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가 개봉된다는 소식에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재독했다. 8년 전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을 때는 독서의 속도가 빠르진 못했다. 3000년 전의 고대 희랍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이 필요했고 그것이 만만치 않아서였다. 신화와 거기에 얽힌 인물의 이야기가 워낙 복잡해 주석과 네이버 지식 백과를 참조해 읽어도 헷갈려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 때 이후로 호메로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을 열심히 읽다보니 이제는 신과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와 암기가 된 상태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재독한 오뒷세이아는 훨씬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고대 희랍 원전의 번역자로 고 천병희 선생을 거론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다. 원전 번역이 선생 일생의 과업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선구자였다. 나도 천병희 선생의 2015년 숲 출판사 개정판으로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이 책은 선생의 번역도 훌륭하지만 각 페이지 하단에 달린 각주와 부록(주요 인명, 신명, 지명, 가계도), 해설이 자세히 나와 있어 좋다. 해설은 호메로스와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 대한 전반적 개념이 서술되어 있다. 책 한권으로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될 정도다. ’오뒷세이아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천병희의 책을 추천한다.

 

이번 재독에는 이준석 역의 오뒷세이아를 선택했다. 이준석의 번역도 정말 좋았다. 두 책 모두 걸리는 것 없이 잘 읽힌다. 천병희의 역이 서술적 흐름에 집중했다면 이준석의 역은 리듬감을 살리기 위해 단어에 집중한 느낌이다. 이준석은 원작의 단어를 그대로 선택했고 그 안에 있는 의미를 최대한 살렸다. 그래서인지 간결하고 정리된 느낌을 받았고 집중력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번역자의 직역에 대한 의도가 너무 대쪽 같아 빈번하게 사용된 어떤 단어들은 상당히 거슬렸고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예를 들어 여기에는 심중(心中, 또는 深重(?))‘기백(氣魄)‘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심중은 마음 속, 마음에 품고 있는 것, 또는 생각이 깊고 침착하다로 기백은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으로 풀이되고 있다. 원작자인 호메로스가 심중과 기백에 해당하는 희랍어를 당연히 사용했겠지만 아무데서나 튀어나오는 이 심중과 기백이란 단어가 많이 낯설었다. 이 단어가 사용된 문장 몇 개만 가져와보자.

 

심중에서 견뎌내는 오뒷세우스의 창들(1129)

기백에서 기쁨을 누리며(1311)

훌륭한 판단과 간계까지 기백으로 궁리해가며(2117)

당신들의 기백이 이를 분개한다면(2138)

기백으로 근심하였다(2156)

심중에서 이를 알아차리고 기백으로 경악하였으니(1322~323)

.........

 

심중이란 단어는 보통 사람에게 붙는 것이지만 오뒷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고향 이타카 섬에 귀향했을 때 그를 알아보는 늙은 개 아르고스에게도 심중에서 견뎌내는(p.427)’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심중과 기백에 대해 천병희는 이렇게 번역했다.

 

참을성 많은 오뒷세우스의 창들(1129)

흐뭇한 마음으로(1311)

교활한 재치와 책략을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면(2117)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2138)

마음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2156)

마음속으로 이를 느끼고 깜짝 놀랐으니(1322)

 

이준석은 심중과 기백의 뜻 차이로 두 단어를 철저히 분리시켰지만 천병희는 두 단어를 거의 하나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런 면에서 이준석의 번역이 더 직역에 가까우며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이 두 단어가 상당히 불편해 독서 초반에는 집중에 방해를 받았고 중간 분량을 넘어갔을 때에 겨우 적응할 수 있었다. 이 두 단어를 분리시키면서 한 번씩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카넷 출판사의 오뒷세이아는 주석이 별로 없어 아쉽지만 삽화가 좋았고 거기에 덧붙인 이준석의 의미 있는 해석이 감동적이었다. 책 뒷부분의 해설도 줄거리의 흐름에 대한 설명이어서 이 서사시가 상징하는 의미와 행간을 이해하기 유익했다. 천병희의 해설이 숲을 보여준다면 이준석의 해설은 거기에 있는 나무를 설명해주어 두 책을 같이 참조한다면 더 깊이 읽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태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준석의 책을 추천하며 새 번역서의 의미에 대해 감사해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워낙 천병희가 이뤄놓은 세계가 크고 단단해 새롭게 똑같은 작품을 번역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쉽지 않았을 것이다.

