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잉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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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작가 로베르트 무질비키 바움의 소설을 동시에 읽었다. 각자의 삶이 다 다르겠지만 굵직한 국가의 운명아래 놓이는 건 비슷하기에 두 작가의 인생과 작품을 비교하게 된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고 두 작가의 작품은 출판을 금지 당한다. 무질은 스위스로, 유대인이었던 바움은 미국으로 망명해 집필을 계속한다. 아직 완독하지 못한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에 비해 바움의 단편집 크리스마스 잉어(Der Weihnachtskarpfen)는 하루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어렵지 않았다.

 

비키 바움의 문장은 상징이나 비유 없이 직설적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에다 상황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이 세련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여러 감정을 유발시킨다. 이 책은 첫 번째 소설인 크리스마스 잉어에서 불행의 모습을 조금 보여주기 시작하여 점점 그것이 커져 마지막 백화점의 야페에서 정점을 이루어 터져버린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외된 자의 폭발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위험하지만 황당하고도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크리스마스 식탁엔 잉어 요리를 올리는 관습이 있다. 아이가 셋이 있는 라너 집안의 말리 고모는 126일부터 이 집에 와 크리스마스 요리를 준비한다. 고모의 증조모가 적기 시작해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가 들어 있는 너덜너덜한 공책을 들여다보며 고모는 부엌을 진두지휘한다. 오래 준비해온 만큼 매년 풍성하고 화려한 요리로 가득 찬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부터는 잉어는커녕 다른 재료도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 형편에, 기어이 잉어(어리고 가늘고 빈혈기가 있는)를 구해 우여곡절을 겪는 크리스마스 잉어는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황폐함을 다룬 전형적인 이야기이다. 식탁에 오른 잉어를 보며 모두 다 죽음을 연상하며 왜 전쟁을 통해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 난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주제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여태껏 해 온 관습에 얽매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시대와 환경에 맞게 살면 되는 거지 꼭 잉어를 죽여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어야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말리 고모를 보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마지막 말리 고모의 큰 소리의 흐느낌은 전쟁에 대한 비판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될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의 집을 자주 보여준다. 대개 그들의 집엔 큰 옷 방이 있다. 사계절 옷을 종류별로 한 곳에 정리해놓은 그 공간이 난 늘 부럽다. 작은 집에 살면 에서의 친칸 부인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지금 그녀의 고민은 너무 작고 오래전부터 용량이 넘쳐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옷장대신 새 옷장을 사는 것이다. 몸이 아플 정도로 친칸 부인의 모든 촉수는 새 옷장 구매에 몰려있다. 가난한 친칸 부인의 하루는 모두 가족을 위한 것이다. 피곤하지만 쉴 틈이 없다. 식구들마다 다른 식사 시간, 청소, 시장 보기, 뜨개질, 다림질, 설거지, 재봉틀 앞에 앉아 옷 만들기, 속옷 수선과 양말 깁기.친칸 부인은 똑같은 일을 하는 수십만 부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인 걸 알지만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녀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여유가 없는, 가난한 그녀는 하루 종일 스트레스 받으며, 종종걸음 치며 가계를 꾸려나가야만 한다.

 

수중에 90마르크만 있는 친칸 부인은 비 오는 날 새 옷장을 사러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다. 형편없는 옷장도 최소한 300마르크는 필요하다. 결국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중고 옷장을 선택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앓아눕는다. 폐렴이었다.

 


제화 수습공이며 지능이 조금 낮은 열일곱 살 야페 플룬트는 백화점 진열창 안에 놓인 다채로운 빛깔의 실크 넥타이를 본다. 친칸 부인보다 훨씬 더 가난한 야페는 순간 그 실크 넥타이에 꽂히고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 그의 욕망은 집요해졌고,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목표이자 여정이 되었다. 야페는 돈을 열심히 모으고 다른 사람들에게 얻고 해서 겨우 1마르크를 모은다. 백화점에 간 야페는 넥타이의 가격이 6마르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6마르크의 넥타이를 원한 야페의 욕망은 1마르크의 넥타이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야페는 아무도 없는 저녁에 텅 빈 백화점에서 넥타이를 훔치기로 한다. 어두운 곳에서 넥타이를 훔치는데 성공한 그는 이 실크 넥타이가 자신의 누더기 같은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때부터 백화점 순례를 시작한 야페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채 모든 물건을 손에 넣고 음식을 먹어본다. 야페는 속이 거북할 정도로 욕망에 들떠’ ‘쇼핑 놀이를 하며 광기에 사로잡힌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백화점 전체를 엉망으로 만든다. 백화점의 야페를 읽으며 계속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설마 야페가 더 이상 뭔가를 할까라는 우려와 점점 더 시원해지기도 하는 내 감정이 야페와 함께 춤을 추었다.

