학과 삶의 지혜는 그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도 깊이 있고 울림이 있다.

 

나이

(어머니학교 5)

 

 

나이 따질 때, 왜

 

만 몇 살이라는지 아냐?

 

누구나 어미 배 속에서 만 년씩 머물다 나오기 때문이여.

 

어린 싹이나 갓난 것 보면 나도 모르게 무릎이 접히지.

 

삼신할미 품에서 만 살씩 잡수히고 나온 분들이라 그런 겨.

 

그러니께 갓난 아기가 아니라, 갓난 할배 갓난 할매인 겨.

 

늙고 쭈그러져, 다음 우주 정거장이 가까워오면

 

아기들한테 턱수염 잡히고 지팡이 뺏겨도

 

합죽합죽 매화꽃이 피지. 봄은 말이다,

 

늙은이들 입가에서 시작되는 겨.

 

논틀밭틀 같은 주름골에서 터지는 겨.

 

 

 

부부

(어머니학교 37)

 

뿌리 잘린 나무를 옮겨 심고

버팀목을 들일 때에도, 녀석이 혼자가 아니라면

서로의 옆구리를 잇대어 묶어주지.

어느 한 녀석이 아프고 서러워 울먹이면

다른 녀석들이 따라 어깨라도 들먹이라고.

작은 새라도 와서 야윈 가지 출렁이면

같이 웃어도 보며 눈물 쓰윽 닦으라고.

죽어 장작이 되기 전에 어깨걸이부터 가르치는 거지.

형제자매도 한방에서 장작개비처럼 발 쌓고 자봐야

어려울 때 한식구로 숲을 이루는 겨.

부부라면 더군다나 말할 것도 없지.

부부하고 부목하고 다 부씨 아니냐?

연애할 때는 불불이었는데, 받침을 활활

불쏘시개로 태우고 부부가 된 거여.

 

 

나비 수건

(어머니학교 4)

 

고추밭에 다녀오다가
매운 눈 닦으려고 냇가에 쪼그려 앉았는데

몸체 보시한 나비 날개, 그 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떠내려가더라.

물속에 그늘 한 점 너울너울 춤추며 가더라.

졸졸졸 상엿소리도 아름답더라.

맵게 살아봐야겄다고 싸돌아다니지 마라.

그늘 한 점이 꽃잎이고 꽃잎 한 점이 날개려니

그럭저럭, 물 밖 햇살이나 우러르며 흘러가거라.

땀에 전 머릿수건 냇물에 띄우니 이만한 꽃그늘이 없지 싶더라.

그늘 한 점 데리고 가는 게 인생이지 싶더라.

 

 

위 세 편의 시 중에서 어떤 시가 봄호(3월) 소식지에 들어가면 좋을지 골라보세요!

선택한 이유도 적어주시고요.^^

아니면 다른 시집에 나온 좋은 시를 추천해주셔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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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시는 어때요?
    from 마주하다 2013-02-18 18:03 
    일명 에너지 여사 순오기님,건강하시죠? 많이 바쁘게 사시는 건 알지만, 숲해설 소식지까지 관여하고 계시는군요.오늘은 날이 많이 풀려서 어느새 봄이 오려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어요.세 편중 한 편을 골라 드리는 게 더 좋긴 하겠지만, 봄에 읽으면 좋겠다 싶은 시가 있어서 먼댓글을 써요.^^ 최두석 시인의 <꽃에게 길을 묻는다> 에 실린 세 편의 시에요. 냉잇국 노모가 텃밭에서 캐온 냉이에 묵은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을 먹
 
 
페크pek0501 2013-02-18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어려운 문제인 줄 몰랐어요.
세 편을 읽고도 한 편을 고를 수 없다니...ㅋ
벌써 봄호 라는 말을 보네요. 아직 땅에 있는 눈이 녹지 않았는데
우리 마음은 어느새 봄 가까이에 있는 듯해요.^^

순오기 2013-02-18 18:25   좋아요 0 | URL
본래 분기별로 소식지를 내자고 했는데, 작년 9월에 하나 내곤 여직 못 냈어요.
그래서 겨울호가 봄호로 바뀌는 바람에 준비했던 원고를 다시 써야한다는...ㅠ

마음은 벌써 봄이랍니다.^^

세실 2013-02-1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첫째, 두번째 시 좋은데요.
봄의 느낌은 첫째,
자꾸 곰씹어 보는 시는 두번째^^ ㅎㅎ

순오기 2013-02-18 18:26   좋아요 0 | URL
봄은 느낌으로 고른 시가 마이, 부부는 봄이 아니어도 좋을 듯하지요.^^
그런데 교육팀장님이 나비를 추천하니 좀 곤란해서...ㅋㅋ

잘잘라 2013-02-18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번째, '나이'요!
어느해 겨울에, 엄마가 산기슭에서 어린 싹이 땅에서 나오는 걸 보면서 "이 봐라. 얘들이 먼저 알고 나온다. 인제 겨울 다 갔다. 봄이 오는 줄, 사람보다 먼저 알고 나오잖냐."하시던 말씀이 기억나서요.

순오기 2013-02-18 18:27   좋아요 0 | URL
봄하고 딱 맞는 건 '나이'죠.^^
맞아요, 사람보다 먼저 알고 나오는 걔네들 너무 이뻐요!^^

프레이야 2013-02-1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세번째에 한표요!
숲해설가 소식시까지 맡으셔서 바쁘면서도 보람있겠어요.
언니, 홧팅!!

순오기 2013-02-19 03:54   좋아요 0 | URL
나비는 봄보다는 여름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마노아 2013-02-19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요~ 만에 대한 해석도 놀랍고, 정겨운 어투도 입에 착착 붙고요. 새 생명이 태어나는 데에서 봄도 연상되구요. 첫번째에 너무 마음을 빼앗겨서 아래 시들이 잘 안 읽힐 정도였어요.^^

2013-02-19 0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3-02-19 0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번째 시에 한 표 합니다! 읽을 때 입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 너무 좋구요. 봄이랑도 잘 맞는거 같아요. 아, 저는 저 책 없는데, 이렇게 구경 하고 사게 되는 건가요~~~~*^^*

순오기 2013-02-19 19:46   좋아요 0 | URL
입에 착 감기는 느낌이 좋지유~ ^^
알라디너들은 서로에게 뽐뿌질하는가 봅니다.ㅋㅋ

다크아이즈 2013-02-19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록 시인이라면 김빠지는 댓글일지 몰라도 아무 거나 써유, 순오기 언냐.
아무도 시비 걸지 못할 것이구먼유.
일하면서 책 읽고 글 쓰고 언제 자남유? ^^*

순오기 2013-02-19 19:48   좋아요 0 | URL
맞어유~ 이정록 시인인데 뭘 갖다 써도 좋겄지유~ ^^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유~ ㅋㅋ

수퍼남매맘 2013-02-19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째 번 시요. 이유는 봄이 가장 잘 느껴져요. 봄이 오긴 오나 봅니다.

순오기 2013-02-22 01:05   좋아요 0 | URL
첫번째 시를 선택하는 분이 많군요~ 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