 

추천사에서 천병희의 역이 독자들이 읽기 쉬운 의역이고 이준석의 역은 원작에 더 충실한 직역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 문장을 예로 들며 두 번역을 비교한다. 이준석의 네 이빨 울타리를 빠져나온 그 말은 대체 무엇이냐.‘라는 직역을 천병희는 너는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느냐?‘로 평이하게 옮겼다고 한다. 생소하고 낯설지만 네 이빨 울타리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람의 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로 이태수는 이준석의 번역이 천병희의 번역보다 독자들이 훨씬 더 호메로스의 속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준석 번역자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호메로스가 쓴 표현을 왜곡 없이 고스란히 옮기고 싶었다고 한다. ’미세한 뉘앙스를 결정하는 조각 말(particle) 하나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p.655)'고도 했다. ’기백심중도 역자의 그런 의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읽다 보면 심중과 기백의 차이가 확실하지 않고 둘 다 거의 마음의 의미로 혼용되어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병희 선생의 의역이 틀린 것은 아니다. 선생은 문장의 부자연스러움이 독자의 집중력을 해칠까봐 이태수가 비판한 작가가 쓰지 않는 다른 말을 동원(p.7)' 했을 것이다.

 

역자 해설에서 흥미로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준석은 1-4권의 텔레마코스 이야기를 저 세상을 향한 여행으로 해석한다. ‘오뒷세이아의 흐름과 관계없어 보이는 이 부분을 보통 텔레마코스의 교육과 성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자는 경계로 넘어가는 여행(p.607)‘으로 본다. 여러 문장을 인용하며 텔레마코스가 인간 세상 밖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이것은 오뒷세우스의 여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텔레마코스가 만나는 네스토르, 메넬라오스, 헬레네가 생을 넘어선 사람이고 그들이 사는 퓔로스와 스파르타도 저 세상에 속한다고 추정한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사실을 역자는 조목조목 분석하고 있었다. 새롭고 환상적이었다.

 

이타카의 오뒷세우스의 집이 구혼자들에 의해 점령되고 곧 결혼에 대한 답변을 해야 할 페넬로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텔레마코스의 여행은 위태로워 보인다. 이 상황에서 잠시라도 텔레마코스가 집을 비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결론적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구혼자들은 돌아오는 텔레마코스를 죽이려고 매복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텔레마코스의 결단이 없다면 일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오뒷세우스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하는 당위가 되는 것이다. 나는 텔레마코스의 여행을 이렇게 받아들여서인지 별로 어색하지 않았고, 오뒷세우스 귀향의 좋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오뒷세이아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뒷세우스의 아들인 텔레마코스의 이야기(1-4), 오뒷세우스의 방랑과 귀향(5-12), 오뒷세우스의 구혼자에 대한 복수와 페넬로페와의 만남(13-24)이다.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의 도움으로만 인간은 정진하고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 예언자에 의해 앞날이 예고되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온갖 유혹과 기본적 욕망마저 이겨내야 한다. 조금이라도 신의 분노를 사거나 예언의 실행이 부정되면 무수한 죽음과 고행, 슬픔과 탄식을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정체성은 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기, 질투로 금기의 영역을 침범해 고향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파멸하고, 하데스로 가 죽은 사람을 만나 예언을 듣고, 괴물과 거인을 맞닥뜨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있지도 않은 자)’라고 말했다가 나는 오뒷세우스라고 밝히며 도발했다가, 신으로 살아갈 기회마저 거절하는 한 인간은 극심한 고역을 치르지만 집으로 돌아간다. 몸을 묶어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은 호기심, 죽은 동료들에 대한 애도, 신께 헤카톰베를 바치며 순종하지만 한편으로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 크세니아를 지키지 않은 자에 대한 복수 등 나약하지만 강한, 복잡하고도 다양한 감정을 가진 인간은 그렇게 필연적이다.