 

 

마주렌 총독의 딸이었고, 음악가 차이콥스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던 피아니스트 가브리엘레 폰 가브릴로는 정치적인 문제로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가브릴로프스키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은 아마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한 달에 35마르크의 연금 수급을 하고 18마르크를 집세로 낸다. 나머지로 한 달을 살아야하는 그녀는 굶주려야 하고 낡아빠진 코트와 스타킹, 구두를 대신할 새 물건을 살 수 없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애완동물인 스컹크도 있다. 그녀의 약혼자인 백작이 그녀에게 준 선물이다. 언제나 냄새를 풍기고 위험한 동물이지만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그 동물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굶주림이란 제목에 맞게 가브릴로프스키의 삶은 눈물겹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나 죽음을 응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폐렴에 걸린 친칸 부인과 백화점에서 광기어린 행동을 하고 있는 야페와 가브릴로프스키의 스컹크가 죽기를 바랐다. 친칸 부인이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건강해져도 그녀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친칸 부인의 모터는 다시 가족들을 위해 돌아갈 것이다. 야페는 어떤가? 결국 사형 당했을 것이다. 삶이 힘들어 망상 같은 정신병을 앓고 있으며 매번 굶주리는 가브릴로프스키에게 스컹크는 그녀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줄 뿐이었다. 그들에게 오만한 나를 용서해달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직 12월 초인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벌써 크리스마스 느낌이 난다. 행복과 따스함이 가득하다. 모든 것이 넘치게 빛나고 있어 이 세상이 풍요로워 보인다. 거기에 가난과 소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은총 받은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끊임없이 제공되는 물질의 향연뿐이다. 마법같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그곳에서 앞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생각날 것 같다.

 

4개의 단편은 전체 분량이 170쪽 정도의 짧은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다. 큰 주제의 흐름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무력감과 자본주의에 의한 소외이지만 나는 그것을 떠나 각 인물의 삶이 먼저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이 있든 없든,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거기서 오는 무게감은 변함이 없다.

 

하필 크리스마스는 겨울에 있다. 겨울에 읽는 이 소설은 나에게 많은 우울감을 주었다. 절절했던 그들의 삶, 또는 나의 삶이 무거운 눈에 가지가 부러지는 나무처럼 나약하게 보인다.

 

 

[“병에 걸리면 안 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오늘은 그녀의 모터가 다시 제대로 작동했다. 어제 다른 강둑으로 밀어 보내 막연하게 피했던 의무를 오늘은 다시 되찾았다. 오늘 그녀는 건강의 회복을 과업으로 받아들였다.

-‘중에서

 

몸이 불타면서 그는 파멸이 불러오는 넘쳐흐르는 끝없는 행복감에 휩싸였다. 1층부터 4층까지 사방이 불길에 덮여 바닥이 퍼렇게 녹아 움직이고, 아래에서는 엄청난 굉음이 났다. 기이한 것은 불이 강물처럼 넘치는 가운데 이상한 침묵과 평온함이, 일종의 고요와 적막이 이 광란 속에 흘렀다는 것이다.

-‘백화점의 야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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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페넬로페 2025-12-07 06: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사장은 원래 단단한 재료로 조각을 하다가 유동적이고 쉽게 뭉개지는 재료로 넘어왔는데, 그랬더니 형상을 조형하는 방식도, 감각하는 방식도, 상상하는 방식도 바뀌더래요. 사장은 이런 생각에 도달했죠. 인간의 재료가 달라진다면 인간과 세계의 상호작용도바뀌지 않을까? 우리가 매끈한 가죽과 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까끌까끌한 털로 뒤덮인 존재라면, 혹은 석고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잘 부스러지는 존재라면? 인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매끈한 피부는 인간의 본질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미치고 있을까? - P15

