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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평점 :
대책 없이 물에서 나와 여기저기로 팔딱팔딱 뛰는 생선 같던 젊은 날의 김영하 소설을 젊은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건 작가와 내가 거의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한 세상이 약간 고개를 내밀 때, 아직은 촌스러운 낭만과 전근대적 성향이 남아 있었을 때의 김영하 소설은 다른 작가의 글과는 많이 달랐다. 한마디로 신박했다. 민족이나 모든 사람을 위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그냥 개인이 주인공인 그의 소설이 재미있었고, 공감되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김영하 글쓰기는 변화되어 갔으며 그만큼 나도 나이를 먹어갔다. 치열하게 살아낸 결과로 쌓인 궤적이 많지만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양은 한정적이니 그것은 넘쳐날 수밖에 없다. 들인 공과 노력이 아깝지만 과감히 쳐내야만 한다. 특히 노년이라는 확실한 길이 보일 때, 급하게 불을 줄이고 필요 없는 것은 걷어내야 한다. 남겨야 할 것은 순수한 관조뿐이다.
김영하의 에세이 『단 한 번의 삶』에서 그것을 보았다. 작가가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많이 비워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에피소드와 다른 책의 인용이 조화로웠고, 작가다운 성실한 깊은 성찰이 있었다. 한 번씩 방송매체를 통해 본 작가가 워낙 달변이라 그가 쓴 에세이도 잘 읽힐 것이라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부모의 부재는 항상 실감되지 않는다. 평소 잊고 있다가 엉뚱한 곳에서 부모의 부재를 인식하게 되면 그때마다 슬픔을 느낀다. 이 책은 작가의 어머니의 빈소에서 시작된다. 나의 엄마와 비슷한 증상으로,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신 작가의 어머니 얘기에 그만 처음부터 울고 말았다.
자식은 부모의 제한된 정보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내가 인식하고 판단하는 부모는 실제와 많이 다를 것이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엄마의 영정사진을 보며 내가 엄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작가 역시 어머니의 빈소에서 인생을 중간에 보게 된 영화 같다고 느낀다. 빈소에서 알게 된 어머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소설에서의 반전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어렸을 때 보았던 부모님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실망할 때도 있다. 특히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권위적이었고 다정하지 않았다. 작가 역시 아버지와의 관계가 그리 순탄해 보이지는 않는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모의 희망과 기대대로 자식은 잘 움직여주지 않는다. ‘기대와 실망의 왈츠(p.51)’가 계속 엇갈리며 반복된다. 그것이 어느 순간 서로에 의해 이해되기도 하지만 이미 마음속에 각인되고 쌓인 감정은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남들이 가는 길을 절대 그대로 가지 않을 것 같은 작가 인생의 이야기에 재미있는 부분도 많다. 뭔가를 저지르고 실패하고, 다시 재도전해 성과를 내는 작가의 고집도 좋았다. 많이 읽고 많이 쓴 사람답게 평범한 것에서, 느끼고 다듬어 깊은 울림을 주는 작가의 내공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내가 사는 방식, 늙음, 앞으로 가야할 방향에 대한 편안함과 용기를 얻었다. 대놓고 자기계발서라 이름 붙인 책보다 작가들의 에세이가 훨씬 더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 한번뿐인 삶에서의 ‘인생 사용법(P.194)’을 오랜만에 유쾌하게 읽고 배웠다.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는 말을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새해에 세운 그 거창한 계획들을 완수하기에 열두 달은 너무 짧다. 그러나 십 년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서 띄엄띄엄 해나가면 어느 정도는 그럭저럭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십 년이 여럿 쌓였다. 할 줄 아는 것만 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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