 

내가 읽은 다른 많은 책에서 오뒷세우스가 언급되고 있다. 보통 그는 고통을 당하는 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혜와 지략을 가진 사람, 영웅으로 소환된다. 나 역시 그런 인식으로 오뒷세우스를 받아들였고, 귀향의 과정이 궁금해 오뒷세이아를 읽었다. 처음 오뒷세이아를 읽었을 땐 많이 당황했었다. 그가 너무 인간적인 사람이었고 그저 신이나 예언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끝부분이 충격적이었다. 20년 만의 귀향을 끝으로 오뒷세우스에게 남은 생은 해피 엔딩일줄 알았건만 거기에서 그의 고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 그땐 그의 남은 고통이 그동안의 힘듦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 일거라고도 생각했다.

 

이 책을 재독하면서 다시 인식한 사실은 하데스를 찾아간 오뒷세우스에게 테이레시아스는 귀향 후의 고행과 필멸의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해 이미 예언한다는 것이다. 결국 호메로스는 오뒷세우스를 전형적 한 인간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삶은 끊임없는 고통과 도전의 파도 속에 놓인 돛단배 하나에 불과하며, 그 흔들림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고귀한 것은 오뒷세우스가 귀향의 망각, 불멸의 삶에 대한 유혹을 극복하고 인간으로 남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으로 한 인간 오뒷세우스는 영웅이 된다.


-p.567, 제임스 파커, 에칭, 1805

 

[그러자 그때 꾀 많은 오뒷세우스가 아내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가 모든 투쟁의 끝에 다다른 건 결코 아니에요.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혹독한 노역이 있을 것이고,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내가 전우들과 나 자신의 귀향을 찾아내러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갔던 바로 그 날,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이 내게 예언한 대로지요.

-23247~253]


영화 오디세이는 좋았다. 러닝 타임 172분이 금방 지나갈 정도로 스펙타클했고 집중력 있게 볼 수 있었다. 책의 여러 장면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기대도 되었다. 시인 호메로스가 읊어주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극적인 부분이 많다. 책을 읽으며 그것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면 상상의 범위가 한없이 확장되며 요동친다. 영화는 웅장했지만 호메로스의 노래를 다 담기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책을 두 번이나 읽어서인지 그다지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오뒷세우스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너무 좋았다. 거기에 다른 배우가 절대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멋지게 오뒷세우스의 역할을 해내었다. 페넬로페 역의 앤 해서웨이와 아테네 역의 젠데이아 콜먼도 괜찮았다. 이 영화에서 헬레네 역할로 흑인 배우 루피타 뇽오가 캐스팅 되어 논란이 많았는데, 감독의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시종일관 신은 어떤 모습으로 인간 앞에 나올지 모르니 언제나 모든 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제우스의 법이 등장한다. ’낯선 손님이 오면 주인은 정성껏 대접하고 잠자리를 내주고 떠날 때는 선물을 주는 관습인 크세니아를 철저히 지킨다. 이타카의 페넬로페의 구혼자들도 이 크세니아 때문에 아무 제지 없이 오뒷세우스의 재산을 약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손님의 태도도 존재한다. 겸손하며 예의 있게 행동하며 감사함을 표시해야 한다. 구혼자들은 테미스(themis,-관습, 관행 또는 법도,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바)에 대해 아테미스토스(arthemistos,-도리를 저버린,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수 없는)의 태도를 행했기에 마땅히 응징 당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전작인 오펜하이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대의와 도덕적 인간성의 충돌을 얘기한다. 영화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으로 등장한 트로이의 목마는 오뒷세우스로 대표되는 인간 지혜의 절대성으로 등장한다. 예언자 카산드라 말고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트로이 사람들은 패배를 자초한다. 트로이 목마로 굳건히 닫혀있던 성문은 열린다. 10년 동안 기다리며 고생한 그리스 연합군은 그것으로 전쟁에 대한 승리의 기쁨만이 아닌 광기의 폭력으로 트로이 문명을 완전히 파괴한다. 오펜하이머처럼 도시의 파괴자인 오뒷세우스 역시 불타오르는 트로이를 보며 좌절하고 탄식한다. 호메로스가 한 인간을 노래하며 보편의 인간상을 보여주었다면, 놀란 감독 역시 한 인간을 노래하며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을 보여준다.


가장 갈망하는 것은 가질 수 없는 것이고

가장 가질 수 없는 것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다.

