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지는 마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3
김멜라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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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악도, 위선도 아닌, 그냥 너 자신으로 살아." (P.13)

다정하고 따듯함으로 가득 채운 에세이를 오랜만에 만나 한껏 말랑해졌다. 글은 온통 사랑을 담고 있다. 소설가지만 에세이로 먼저 만난 저자의 글은 따사로우며 유쾌했다. 글을 읽으며 빵빵 터져버렸는데 작가와 코드가 잘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마음을 물들이는 편안한 책을 만나 어찌나 행복했던지 그녀의 일상과 감정들이 내게로 번져오는 것 같았다.

나의 1이자 등뼈는 온점이다. 내 목과 어깨를 받쳐주고 몸 속 장기를 보호해주고, 내가 걷거나 눕고, 앉아서 글을 쓰게 해주는 나의 핵심 골조. 그리고 내가 가장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 (P.36)

'소설가는 이런 에세이를 쓰는구나.' 몇몇 문장을 읽으며 감탄했다. 다른 시선으로 관찰하고 감상하고 기록하는 소설가의 삶이 섬세하단건 알고 있지만 오랜만에 에세이로 만나니 설레였다. 온통 1뿐인 세상에 살았던 작가에게 1은 자신의 등뼈이다. 나의 핵심 골조. 애인이기도 하다. 인생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지. 그 사람이 나를 이루는 주요한 기반이라하면 더 없이 그렇다. 그래서인지 「멜라지는 마음」 에는 마치 작가의 근간을 이루는 듯한 온점이란 존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

어쩌면 그게 불안을 대하는 내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불안을 이기지 못해 맨손으로 뚜껑을 열어젖혔다가 기어코 살갗을 데고 마는 무모함이랄까. (중략) 째깍째깍 초를 재며 다가오는 두려움에 두 손을 들고 마중 나가 맞아야 할 매를 다 맞고 어서 해방되고 싶은 열외자의 심정. (P81)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다정함. 무리해 다가서지 않고 최대한 몸을 작게 한 다음 내 표정을 가만히 살피던 얼굴. (P.91)

에세이는 글을 쓴 사람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얘기하는 기분이란 말에 공감한다. 마치 수다를 떠는 것 같다. 내가 경험한 주제일 때는 격하게 공감하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다가도 잘 모르는 내용일 때는 아리송 눈알을 굴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멜라지는 마음」 은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오랫동안 일상을 나눈 느낌이었다. 맞장구를 치게 만들어주는 글은 더 없이 환영할만했고 그 시간에 푹 빠져버렸다.

나는 틈만 나면 "멜를 거야, 멜를 거야" 하면서 온점의 뺨에 내 뺨을 문질렀고, 온점은 자기 비하에 휩싸인 나를 위해 기꺼이 멜라져주었다. (중략) 신은 나에게 멜르기 좋은 사람을 주셨구나. 그러니 글을 못 쓰는 나라고 해도 괜찮다. 절절히 감사했다. (P301-302)

애정으로 범벅된 에세이의 마무리는 그 다웠다. 호기심을 일으키는 저자의 필명에 대한 의미를 전격 공개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 자체가 다정했다. 제주도 사투리 ‘멜르다’가 연인의 애정표현이 되고 필명이 되기까지 참으로 따듯했다. 내게도 멜라져주는 사람이 있다. 내밀한 곳까지 침범해도 허용되는 존재, 이런 사람을 내려주셨으니 부족하고 못난 나라도 괜찮다는 감사한 마음은 쉬이 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보아도 작가의 글은 사랑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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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안과
변윤하 지음 / 문학수첩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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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굉장히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오묘한 빛깔로 반짝거리는 거울 속 풍경이 을씨년스러우면서도 묘하게 궁금증을 가져다주었다. 판타지적 요소를 좋아하는 내게 붉은색 표지가 인상적인 「보름달 안과」 의 첫 인상은 꽤나 강렬했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겨울의 색을 지녔다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이야기는 학교에서 까마귀를 쫓다가 거울 속 보름달 안과에 떨어지게 된 은후로부터 시작된다. 그 속에서 만난 도선생과 미나, 그들은 사람의 눈을 치료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의 영혼을 치유한다고 해야 될까.