음, 사장의 표현대로 그건 몹시 실험적이었어요. 그 정도로 과감한 피부라면 재료가 본질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았죠. 하지만 한 가지 도저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 하나가 있었어요.
"어, 좋아요. 그런데 ・・・・・・ 대체 누가 이런 피부를 원하는 거예요?"
제가 묻자, 사장이 눈을 또르르 굴리더니 "글쎄, 꽤 많은사람이?" 하고 대답했던 게 기억나요. - P16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기를 꿈줘요. 그 욕망 중 쉽게 승인되는 것들은 거대한 시장을 이루죠. 하지만 승인받지 못한 욕망들도 결국은 어디론가 흘러들어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어요. 그런 갈망은 쉽게 떨쳐버릴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 P17

맞아요.그동안은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균열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잘 밀봉해왔다고 믿었지만 한번 틈이 생기면, 사실은 그 전에도 괜찮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죠. 계속 충격이 가해지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위태로웠는데, 겉으로는 부서지지 않았으니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거예요. 지금은 견디다 못해 빠그작, 이미 갈라졌고요" - P64

원래도 불완전한 소통 체계에 그렇게 많은 불일치를 더할필요가 있을까? 이상한 건 그들이 그 무수한 문자 형식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했다는 거야.
"이런 거죠. 원래 우리 언어는 불완전하잖아요. 기록도 불완전하고요. 아무리 애써도 문자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는왜곡이 생겨요. 우리는 문자 그 자체에 담긴 정보로만 서로소통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문자를 이렇게 수많은 다른 꼴로 새기는 거예요. 문자로는 마음을 온전하게 전달하지 못하니까 더 잘 전해보고 싶은 거예요. 어렵죠?"
그게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더 잘 전하고 싶어서 더 많은불일치를 만들어내다니.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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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2019년 제4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천선란 지음 / 허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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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휴머노이드가 이용되는 미래에, 현재와 똑같은 인간의 감성과 고민이 계속된다면 그 세상은 발전했다고 할 수 있을까? 휴머니즘과 타인의 이해에 바탕을 둔 문제의 해결이 따뜻했지만, 흥미로운 앞부분을 계속 살리지 못해 아쉬웠다. SF소설로 분류되기엔 미래에 대한 서사가 약간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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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5-12-04 0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이 책 오래 전에 사다놓은 책이에요.^^
서점 갔다가 눈에 띄어 사들고 왔더랬죠.
사들고만 왔고…^^
갑자기 책장에서 나를 보고 있는 천 개의 파랑과 눈이 마주쳤습니다.ㅋㅋㅋ
천선란 작가는 다른 소설책에서 몇 번 읽어봤는데 sf소설 중에서도 조금 결이 다른 작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좀비 이야기도 있었고, 최근에 읽었던 로봇 장의사 이야기는 참 따뜻하게 읽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페넬로페 님의 백자평 문장들이 좀 와닿는 것 같아요.
이 책도 그런 결인가? 상상하게 되네요.^^

페넬로페 2025-12-04 09:08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서 천선란 작가 북토크가 있어 급하게 읽었어요. 말과 기수 휴머노이드라는 설정은 참 좋았는데 소설의 전개는 청소년 소설처럼 느껴져 아쉬웠어요. 여기도 따뜻한 세상에 대한 것과 로봇 이용의 문제점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이 조금 신파쪽으로 가더라고요. 이 소설이 워낙 유명해 제가 기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작가의 신간 소설은 좀비이야기라고 해요.

젤소민아 2025-12-04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SF가 요즘 대단한 것 같아요. 대세이기도 하지만 작품 수준도 좋고요~~. 아슐러 르귄이 제 정신적 멘토이기에!

페넬로페 2025-12-05 09:06   좋아요 0 | URL
여러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데 저는 김초엽 작가의 작품이 좋았어요. 매번 과학과 문학이 잘 섞여 있더라고요.
 
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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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 권의 책에 푹 빠져버렸다. 산책길에서 오디오북으로 먼저 듣기 시작한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는 드물게 딴 생각 없이 집중해서 듣게 되는 소설이었다. 순서대로 좋게 듣다 혼모노에서 더 집중했고,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에서는 전율이 일어나 듣기를 멈추었다. 이건 무조건 책으로 읽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바로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주문했다.