 

뮤즈여, 노래하라. 한 얼굴을, 한 함대를,

트로이를 하루 만에 짓밟은 한 전쟁을,

한 생각을, 한 자락을, 한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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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8-16 1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역이 나름의 의미를 가지더라도 의역으로 읽어야 오딧세우스 귀향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듯 싶네요. 예전에 직역으로 읽다 외눈박이 괴물만큼이나 오딧세우스를 저주하게 되었던 기억이 새로새록 나는군요. 그나저나 남편분의 귀향이라 더 감회가 새로운 독서와 영화 관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축하드려요.

페넬로페 2026-08-16 17:22   좋아요 0 | URL
이준석 님의 번역이 몇 개 단어의 남용 외에는 간결하면서도 리등감 있게 잘 읽혔어요. 이번에 또 다른 오뒷세이아가 출간되던데 그 책 번역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같이 영화 본 남편이 자기가 계속 오디세우스라며
ㅎㅎ
제 닉네임이 사실 이 서사시의 페넬로페에서 온 건 아닌데 기다림의 미학이 너무 좋아 그냥 이 페넬로페 하려고요.
앤 해서웨이에게 너무 미안하지만요.

blueyonder 2026-08-16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보고 <오뒷세이아>를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번역을 비교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6-08-16 22:41   좋아요 1 | URL
네,
완독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5
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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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가 높아 촘촘하고도 농도 짙은 포크너의 문장은, 내내 버석거림과 세찬 빗소리를 내며 소설 속으로 끌어당긴다. 야생 종려나무와 노인은 문명과 자연에 접근하는 인간의 대조적 모습이며 절망과 순응 사이에서 접점을 이룬다. 역학적이며 집요한 인생에서 ‘쓸모없는 낭비’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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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흐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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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문장은 현상을 설명하며, 많이 정제되어 있다. 이것은 문학평론가 박혜진의 해설처럼, ‘담담하며 고요한 절제의 미학(p.237)'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전적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경계의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봤기에 절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은 독일에 있지만 영혼을 고국에만 두었다면 이미륵의 문장은 격한 울음이었을 것이다.

 

감정이 절제된 채, 묵묵히 진행되는 이미륵의 글은 비슷한 시대를 자전적 내용으로 쓴 박완서의 문장과 대조적이다. 집요하고도 선득한 느낌마저 드는 박완서의 문장에 비해 그의 글은 건조하면서도 따뜻하다. 글을 읽을 대상이 그 당시 한국을 거의 모르는 독일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인이 아닌 나에게 이 책은 두 가지 시선으로 읽혔다. 여기에 실제 이미륵이란 사람을 넣어 읽는 것과 그를 떠나 단지 이 책을 소설로만 읽는 경우다.

 

이 소설에는 구시대에 태어나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혼란이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독일로 망명길에 올라 다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한 젊은이의 애환도 있다. 말도 생활환경도 다른 그 먼 곳에서 겪었을 서러움과 인종차별, 고향에 대한 향수는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안전하다고 여기고 간 그곳이 나치의 소굴이자 제 2차 세계대전의 현장이 되었고, 거기에서 살아남아야 했을 이미륵의 고단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언제 들어도 디아스포라의 사연은 슬프고 먹먹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담담하게 서술된 여기에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진 않지만, 고향, 가족, 지나온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소설의 모든 곳에 따뜻함이 있다. 사람들의 순수와 사심 없는 태도에 감탄할 정도다. 다만 일본에 의해 식민지가 된 것에 대한 두루뭉술함과 중화사상에 젖은 그 당시 지식인의 태도가 아쉬웠다. 먼 훗날 그 시대를 바라보는 나에게 답답함이 느껴졌다.

 

딸 셋을 낳고 아들을 낳기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대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여인의 도움으로 세상에 태어난 는 미륵(彌勒)이란 아호로 불리게 된다. 5세의 미륵은 사촌 형 수암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아버지가 작고한 동생의 식솔을 거둔 것이다. 남편이 죽은 고모와 그의 아들 칠성과도 잠깐 동안 함께 지낸다. 직계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친척들도 챙겨야 했던 아버지의 고단함이 보였지만 천석꾼 집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미륵, 수암, 칠성은 아버지가 집에 개설한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난치며 싸우고 벌을 받으며 개구 진 어린 시절을 보낸다.

