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되는 이른바 전통은,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극히 최근의 것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홉스봄 교수가 엮은 이 책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던 ‘오랜 전통’의 허상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홉스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 창조’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그런 발명된 전통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황실의례가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특히 이 시기 유럽에서 전통의 창조가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 이미지를 만들어낸 예를 추적하며, 만들어진 전통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인들에 의해 국민국가 권위와 특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은 집단적 기념행위가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신호와 의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공식 기억’을 믿도록 하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특히 19세기 말, 20세기 초라는 시기에 전통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홉스봄은 이 시기 유럽이 산업경제가 도래하고 도시화가 전개되며 국민국가가 대두하는 와중에서 급변하고 있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안정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전통이 창조되어야 할 이유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선거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대중정치가 출현한 시기다. 이때 국가는 어떻게 신민들이나 구성원들의 복종과 충성심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그들 눈에 어떻게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없는 문제에 직면했으며, 엘리트는 스스로를 대중과 연결시키기 위해 의례나 레토릭 그리고 상징물을 필요로 했는데, 그것이 전통 창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홉스봄 교수는 신생국이건 역사가 오랜 국가건 모두 오래 된 과거를 요구하기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1870년대 이후 유럽 각국은 ‘전통의 발명’이라는 견지에서 의미심장한 몇 가지 발전을 보였다. 첫째는 초등교육 발전으로 대부분 선진 유럽 국가들이 초등교육 의무제를 도입하고 자국 역사와 국민적 전통을 아동들에게 주입시켰다. 두 번째는 공식 의례의 발명인데, 프랑스에서 1880년 바스티유의 날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라 마르세예즈>가 국가로 지정되었으며,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주년 기념행사(1887)와 60주년 기념행사(1897)가 대단히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세 번째는 공공 기념의 대량 생산으로, 수많은 기념물이 이 때 건립되었다. 현재 유럽 대도시들을 장식하는 수많은 동상과 건축물이 그 결과다.



1870년과 1914년 사이에 태어난 ‘신생국’인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은 대체로 영국식 모델에 기초해서 국가 수도를 정하고, 국기, 국가, 국경일을 제정했다. 이런 전통에서 영국은 가장 앞선 전범을 보였는데, 1740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king)>가 세계 최초의 국가(國歌)이기 때문이다. 국기는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나타난 삼색기가 선례가 되었다. 만들어진 전통에서 무엇보다도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은 기념행위다. 기념행위는, 그것이 없다면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적 기억을 안정화시키려는 계산된 전략이다. 그것은 과거로 하여금 현재에 돛을 내리게 하고, 시간이 멈춰 있을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1870년 이후 거행된 기념행위는 한 가지 면에서 그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전까지는 엘리트 중심이던 왕실의례가 이번에는 대중을 겨냥해서 거행되었다는 사실에 그 새로움이 있었다.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군주는 모든 신민의 집합체와 직접 관계를 설정해야 했던 것이다. 문제는 19세기 기념행사들이 대체로 민중을 ‘위한’ 것이었지만 민중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집단적 정체성과 전통의 창조에 대한 관심은 198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과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이라는 새로운 사조에 의해서도 촉진되었다. 이 두 사조는 역사적 서술의 중립성에 대한 역사가들의 무비판적 믿음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 볼 때 역사적 사료는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에 불과하며,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된 서술은 실은 권력 의지에 의해 구성된 담론일 뿐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한 바대로 확고한 경제적 토대와 그 위에 구성되는 상부구조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면서 ‘사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 결과 랑케 이래 역사학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가 도전받게 되었으며, 역사가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과 과거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사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가가 내세우는 모토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찾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왜 우리가 지금 하는 것처럼 과거를 개념화하는가’에 집중되었으며, 과거 사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왜 기억되는가’를 밝히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역사는 이제 일종의 ‘공공 기억’ 학문적 권위 세례를 받은 과거의 재현”이라고까지 말해진다.



근대 들어 국가가 어떻게 신민들이나 성원들의 복종과 충성, 협력을 확보하고 유지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해야만 그들 눈에 정당하게 비칠 것인가라는 유례 없는 문제들이 제기되었다. 국가가 개인으로서 신민 또는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정규적인 관계들이 점점 더 핵심적인 문제로 떠올랐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한때 사회적 종속관계를 폭넓게 떠받쳤던 낡은 장치들은 취약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과거에는 한 통치자 아래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누렸던 집합체나 법인체, 하지만 역시 자기 구성원을 통제하면서 정상에서 버티던 더 높은 권위에 잇닿아 있는 권위 피라미드가 사회 위계를 성층화했고, 그런 구조에서 각 계층은 합당한 자리를 온전히 차지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계급이 관등을 대체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적 변형들로 말미암아, 그런 낡은 구조는 침식되었다. 국가와 지배자가 직면한 문제들이 더 첨예하게 제기된 경우는 명백히 신민들이 시민, 즉 제도적인 차원에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정치행위 – 비등한 예로 선거의 경우 -의 주체로 변형된 경우였다. 