 

이 책에 수록된 7편의 단편소설의 소재는 모두 익숙한 것이다. 지금, 아니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우리에게 많은 고민과 갈등을 던져준 사회적이면서 개인적인 여러 이슈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매력은 평범한 소재들을 식상하지 않은 감성과 특별한 전개로 섬뜩하리만치 차갑게 사람을 각성시킨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생각지도 않은 반전이나 독한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 흐르듯, 조용히, 순조롭게 진행되면서도 단편하나를 다 읽고 나면 뭔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나부터 시작해 세상 모든 사람들 각자 한 명 한 명씩의 삶, 그로부터 비롯된 이 세상의 부조리함의 원인을 분석하게 된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공적인 재능과 사적인 하마르티아의 연관성을 다루고 있다. 사람은 어디까지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과 한 번의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이다. 사과를 한다면 있었던 일이 없는 일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한 사람을 향한 비난의 수위와 그 실수로 영원히 매장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가 많다. 모든 일이 무마되었어도 피해자의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도이 소설은 겉에서 보여지는 모습만큼 거기에 대응하는 소설 속 로 대변되는 팬덤의 태도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들의 무조건적인 옹호와 납득으로 가려진 진실은 치앙마이의 손발톱과 송곳니를 뺀 호랑이의 등을 쓰다듬는 것과 같은 모호함과 찝찝함으로 남아 각자의 양심 안에 숨을 뿐이다.

 

외국인이 보고 느낀 한국과 광화문 일대를 휩쓸고 있었던 태극기 부대는 그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그들은 왜 거의 노인으로 구성되고, 성조기를 함께 지니고 다녔을까? 그들의 이해 못할 행동들과 떼 지어 악을 써대던 모습이 징글징글해 그곳을 가게 되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지도 않고 빨리 지나쳤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이민 3세대 듀이는 일로 한국에 와 잠깐 머문다. 산책삼아 나간 종로에서 만난 그들에게 듀이는 편견이 없었다. 그곳을 이승만 광장이라 명명한 그들이지만 듀이에게는 모두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스무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본 어떤 모습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념이나 편견을 떠나면 모든 인간은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역설이 있다. 나와 반대편에 섰던 그들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게 되었다.

 

굿이나 점집은 이미 한물간 과거의 산물로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스마트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건재했고 그 힘은 엄청났다. 나약한 인간은 뭔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주술과 신령의 기술은 지켜보는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들을 완벽히 장악했다. 그들이 맹목적으로 의지하는 무당이나 법사의 말과 행동은 어떤 기운과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매번 궁금하다.

 

혼모노(本物)’는 진짜, 진품, 실물을 뜻하는 일본어이다.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것에 광적으로 집착해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있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짜를 뜻하는 일본어는 니세모노(僞物)’이다. 삼십 년 동안 장수할멈 혼령에 의지해 활동한 박수무당인 는 한순간 예언의 힘을 잃어버린다. 말도 없이 장수할멈은 이웃 신애기의 몸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무당도 인간이라 뭔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정한 혼모노는 장수할멈인가? 진짜처럼 보이는 것은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람을 현혹시키며 광적으로 집착하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마지막 굿판에서 벌인 나와 신애기의 대결은 칼날과 작두에 의해 피를 쏟는 내가 승리한다. 혼모노와 니세모노가 묘하게 섞이며 정확한 경계를 흩뜨려버린다. 우리가 믿고 추종하는 것은 결국 확실치 않은 것이다. 진짜보다는 허상이 더 많은 기승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좋은 단편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였다. 남영동 대공분실, 지금의 민주화운동기념관의 정확한 지번 주소는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이다. 작가는 이곳에 위치한 건물을 통해 과거를 소환하며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악의 최대치의 범위를 가늠하게 한다. 직접적인 고통을 보여주기보다 우회적 방법을 통해 더 잔인하고도 섬뜩한 공포와 거기에 희생되는 무고한 인간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아우슈비츠 수용소 반경 40M안의 주변 지역)’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고문대상자가 늘어날수록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많이 필요하다. 인적이 드물며 아무도 그들의 고통스런 비명을 들을 수 없는 곳, 안에서 벌어지는 것과는 무관한 국제해양연구소경동수련원같은 이름이 필요한 건물의 설계를 겸임교수 여재화가 맡는다. 여재화는 성실하고 기본에 충실하지만 야망은 없는 제자 구보승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때부터 구보승은 고문할 인간에게 최적화된 건물을 설계하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 붓는다.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많은 인원을 한 번에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해 모든 생각을 집중했던 것과 비슷하다.