 

퉁풍으로 아버지가 죽을 고비를 넘기자, 아버지는 서당을 없애고 수암 가족과 칠성 가족도 분가한다. 북적댔던 집안은 조용해지고 미륵은 아버지와 친구처럼 다정하고 친밀한 사이가 된다. 미륵은 계속 한학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이미 신식학교가 들어와 서양 또는 유럽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온 신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민 끝에 미륵도 학교에 입학하고, 힘들어하며 과학과 수학을 배운다. 특히 영어는 미륵에게 너무 어려운 공부였다. 그곳에서 친구들은 미륵의 공부를 도와준다. 미륵의 집안은 세계정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미 미륵의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고 공부에 대한 진도도 많이 나간 상태였다. 미륵도 운명처럼 유럽을 생각하며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인식한다.

 

일찍 한국에 들어 온 일본인은 거의 장사를 했고 사람들은 왜놈들이라 지칭하며 무시했다. 하지만 일본에 의해 나라가 합병되고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강압적으로 한국인을 통제한다. 어느 여름 날 미륵은 아버지와 옥계천변으로 물놀이를 나가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날 저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다. 미륵은 송림으로 가서 잠시 칩거하지만 경성의전(서울대 의대)으로 진학하기 위해 해주에서 서울로 간다. 의학을 배우고 서울 생활을 하며 미륵은 새 시대에 눈을 뜬다. 여지껏 우리나라에서 시행했던 것들이 서양의 학문에 비해 턱없이 비효율적인 것이 많았던 것을 공부를 통해 알게 된다.

 

경성의전에서의 여섯째 학기 중에 3.1 운동이 일어났고 미륵은 참가해 수배자가 된다. 미륵은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인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의 수도 묵덴, 천진을 거쳐 남경, 양자강을 지나 상해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몇 달 기다리다 여권이 나오자 프랑스의 거대한 여객선인 폴 르카호에 탑승한다. 사이공, 실론 섬, 싱가포르, 인도양, 지부티, 홍해, 시나이 산, 수에즈 운하, 지중해, 그리스, 이탈리아, 메시나 해변을 지나 마르세유 항에 입항한다.

 

미륵은 그곳에서 독일로 가 어려운 언어를 공부하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회상한다.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고 매일 답장이 왔는지 우체국에 간다. 우체국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어느 낯선 집 마당에 피어있는 꼬리 관목에 눈이 가 한참을 그 앞에 서 있기도 한다. 해주 자신의 집 정원에서 본 꽃이었기 때문에 반가워서다. 여러 계절이 지나 드디어 도착한 누나의 답장에는 어머니가 며칠의 신고(辛苦)하신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어 있다.

 

 

나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조부모와 부모를 두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으로 존중을 받으셨고 한복을 입고 생활하였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내가 어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9일상을 했었고 시골집 마당에 차양을 치고 조문객을 받았었다. 대를 이어 종손이 된 큰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지만 차남인 나의 아버지는 도시로 나와 공부를 해 은행원이 되었다.

 

한 반에 60명이 넘고 강압적이며 일률적인 교육을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받았고, 그때는 철저히 아날로그의 생활을 했다. 친지와 친구의 전화번호를 수십 개 외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각 다른 대학으로 진학한 우리 친구들은 편지를 열심히 주고받기도 했다. 빠르게 컴퓨터가 세상을 점령했고 우리는 또 디지털의 세계에 입문해야 했다. 지금은 곧 대세가 될 인공지능이 고개를 내민다. 아니 달려오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난 거기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언제나 새 시대는 물밀듯이 밀려오고 나와 같이 미륵도 구시대와 새 시대의 경계, 타국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 아픈 역사의 반복만은 없길 바란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이며 독일에서 혼자 고독한 삶을 살아야했던 그가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담은 글이다. 어떤 배경이든 노스탤지어와 디아스포라가 있다면 누구나 거기에 마음이 움직인다. 이런 내용으로 담담하고 아름답게 서술된 이국의 서사가 전후 독일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끝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독일에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미륵은 억울하고도 착잡한 심정이었겠지만, 인간 삶의 허무와 불가해함을 이해했기에 이렇게 정제된 글로 지나간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동과 비판의 양가감정으로 이 책을 읽었지만 미륵의 고뇌, 여정, 그의 부모님의 죽음은 애틋했다. 작가 연보에 의하면 미륵은 조혼을 해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아마 그들은 독일로 가지 못한 듯하다. 두 아들은 6.25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된 글을 읽는다는 것에 기분이 약간 묘했다. 오래 전 전혜린의 번역으로 읽었을 이 소설은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제목만 나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기대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번으로 이 책이 출간되지 않았다면 난 아마 재독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책도 이렇게 우연으로 다가와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 같다.

