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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잉어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평점 :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작가 ‘로베르트 무질’과 ‘비키 바움’의 소설을 동시에 읽었다. 각자의 삶이 다 다르겠지만 굵직한 국가의 운명아래 놓이는 건 비슷하기에 두 작가의 인생과 작품을 비교하게 된다. 1938년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 병합되고 두 작가의 작품은 출판을 금지 당한다. 무질은 스위스로, 유대인이었던 바움은 미국으로 망명해 집필을 계속한다. 아직 완독하지 못한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에 비해 바움의 단편집 『크리스마스 잉어(Der Weihnachtskarpfen)』는 하루 만에 다 읽을 정도로 어렵지 않았다.
비키 바움의 문장은 상징이나 비유 없이 직설적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에다 상황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이 세련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며 여러 감정을 유발시킨다. 이 책은 첫 번째 소설인 ‘크리스마스 잉어’에서 불행의 모습을 조금 보여주기 시작하여 점점 그것이 커져 마지막 ‘백화점의 야페’에서 정점을 이루어 터져버린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외된 자의 폭발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위험하지만 황당하고도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크리스마스 식탁엔 잉어 요리를 올리는 관습이 있다. 아이가 셋이 있는 라너 집안의 말리 고모는 12월 6일부터 이 집에 와 크리스마스 요리를 준비한다. 고모의 증조모가 적기 시작해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가 들어 있는 너덜너덜한 공책을 들여다보며 고모는 부엌을 진두지휘한다. 오래 준비해온 만큼 매년 풍성하고 화려한 요리로 가득 찬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부터는 잉어는커녕 다른 재료도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런 형편에, 기어이 잉어(어리고 가늘고 빈혈기가 있는)를 구해 우여곡절을 겪는 『크리스마스 잉어』는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황폐함을 다룬 전형적인 이야기이다. 식탁에 오른 잉어를 보며 모두 다 죽음을 연상하며 왜 전쟁을 통해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 난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주제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여태껏 해 온 관습에 얽매여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시대와 환경에 맞게 살면 되는 거지 꼭 잉어를 죽여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어야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말리 고모를 보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났다. 마지막 말리 고모의 큰 소리의 흐느낌은 전쟁에 대한 비판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이 될 수도 있다.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의 집을 자주 보여준다. 대개 그들의 집엔 큰 옷 방이 있다. 사계절 옷을 종류별로 한 곳에 정리해놓은 그 공간이 난 늘 부럽다. 작은 집에 살면 『길』에서의 친칸 부인을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지금 그녀의 고민은 ‘너무 작고 오래전부터 용량이 넘쳐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옷장’대신 새 옷장을 사는 것이다. 몸이 아플 정도로 친칸 부인의 모든 촉수는 새 옷장 구매에 몰려있다. 가난한 친칸 부인의 하루는 모두 가족을 위한 것이다. 피곤하지만 쉴 틈이 없다. 식구들마다 다른 식사 시간, 청소, 시장 보기, 뜨개질, 다림질, 설거지, 재봉틀 앞에 앉아 옷 만들기, 속옷 수선과 양말 깁기.…친칸 부인은 ‘똑같은 일을 하는 수십만 부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인 걸 알지만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녀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여유가 없는, 가난한 그녀는 하루 종일 스트레스 받으며, 종종걸음 치며 가계를 꾸려나가야만 한다.
수중에 90마르크만 있는 친칸 부인은 비 오는 날 새 옷장을 사러 여러 군데를 돌아다닌다. 형편없는 옷장도 최소한 300마르크는 필요하다. 결국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중고 옷장을 선택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앓아눕는다. 폐렴이었다.