「보름달 안과」 라는 제목에 의문을 품었는데 책을 읽으니 풀려버렸다. 사람의 눈을 입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마치 보름달과 같다. '동그란 구', '반짝반짝 거리는 빛남' 같은 것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색이 바라고 상처난 눈을 치료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는데 더 흥미로웠던 것은 치료의 대가인 욕망이었다. 실명할 위기에도 욕망을 버리기 쉽지 않으니 그래서 인간이겠지.

끊임없이 증오하고 복수심에 온 평생을 바친 이에게 쉬이 그만두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끝에 남는 공허함이 얼마나 클지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왜 인간은 이토록 잔인할까. 왜 어떤 이는 존재 자체로 억압받고 상처 받는걸까. 참으로 불공평하단 생각을 종종한다. 도선생에게 구해진 미나의 운명, 그리고 도선생의 운명은 얽히고 설킨다. 모두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때로 운명은 냉혹하고 이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 아팠다.

가볍게 볼 요량으로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무거운 주제에 여러 생각이 스친다. 은후에게도 아빠가 남긴 상처가 있다. 아빠가 떠나간 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고 은후의 마음은 다쳤다. 그 시작도 결국은 사랑이었단 것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아프다. 한 사람을 너무 아껴서 죽음의 운명까지 받아들이는 사랑을 나는 생애에서 알길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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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그림자 속에서
알비다스 슐레피카스 지음, 서진석 옮김 / 양철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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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잔인함은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다. 이득을 취하려는 이의 잔악한 표정 뒤에는 절규와 절망으로 점철된 사람들이 존재한다. 「늑대의 그림자 속에서」는 2차대전에서 승리한 러시아(구 소련) 군대가 독일 동프로이센(옛 독일 동북부 지방)을 장악하면서 추위와 기아에 내몰린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가족을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나들던 그 작고 여린 이들을 '늑대의 아이들'이라 한다.

사람들은 짐승들과도 같다. 눈이 마주치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공격하려 든다. 그들은 개나 늑대와도 같다. 절대로 눈을 보아서는 안 된다. 최악의 경우 눈에 두려움이 반짝하면 공격하라는 신호와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자비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빵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저자인 알비다스 슐레피카스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오랜 조사를 했다. 잊혀진 땅 동프로이센에서 리투아니아로 넘어간 '늑대의 아이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조차 잘 모르는 상황에서 저자는 더욱 더 집필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전쟁을 잘 알지 못한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우리 역사에서도 끊임없이 벌어진 일이지만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에 그 암흑을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전쟁이 사람의 얼굴을 어떻게 일그러트리는지, 말랑한 마음들을 허락없이 산산조각 부셔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무관심이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자기 자신이 냉담해지게 놔둘 수는 없다.

남편들은 모두 전장에 출전했고 남은 건 여자들과 아이들 뿐인 독일 동프로이센에 러시아 군인들이 들어온다. 너무나 쉽게 보금자리와 재산을 약탈당하고 내몰린다. 바람이 매서운 겨울, 추위와 굶주림은 일상이 되었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쥐를 잡고 군인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구해온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이들은 국경을 넘기도 한다.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죽음을 맞이하거나 혼자 남겨져 고아가 된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이들의 처지는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실제 역사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실제 역사는 믿기 힘든 더욱 참혹한 일들이 자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거예요. 서로 웃고 떠들고 밖은 꽃들이 만발하고, 이 끔찍한 시간이 지나면 우린 다시 웃게 될 거예요. 언니 웃음소리 말이예요. 언니의 멋진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강 건너편에서도 들릴 거예요."

