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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평점 :
이 책을 읽다가 뭔가 이상하고 믿기지 않아 책의 처음부분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기 실려 있는 아홉 편의 글이 츠바이크가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쓴 기록’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작가 소개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있었다.
알려진 대로 유대인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나치를 피해 브라질까지 갔었지만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사람이 어떻게 이런 희망적이고도 따뜻한 내용의 글을 쓸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경쾌하기까지 하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 특별한 사람을 세상 끝으로 내몬 집단적이고도 말이 안 되는 폭력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늘을 나는 새에게도 하느님은 먹을 것을 주시니, 하물며 인간인 너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절이 있다. 미래를 걱정하다가도 이런 구절에 힘을 얻기도 하지만 사실 효력은 오래 가지 않는다. 츠바이크의 말마따나 세계의 어느 지역에 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빵 한 조각, 맥주 한 잔, 잠잘 방 한 칸, 옷 한 벌을 얻으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돈은 절대 하늘에서 뚝딱 떨어지지 않는다.
《걱정 없이 사는 기술》에서 성경 구절대로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정말로 교과서적으로 신을 믿는 삶’을 사는 안톤은 한국의 홍반장(영화 ‘홍반장’,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주인공)같은 사람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저런 사람은 가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츠바이크가 거주했던 작은 도시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절한 때에 나타나 생색내는 일 없이, 문제를 해결해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는 안톤은 정직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다. 가난하지만 하루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원하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걱정이 많았던 츠바이크는 안톤이라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 세상을 대하는 지혜를 배운다. 그를 통해 자본주의적 속성만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산타 할아버지에게 강남에 있는 한강뷰의 아파트를 받고 싶다는 초등학생의 대답이 현실과 세태를 반영해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그 학생을 무조건 비판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톤을 통해 그 초등학생에게 말해주고 싶다.
1923년 독일-오스트리아 통화인플레이션(3년이나 계속되었다.)으로 물가는 엄청나게 올랐고, 돈의 가치는 형편없이 떨어졌다. 츠바이크는 1년간 작업한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인세를 받았지만 인플레이션으로 그 금액은 원고를 보낼 때 썼던 우편요금보다 가치가 적게 되었다. 전쟁을 치르고 그 후로 돈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져 분명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었지만 오히려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강했다고 츠바이크는 말한다.
힘들지만 일상을 유지하려는 집중을 했고, 돈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삶의 오랜 가치가 더 중요해졌다고 했다. 29개월 동안 계속된 독일의 레닌그라드 봉쇄시기에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도서관에 모여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했을 때, 인간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느꼈지만, 그것은 특수성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츠바이크는 《나에게 돈이란》에서 그런 나의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 ‘돈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진수’를 깨닫는다는 말의 진심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 후로 내가 돈을 무시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일 터다. 돈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자극을 나는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모든 방문객에게 하듯이, 나는 돈에도 모든 문을 활짝 열어둔다. 하지만 돈은 방문객 그 이상은 아니다. 나는 돈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삶의 지배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날의 경험을 통해 나는 지울 수 없는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 ‘나에게 돈이란’, 중에서]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는 날, 그곳(콩코르드 광장)에서 가까운 센강에서는 수많은 낚시꾼들이 보통 때와 같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중의 환호와 왕의 목이 바구니 안으로 굴러들어가는 역사적 순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물에 떠 있는 찌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일화에 대해 츠바이크는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 극적인 날에 낚시를 하고 있던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 뒤 츠바이크 역시 파란만장한 역사적 흐름을 몸으로 체험하고서야 그들의 일상을 인정하고 이해하게 된다.
비극이 계속될수록,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에 있을수록 사람들은 그 자체를 잊으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공포와 괴로움에 공감하지 않으려는 것이 아닌, 평범한 삶에 대한 인간적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소망인 것이다. 고통과 참담함에 대해 너무 몰두하다 보면 인간은 피곤해지고 그것을 감당할 여력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난국의 시대에 일상에 충실한 사람을 너무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무너져가는 세계의 폐허를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라는 것이다.
2024년 12월, 대한민국에서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사용되지 않을 허구의 단어라고 여긴 ‘계엄’이라는 말이 선포되었다. 몇 시간 만에 그것은 철회되었지만 충격적이었다. 그 말은 나라를 완전 두 쪽으로 나누었고, TV 뉴스를 여전히 장식하고 있으며 해결된 일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기함한 국민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채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
이 와중에 읽은 《센강의 낚시꾼》은 지금의 상황과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매일, 매시간 역사적 사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츠바이크가 말한 이 내용은 많은 상징을 가지고 있고 의미가 깊다. 다만 일상을 중요하게 여기는 삶을 살기 위해 역사의 현장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폐허를 등지고는 새로운 것을 건설할 수 없다. 그것은 다음 세대에 더 많은 문제를 안겨주는 것이다. 피곤하고 지치더라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위해 집중해야 한다. 이 글의 제목처럼 어두울 때 보이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거대한 침묵》, 《이 어두운 시절에》, 《하르트로트와 히틀러》에서도 지금의 우리 상황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나치의 모든 죄악과 폭력에 의해 강요된 침묵, 자유의 억압, 굴욕, 소설의 이야기들이 현실에 적용되는 사례들을 언급한다. 츠바이크가 조국에 대해 실망하고 억지로 그곳을 떠났지만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와는 갈라설 수 없다는 사실에 숙연해진다.
[그러나 작가는 조국을 떠날 수는 있어도, 창작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는 갈라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독일어로 나치의 자기 신격화에 맞서 줄곧 싸워왔고, 바로 이 독일어야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입니다.
- ‘이 어두운 시절에’ 중에서]
이 책에서 나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내용은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었다. 빈에서 츠바이크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모든 학생들이 신뢰하고 좋아했던 동급생이 있었다. 어느 날, 대형 금융회사 대표였던 친구의 아버지가 사기범으로 체포되었고, 2주 동안 친구는 학교에 오지 않는다. 3주째에 접어들어 그 친구는 학교에 왔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업시간에 고개도 들지 않고 쉬는 시간에는 복도 끝으로 가서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10대의 아직 어린 그들은 친구가 힘들고 외롭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선뜻 다가가 위로해 줄 수 있는 용기는 없었다. 방법을 몰랐던 것이고 누군가 대신 먼저 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다음날부터 그 친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그 뒤 빈을 떠나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어떤 종류든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적절한 말을 찾기 어렵고 나의 위로가 그 사람에게 다시 상처가 될 수도 있어 주저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이 부분은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한다. 위로뿐만 아니라 사과도 마찬가지다.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별 것도 아닌 일에 좋은 사람을 잃는 경우도 많다. 츠바이크는 이 경험을 통해 쉽지 않지만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하라고 말한다. 무조건 받아들일 것이다.
츠바이크가 로댕을 만나 그에게서 받은 《영원한 교훈》은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어떤 일을 완수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이미 아는 것임에도 새로웠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으며 다양한 감정이 들었고,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줄 수 있는 직접적인 힘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가슴에 새기고 전환시켜 바로 실천해야 하는, 나에게 주는 화두도 있었다. 무엇보다 츠바이크의 글은 항상 한 가지로 귀결된다. 그가 글을 너무 잘 쓴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 책은 짧은 에세이를 수록한 것이라 더 그랬다. 그의 글 한 편 한 편이 완벽해서 내가 쓰는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은 사족에 불과하다.
츠바이크의 글은 그저 읽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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