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Cartas de amor a Stalin>
있는 힘을 다해서, 내가 증오하는 대상이 나의 앞날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한다. 불가코프는 자신이 쓴 희곡이 상연 금지되고, 책의 출판도 금지되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작가로서의 자유를 돌려주던지, 아니면 소련을 떠나게 해달라고 스탈린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들이 계속 묵살되던 어느 날, 불가코프는 스탈린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스탈린은 그와 직접 대화를 하고 싶다며 만날 날짜와 시간을 정하자고 했는데, 그 순간 전화는 끊겨버리고 만다. 그때부터 불가코프는 전화기 옆을 떠나지 않고 스탈린의 전화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불가코프는 스탈린이 자신에게 말한 내용을 계속 곱씹으며 처음엔 희망을 가진다. 그러다 점점 ‘스탈린’이란 지독한 허상을 붙잡기 시작하고, 그에게 지배당하고 만다. 반면 그의 아내 불가코바는 현실을 직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을 떠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지만 불가코프는 그것을 무시한다, 불가코바는 스탈린의 바램과 달리 쉽게 무너지지 않고, 불가코프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혼자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불가코바 뭐가 옳은 길이예요? 스탈린한테 수백만 통의 편지를 쓰는 거요?
(불가코프는 글을 쓴다. 스탈린은 불가코프와 불가코바 사이에 위치한다.)-p54]
허상의 스탈린은 불가코프에게, 모스크바에서 동상을 세워주어야 할 작가의 명단 중 13번째에 불가코프를 적겠다고 그를 설득한다. 예술가로서 어떤 신념을 가져야할지 고민되는 순간이다. 명예와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에 남기 위해 명확한 규칙을 따라야 하는지, 아니면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자신이 쓰고자하는 것을 끝까지 고수해야할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어쩌면 불가코프의 앞날을 막는 건 스탈린이 아닐지도 모른다. 권력의 하수인들인 언론이나 연극을 통제하는 기관들이 스탈린의 마음을 읽고, 거기에 합당하지 않는 것들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 전, 아버지 친구의 따님이 정부의 한 기관에 낙하산으로 취업을 한 적이 있다. 그녀가 하는 일은 새로 출판될 책을 미리 읽고, 그 책의 어떤 문장들에 빨간 밑줄을 긋는 일이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어떤 기준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그 기준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가차 없이 빨간 밑줄을 그으라는 지령이 내려졌을 것이다. 그 기준이란 독재자가 아무 의미 없이, 툭 내뱉는 한마디 말에도 어이없이 정해질 수 있다. 그 단어들과 표정을 미루어 짐작해 거기에서부터 무수한 설정과 상상으로 마음을 읽으며, 충성을 다해 그 기준이 정해지는 것이다.
소련의 실존인물인 작가 ‘미하일 불가코프’와 정치가 ‘스탈린’을 등장시킨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인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의 주제는 겉으로는 소련이라는 나라에서 행해지는 예술가에 대한 탄압과 거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만, 한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방법에서도 적용시킬 수 있다. 내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허상들에 의해 난 무엇을 좇아가고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나의 눈과 귀를 막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 희곡엔 ‘휴지’(休止)라는 단어가 아주 많이 등장한다. <하던 것을 멈추고 쉰다>는 의미인데, 그 수많은 ‘휴지’를 지나며 우리는 그 다음에 오는 삶을 위한 끊임없는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생의 방향과 모습들은 달라진다. 불가코프와 불가코바의 모습과 끝도 달랐다. 나에게 주어진 그 ‘휴지’의 시간만큼 나도 옳고 좋은 생각을 해내어야만 한다.
[앞으로 5년간 얼마나 많은 전화선을 우리가 설치할 건지 자네가 아나?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이제 곧 내가 자네한테 전화를 걸겠네, 그러면 그 문제에 대해 우리가 대화를 나눠 보자고. 자네를 거기, 크렘린에 두고, 나도 정말이지 거기에 진정한 친구를 두고 싶네. 독을 넣었을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는 난 한입도 먹어 볼 수가 없어. 공기에 독을 퍼트렸다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는 난 입을 벌릴 수가 없어. 이제 곧 자네는 나를 만나러 올 수 있을 거야. 자네가 준비되는 대로, 조금만 참게. -p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