 

[사라져가는 조선의 풍경과 기억을 보존하는 기록인 동시에 식민지라는 역사적 조건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이동시키고 변화시키는지 보여 주는 증언으로서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왜 자신의 언어와 장소를 떠날 수밖에 없는지 변호한다. 조국을 떠난 뒤에야 가능해진 회고이자 타국의 언어를 선택한 뒤에야 구성할 수 있는 텍스트였다는 점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을 대표하는 이 작품이 독일어로 쓰인 것은 선택의 여지 없는 선택이었다. -p.240~241,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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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 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
윤새라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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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내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두 개의 독서 동아리는 보통 연말에 내년에 읽을 책을 투표로 결정하는데 이번에 러시아 소설이 거의 선택되었다. 도서관의 클래식독서 동아리는 주로 고전을 읽기에 당연하지만, 동네의 지인들과 함께하는 독서 모임에서도 나중에 남는 건 고전이라며 결국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상반기에 읽기로 했다. 선정된 책 모두가 3권과 4권짜리여서 한 달에 한 권씩 읽다보니 어쩌다 매달 러시아 소설을 읽게 된 것이다.

 

나는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많이 읽어왔고, 나의 최애 작가 중 한 사람도 도스토옙스키였다. 하지만 이번에 악령안나 카레니나(재독)’를 동시에 읽다보니 살짝 시계추가 도스토옙스키에서 톨스토이로 기울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악령에서 도작가에게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전개가 너무 지루했고, 이 작품에서도 여지없이 도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여러 요소가 있어 식상했다. 작정하고 쓴 정치 소설이라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에 비해 안나 카레니나는 너무 훌륭했다.

 

평론가 신형철은 세상 사람들이 외도를 하다 자살한 여자라고 요약할 어떤 이의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2000쪽이 넘는 소설을 썼다. 그것이 안나 카레니나다. 이런 작업을 문학적 판단이라 명명하면서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어떤 조건하에서 80명이 오른쪽을 선택할 때, 문학은 왼쪽을 선택한 20명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할 것이다. 20명에게서 어떤 경향성을 찾아내려고? 아니다. 20명이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왼쪽을 선택했음을 20개의 이야기로 보여주기 위해서다.(‘정확한 사랑의 실험중에서, 신형철, 마음산책, 2014)‘고 썼다.

 

신형철의 글처럼 톨스토이는 기승전결의 군더더기 없는 전개로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과정을 기가 막히게 표현해 안나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개별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드는 문학의 역할에 잘 맞았다. 요즘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에서도 톨스토이라는 대작가의 진가는 발휘된다. 막힘없이 잘 읽히면서도, 그 속에서 성장하는 인물과 전쟁의 상황을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 있는지 매번 감탄한다. 그렇지만 너무 세련되고 매끈한 톨스토이의 글을 읽다보면 마음 한 구석에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그리움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감상적이지만 절절한 그의 문장이 그립다. 길을 가다 계속 자동차 방지 턱에 걸려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뒤로 갔다하는, 그런 불편함이 문학의 본질에 더 가깝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에는 중세에 머물러 있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발전이 느렸다. 1812년 조국전쟁에서 패주하는 나폴레옹을 쫓아간 귀족 군인들이 유럽의 발전된 모습에 너무 놀라 개혁을 요구한 혁명이 데카브리스트의 난(1825)’이었다. 마침 그 봉기는 니콜라이 1세 황제 취임식에서 일어났고 그 사건으로 겁먹은 황제는 집권 내내 철권정치를 시행한다. 푸쉬킨과 도스토옙스키(페트라솁스키 사건)는 강력한 니콜라이 1세 압제의 희생양이었다. 러시아에서의 개혁은 1860년대 이후 알렉산드르 2세 때에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런 영향으로 러시아 문학은 영미나 프랑스 문학이 가는 길을 순서대로 따라가지 않아 독특한 개성이 있고, 그것이 또한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러시아의 메레쥐콥스키는 도스토옙스키에게, 나보코프는 톨스토이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다른 작가에게는 낮은 점수를 준다. 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의 글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나보코프는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에서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투르게네프 순으로 순위를 매겼고 도스토옙스키에게는 혐오에 가까운 혹평을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감상적 글쓰기를 비판했는데, 그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순수, 고통의 숭고함에 대한 시각을 너무 간과한 것 같다.