늑대의 아이인 '레나테' 역시 가족과 헤어지고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에 간다. 겨울 숲을 헤쳐 민가를 발견하면 구걸을 하고 군인들을 피해 도망가는 일상이 반복된다. 위험 천만한 시대이지만 독일 아이에게 선의를 베푸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악의를 담은 누군가에게 고발당해 다시 모든 것을 잃는다. '죽음을 불러오는 아이. 불행 그 자체인 존재' 로 불리며 말이다. 폭력과 죽음, 온갖 만행에 노출된 아이들의 이야기에 애가 탔다. 여전히 전쟁은 잘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전쟁은 인간의 생애 벌어져서는 안 될 참상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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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마음
임이랑 지음 / 허밍버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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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이랑 작가에게 홀로 내적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 한참 식물에 관심을 가질 때 작가의 책 몇 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글은 언제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제목의 산문집을 만나 저자의 이름을 확인했더니 기억하고 있던 이름이었다. 바로 '임이랑' 작가! 그가 전하는 밤의 글이 궁금했다.

'매사에 객관적인 사람' 같은 건 없다.

매사에 객관적인 건 애초에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짧은 문장들이 계속 서성인다. 오래 전 혹은 현재 진행 중인 감정들을 글 속에서 만났다. 깨닫기도 전에 지웠던 지난 감정들이 떠올라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대체로 반가웠다. 연필을 들고 공감가는 글에 밑줄을 치다가 내 생각을 얹을 때면 못내 표현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이 담담하게 생각났다. 감정이란 속절없이 흘러가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 달하고는 하는데 이를 잘 제어할 수 있기를 언제나 희망했던 것 같다. 파도같던 감정은 언제나 강했고 쉬이 잠잠해지기 어려웠지만.

수없이 많은 밤을 쌓아 올린 평안도 순간의 불안 앞에선 불구덩이 안에 던져진 종잇조각처럼 순식간에 불타 사라진다. 정신이 망상과 싸우는 동안 몸이 백기를 흔들고 만다. '몸이 정신에게 지는 건 이렇게 초라한 마음이 되는 거구나'하며 슬퍼진다. 나약한 내가 강인하려는 나를 훼방 놓는다.

평소 부유했던 생각들이 글로 정리된 것을 보는 건 언제나 벅찬 일이다. 「밤의 마음」의 글을 조금 더 빨리 만났으면 어땠을까. 컴컴하고 실체없는 불안에 둘러싸였던 어느 시절에 이 책을 만났다면 내게도 단단한 위로가 되어 주었을텐데. 어린 시절의 내게 잠 못 드는 밤들 사이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밤의 마음」을 선물하고 싶은 깊은 밤이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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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의 살림 일력 365 - 일상을 돌보는 다정한 시간
정이숙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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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살림을 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반복되는 일상의 단정함이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이 깨끗하길 바라는 이유는 그 곳에 머무는 가족들의 편안한 쉼을 위해서’라는 저자의 글처럼 소중한 이들이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한 집에서 따뜻하고 안락함을 느끼기를 바란다. 사랑하기에 기꺼이 잘 해내고 싶은 마음, 그래서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이 살림이란 말에 공감한다.

머무는 공간을 가꾸는 일은 비단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잘 정돈된 침구와 제자리에 놓인 물건들, 제철음식으로 해먹는 건강한 한 끼 식사는 나 자신을 아껴주는 일이다. 단정하고 다정한 하루를 만드는건 결국 자신의 몫이니까.

절대 소소하지 않은 저자의 살림 팁을 매일 한 장씩 넘기다보면 어느 순간 나의 일상이 더 없이 다정해질 것만 같다. 12월은 저자가 소개해준 제철 식재료인 매생이를 이용해서 매생이 굴떡국에 도전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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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3-11-30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생이굴국 정말 맛있죠. 저도 매년 겨울엔 매생이 굴국 먹었어요. 이번 겨울에도 먹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