제화 수습공이며 지능이 조금 낮은 열일곱 살 ‘야페 플룬트’는 백화점 진열창 안에 놓인 다채로운 빛깔의 실크 넥타이를 본다. 친칸 부인보다 훨씬 더 가난한 야페는 순간 그 실크 넥타이에 꽂히고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 그의 욕망은 집요해졌고,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목표이자 여정’이 되었다. 야페는 돈을 열심히 모으고 다른 사람들에게 얻고 해서 겨우 1마르크를 모은다. 백화점에 간 야페는 넥타이의 가격이 6마르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6마르크의 넥타이를 원한 야페의 욕망은 1마르크의 넥타이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야페는 아무도 없는 저녁에 텅 빈 백화점에서 넥타이를 훔치기로 한다. 어두운 곳에서 넥타이를 훔치는데 성공한 그는 이 실크 넥타이가 자신의 누더기 같은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다. 그때부터 백화점 순례를 시작한 야페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채 모든 물건을 손에 넣고 음식을 먹어본다. 야페는 ‘속이 거북할 정도로 욕망에 들떠’ ‘쇼핑 놀이’를 하며 광기에 사로잡힌다.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백화점 전체를 엉망으로 만든다. 『백화점의 야페』를 읽으며 계속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설마 야페가 더 이상 뭔가를 할까라는 우려와 점점 더 시원해지기도 하는 내 감정이 야페와 함께 춤을 추었다.
마주렌 총독의 딸이었고, 음악가 차이콥스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던 피아니스트 ‘가브리엘레 폰 가브릴로’는 정치적인 문제로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가브릴로프스키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은 아마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큰 이유였을 것이다. 한 달에 35마르크의 연금 수급을 하고 18마르크를 집세로 낸다. 나머지로 한 달을 살아야하는 그녀는 굶주려야 하고 낡아빠진 코트와 스타킹, 구두를 대신할 새 물건을 살 수 없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애완동물인 스컹크도 있다. 그녀의 약혼자인 백작이 그녀에게 준 선물이다. 언제나 냄새를 풍기고 위험한 동물이지만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그 동물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굶주림』이란 제목에 맞게 가브릴로프스키의 삶은 눈물겹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나 죽음을 응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폐렴에 걸린 친칸 부인과 백화점에서 광기어린 행동을 하고 있는 야페와 가브릴로프스키의 스컹크가 죽기를 바랐다. 친칸 부인이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 건강해져도 그녀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친칸 부인의 모터는 다시 가족들을 위해 돌아갈 것이다. 야페는 어떤가? 결국 사형 당했을 것이다. 삶이 힘들어 망상 같은 정신병을 앓고 있으며 매번 굶주리는 가브릴로프스키에게 스컹크는 그녀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줄 뿐이었다. 그들에게 오만한 나를 용서해달라고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아직 12월 초인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엔 벌써 크리스마스 느낌이 난다. 행복과 따스함이 가득하다. 모든 것이 넘치게 빛나고 있어 이 세상이 풍요로워 보인다. 거기에 가난과 소외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은총 받은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끊임없이 제공되는 물질의 향연뿐이다. 마법같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그곳에서 앞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생각날 것 같다.
이 4개의 단편은 전체 분량이 170쪽 정도의 짧은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다. 큰 주제의 흐름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무력감과 자본주의에 의한 소외이지만 나는 그것을 떠나 각 인물의 삶이 먼저 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이 있든 없든,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거기서 오는 무게감은 변함이 없다.
하필 크리스마스는 겨울에 있다. 겨울에 읽는 이 소설은 나에게 많은 우울감을 주었다. 절절했던 그들의 삶, 또는 나의 삶이 무거운 눈에 가지가 부러지는 나무처럼 나약하게 보인다.
[“병에 걸리면 안 되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럴 시간이 없어요.” 오늘은 그녀의 모터가 다시 제대로 작동했다. 어제 다른 강둑으로 밀어 보내 막연하게 피했던 의무를 오늘은 다시 되찾았다. 오늘 그녀는 건강의 회복을 과업으로 받아들였다.
-‘길’ 중에서
몸이 불타면서 그는 파멸이 불러오는 넘쳐흐르는 끝없는 행복감에 휩싸였다. 1층부터 4층까지 사방이 불길에 덮여 바닥이 퍼렇게 녹아 움직이고, 아래에서는 엄청난 굉음이 났다. 기이한 것은 불이 강물처럼 넘치는 가운데 이상한 침묵과 평온함이, 일종의 고요와 적막이 이 광란 속에 흘렀다는 것이다.
-‘백화점의 야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