 

윤새라의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장편소설 속 만남과 헤어짐)는 두 사람의 생애에서 시작해, 6편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하며 두 작가를 비교 분석한다. 두 작가는 같은 나라,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들의 작품 역시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월등히 많다. 태어나고 자란 환경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차이가 난다.

 

메레쥐콥스키는 톨스토이는 육체의 비밀을 보는 자고 도스토옙스키는 정신의 비밀을 보는 자(p.16)‘로 표현했다. 톨스토이는 몸의 작은 디테일을 자세히 서술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외모묘사를 최소화하고 나머지는 주로 대화를 통해 나타낸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각 인물에 대한 외모 묘사를 굉장히 자세히 서술한다. 환경에 따른 외모 변화에도 각별히 신경 써 표현한다. 심지어 보리스 드루베츠코이의 엄마인 안나 미하일로브나 드루베츠카야가 등장할 때마다 울어서 부은 듯한 얼굴이란 표현을 반복해 약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는 대화체 문장이 많아 그것을 읽어 내기가 피곤할 때도 있다.

 

조지 스타이너는 두 작가의 대립 구도를 톨스토이는 서사시의 시인이며 이교도인 반면, 도스토옙스키는 극작가이고 기독교신자로 놓고 비교한다. 톨스토이는 호메로스에 가깝고, 도스토옙스키의 글은 연극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행동을 중심으로 사건을 펼치고, 창작의 뿌리에 살인과 같은 극적인 사건이 있다고 짚어낸다(p.23). 하지만 미하일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대화는 연극에서의 대화의 역할(극적인 대화)과는 다르게 대화적 말이라고 하며 은 연극적 요소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한 인물의 말 속에 여러 사람의 말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인물들이 작가로부터 독립된 반면 톨스토이 소설은 작가의 말이 인물에 투영되어 있다고 했다. 크로노토프(chronotope)는 시간(chronos)과 공간(topos)이라는 그리스 단어 둘은 한 단어로 결합한 것으로, 그 자체로 시공간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나타낸다(p.26). 바흐친은 이 단어를 문학에 접목시켜 연구했다. 한 작품 안에 여러 크로노토프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은 서로 섞이면서 충돌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메레쥐콥스키와 스타이너의 비교 연구를 이어가며 발전시킨 두 작가에 대한 비평이다.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발표순서에 따라 두 개씩 묶어(전쟁과 평화/죄와 벌, 백치/안나 카레니나, 카라마조프 형제들/부활) 시공간과 공통되는 주제에 대해 고찰한다. 먼저 두 작가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알듯이 두 작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고 그것은 그들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준다. 귀족 출신이자 부자인 톨스토이는 여유 있게 글을 쓰면 되었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돈을 벌기위해 전투적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을 이어갔다. 원고료도 도스토옙스키에 비해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가 훨씬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빚쟁이를 피해 유럽으로 가서 글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궁해 투르게네프에게 돈을 빌린 적도 있었다. 투르게네프는 톨스토이보다 훨씬 더 많은 농노가 있는 영지를 가질 정도로 돈이 많은 작가였다. 그럼에도 도스토옙스키는 나중에 극우주의자이면서 러시아정교의 신봉자가 되고, 톨스토이는 비록 실패했지만 진보적 개혁가가 된다.