 

평범했던 구보승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사회나 학교는 누구에게나 그런 것을 요구한다. 다만 거기에 인간이라는 요소가 들어있을 때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를 우리는 항상 맞닥뜨린다. ‘인간을 위한다는 것에 담긴 다양한 관점과 오류는 절대 하나로 완결될 수 없으며 결국 그것은 각자의 선택사항이 될 수밖에 없다. 고문대상자를 수용하기 위한 건물의 설계에서 약간의 인간미를 넣어 양심의 가책을 덜고자 한 여재화 역시 구보승과 다르지 않다. 어차피 그들의 목적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성해나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1994년생, 31세인 이 젊은 작가가 정말 놀라웠다. 그동안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기에 이렇게나 다양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다. 성해나의 이 소설들은 모두 사람으로 귀결된다. 읽으면서 많은 사람과 거기에 얽힌 상황들을 인식하고 생각했다.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다. 지금의 나는 누구이며 무슨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며 진짜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각성을 했다. 성해나 작가의 다음 소설이 기대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여재화는 흠칫했다. 이제껏 구보승이 밀어붙였던 합리와 대척점에 놓인 사고였다. 드디어 인간을 고려하다니, 독학하는 과정에서 건축의 기초를 깨달은 게 아닐까, 어렴풋이 유추하며 여재화는 안도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에 창이 없어서는 안 되지.

,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p.191~192,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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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1-29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른 책으로 ‘혼모노‘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완전히 반해 버렸죠.

페넬로페 2025-11-29 13:11   좋아요 0 | URL
네, 소설 혼모노 좋았어요. 이 책에 수록된 다른 소설도 좋더라고요^^

책읽는나무 2025-11-29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려고 몇 달 전부터 이 책 사다 놓았는데…아직도 손을 못 대고 있네요.
얼마 전에 읽은 소설 보다 시리즈에 <스무드>가 실려 있어 읽어보았는데 오! 싶었어요.
혼모노 빨리 읽어야겠다. 그러고선 또 다른 책들에 밀려 있구요.
12월 가기 전엔 꼭 읽어봐야겠어요.^^

페넬로페 2025-11-30 00:13   좋아요 1 | URL
구매해 놓고, 도서관에서 대여해놓고 안 읽은 책이 저도 엄청 많아요 ㅎㅎ
그러면서 또 사고 빌리고요.
여기에 들어있는 소설들 다 좋았어요. 어서 읽어보세요.
 
미술관에서 안아주는 남자 - 르누아르에서 클림트까지, 명화로 읽는 위로의 미술
최예림 지음 / 더블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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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도슨트가 쓴 9명의 유명 화가에 대한 책. 미술관에서 들을 수 있는 기본적인, 평범한 내용뿐이다. 이왕 책으로 출간했으니, 좀 더 깊이 있는 저자 자신의 느낌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메이저 미술 전시가 얼마나 남성 중심의, 유명인에게만 쏠려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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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1-26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부 우리나라 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던 유명 화가들...9명 전부..아마도 그 전시에 도슨트를 했고..그 자료를 바탕으로 책을 낸 듯싶네요..ㅎㅎ 작가가 미술가를 선정해서 묶은 책은 많이도 봤는데...그 중 원탑은 <최초의 현대화가들>인듯합니다. 아직까지는요. 페넬로페님에게도 강추~~!!

페넬로페 2025-11-26 20:2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거의 다녔왔던 전시회의 도슨트를 했던 것 같아요. 요즘은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한 유료 도슨트 설명도 많던데 해설 수준은 이 책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 해요.
<최초의 현대화가들>
꼭 읽어 보겠습니다^^

젤소민아 2025-12-04 2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여자 화가를 찾기 너무 힘들다는....그래도 소설 문학계에는 또 여자가 압도적 우세..? 그래서 균형이 맞춰지나요? ^^

페넬로페 2025-12-05 09:03   좋아요 1 | URL
한국에서는 비싸게 그림 대여해와서 그만큼 남겨야 하니까 아무래도 유명 작가의 그림을 안전하게 전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주요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도 다 조중동 신문사가 주관하고 있어요. 좀 더 다양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아마 저 역시도 많이 안 갈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