 

전쟁과 평화1865년부터 러시아 통보에 연재되고 죄와 벌은 그 다음해인 1866년에 같은 문예지에 연재된다. 이 시기는 톨스토이가 소피아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 때였고,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1864년 아내와 형을 동시에 잃고 난 후였다. 톨스토이는 행복의 정점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경제난에 시달리며 각 첫 대작을 쓴다. 윤새라는 이 두 소설을 조지 스타이너의 서사시와 비극에 기반해서 비교하며 분석한다. 이 두 소설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에 대한 서술도 굉장히 흥미롭고 유익했다.

 

백치안나 카레니나에서는 그 시대의 여성 문제, 아름다움과 선에 대한 의미에 대해 서술한다. 시공간의 변화도 비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죄와 벌에 비해 넓어지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전쟁과 평화에 비해 좁아진다. ‘죄와 벌백치는 똑같이 단독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와 미시킨을 내세우지만 백치는 여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도 부각시킨다. 두 작가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카라마조프 형제들부활에서는 주로 법과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 두 소설 다 법정장면이 있다. 공교롭게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톨스토이의 부활은 끝에서 시베리아라는 공간에서 만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읽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애에서 출발하여 여러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작가 개인과 소설적 배경이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잘 서술되어 있다. 특히 두 작가의 장편 소설을 두 편씩 비교 분석해 그 차이점과 공통점을 설명해주어 훨씬 더 이해하기 좋았다. 책 전체의 문장이 딱딱하지 않고 읽기 쉬운 점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여기에 소개된 6개의 장편소설 중 4편을 읽었고, ‘전쟁과 평화는 읽는 중이고 백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책의 소설에 대한 해석에 대다수 공감했다. 다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해석에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안나의 자살을 브론스키에 대한 복수로 본다. 레빈과 안나를 비교하며 그 둘의 차이점을 삶에 대한 기본 태도로 본다. 여러 단점과 실패에도 레빈은 노력하고 소통하지만, 안나는 질투의 화신으로 브론스키와의 사랑만을 갈구한다는 것이다. 레빈의 견실한 결혼생활을 칭찬하며 안나는 근본적인 삶의 양식을 버리고 레빈과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고 한다. 물론 저자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빈과 안나의 비교는 19세기 러시아가 남자와 여자에게 가하는 차별이 없어야만 정당할 것이다. 똑같이 불륜을 저지르는 브론스키는 안나에 비해 훨씬 더 자유롭다. 안나와 브론스키를 대하는 사교계의 시선도 다르다. 그 시대 여성이 갈 수 있었던 영역은 사교계 아니면 연회뿐이다. ‘전쟁과 평화의 나탸샤도 파티에 춤을 추러 가거나 집으로 초대된 손님들과 교류하는 것으로만 사회생활을 한다. 마리야 볼콘스카야는 아예 아버지가 짜놓은 시간표대로만 움직여야 한다. 안 그래도 좁은 여성의 영역에서 그마저도 거부당하고 집에 칩거해야할 안나에게 브론스키에 대한 집착과 심리적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이혼을 해주지도 않고 안나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사회적 제약이 너무 많은 안나에게 과연 레빈처럼 건실한 삶에 대한 기본 태도를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나의 오빠 오블론스키에 비해 안나에 대한 비난과 타락에 대한 프레임도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테마로 볼 때 두 대가는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마지막 장편소설별로 같은 관심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두 문호가 소설을 통해 만난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같은 테마를 다루는 다른 시각, 다른 가치관, 다른 방식이다. 나폴레옹으로 상징되는 영웅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그를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고, 사법 개혁으로 달라진 재판의 맹점을 드러내면서도 서술 기법이나 해결책이 다른 식이다. 그렇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만나고 엇갈린다. 더 나아가 시공간 매트릭스를 매개로 살펴본 장편소설의 진화 과정은 두 작가의 만남과 엇갈림을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넓게 시작해 좁아져 가고, 도스토옙스키는 반대로 좁게 시작해 점차 넓어져 간다.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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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 - 개정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이혜승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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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러시아 문학과 작가, 소비에트 시대예술에 대한 신랄한 평론. 러시아인으로서의 깊이와 이민자로서의 비판이 조화롭다. 나보코프의 개성 있는 작가 순위 매김도 재미있지만, 너무 박한 도작가에 대한 평가로 롤리타를 매서운 눈으로 읽을 것 같다. 강의록이라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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