그런 문제들이 한층 더 첨예해진 경우도 있었는데, 말하자면 대중으로 시민 정치운동이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지배체제의 정당성에 의도적으로 도전했을 때, 혹은 상위에 군림하는 몇몇 다른 인간집단체 – 가장 일반적으로 계급, 교회, 민족체 -에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국가질서와 양립할 수 없음을 위협적으로 시위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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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비록 여러 문제를 야기하지만, 그나마 자본주의 덕분에 이만큼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자본주의 최대 미덕은 경제 발전이다. 하지만 정치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이러한 의견에 반대되는 시각을 갖고 있다. 우리 경제는 훨씬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체제가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한다. 베블런은 이러한 일을 ‘기업의 고의적인 방해 행위(business sabotage)’라고 명명한다. ‘영리 기업 이득은 생산성이 아니라, 영리 기업이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총체적 ‘피해’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영리 기업이 산업 발전을 제한하는 이유는 자신 이윤 소멸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거의 모든 현대 산업은 최대의 기술 능력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서 가동되고 있다. 영리 기업 목표는 사회에 물질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에 비해 얻을 차등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산 활동을 전략적으로 제한한다. 물론 모든 영리 기업이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제품을 도입하지만, 차등적 우위를 얻을 것으로 예측할 때만 그렇다. 예를 들어 석유 회사는 새로운 착암 기술을 발전시키겠지만 대체 에너지 개발에는 반대하며, 자동차 제조회사는 생산 로봇 개발에는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겠지만 대중교통을 효율적으로 촉진시키는 혁신은 소홀이 한다.‘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은 현대 산업이 더욱 빠르게 발전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는 비싼 가격으로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특허권 제도로 발명가는 일정 기간 독점을 유지하는 반면, 소비자는 ‘새로운’ 제품을 비싸게 구매한다. 특허권은, 예컨대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같은 발명가가 자신 창작물을 보호받아 계속 발명하고픈 동기가 된다고 알려져 있다. 발명가에게 자신 창작물을 일정 기간 단독으로 활용하여 돈을 벌 수 있는 독점 권리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와트가 증기기관을 1770년대 시장에 내놓지 않았더라도 여러 경쟁자 중 한 명이 틀림없이 곧 내놓았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거의 똑같은 순간에 여러 사람이 유사한 아이디어로 똑같은 발명이나 발견하는 일이 흔한 사실에 놀란다. 1876년 2월 14일 엘리샤 그레이가 자신이 발명한 전화기에 특허 신청을 낸 바로 그 날,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또한 자신이 발명한 전화기에 특허신청을 했다. 마찬가지로 스웨덴의 한 화학자가 산소를 발견한 1년 뒤, 1774년에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발견했다. 우리가 누리는 위대한 발명품은 토머스 에디슨 같은 탁월한 발명가 덕택이 아니다. 동일한 질문과 해결 방법을 공유하는 그 시대 많은 사상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허권과 지적소유권은 특정 기간에 특정 지식을 다른 이들이 써먹지 못하도록 막아서 차등 이윤을 얻게 한다. 하지만 사회 전체 관점에서 보면 그 회사나 개인이 특허권이나 지적소유권에 기여한 바는 몹시 적다. 무릇 발명이란 인간 사유가 발전해 온 장구한 역사에서 살짝 한발자국만 더 내디딘 일에 불과하다.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은 터무니없는 폭력이다. 그런 폭력을 폭력이라고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우리 사회가 더 폭력적이긴 하다. 특허 상품이 우리에게 준 혜택과 편의는 특정 개인이나 회사, 인종, 민족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공동 유산이다. 제 아무리 천재일지라도 과거에서 배우지 않았다면 애초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특허권은 차선책일 뿐이다. 경제학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은 모든 사람이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하여 생산 비용 이상의 혜택을 얻는 일이다. 그런데 특허권은 소비자가 자유롭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요즘은 전구나 나일론 스타킹 사례처럼 기업이 혁신하지 않아야만 더 큰 이익을 얻는 시대다. 변리사가 새로운 특허권을 인정하는 정도까지만 기존 제품을 아주 조금 개선할 뿐이기에 인류는 정말 더 큰 발전을 놓치고 있을지 모른다. 기업은 이미 존재하는 부를 이리저리 옮기는데 힘쓰지 말고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데 더 많은 재능을 쏟아야 한다. 특허권에는 또 다른 어두운 면이 숨어 있다. 예컨대, 신약에 너무 비싼 가격을 책정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많은 환자를 죽게 하거나 불구자로 만든다. 발명자가 돈을 버는 일과 환자 생명을 구하는 일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할까. 신약 개발 사업을 하지 않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인도, 그외 개발도상국은 최근까지도 의약품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1970년 시행된 인도 특허권법은 인도 복제약품 제조업체들이 다국적 기업 특허권을 쉽게 무시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이 같은 조처로 복제약품 산업은 크게 성장했고 의약품을 발명한 제약업체들보다 훨씬 더 싸게 비슷한 약품을 공급하여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중국도 인도 선례를 따르는 중이다. ‘2008년 이후 중국은 첨단산업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으며, 8년 만에 이 분야에서 전 세계 주요 경쟁자가 됐다. 세계 최고 첨단기술 기업 10개를 꼽자면, 그중 4개는 중국 기업이다. 2008년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실리콘밸리 같은 곳이 단 3년 만에 중국에 만들어졌다. 미국 실리콘밸리는 중국 실리콘밸리와 비교하면 느려터진 것처럼 보인다. 중국 첨단기술 사업가들은 이 지구상에서 제일 살벌한 경쟁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현재 위치에 오른 자들이다. 그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와는 전혀 다른 철학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 중국 실리콘벨리에는 ‘베끼기 문화’가 있다. 지적재산권은 조금도 존중받지 못한다. 누군가가 근사한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사람이 금세 훔쳐간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재빨리 구현했다. 그야말로 단시간에 아이디어 혁신과 보급, 실행 과정을 모두 거쳤다.‘ 이를 보면 미국식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이 인류 발전을 방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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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와 신용은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았다. 국가가 의도를 갖고 만든 것이다. 근대 경제학은 이러한 허구 상품이 마치 자연스럽게 발생했기에 화폐를 실제라고 우기는 억측으로 이론을 전개한다.‘  허구를 믿게 하려면 자연법에 근거한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근대 사상에서 자연법 역할은 현존하는 권리를 신성화하고 그것을 전복하려는 시도는 부적절하다고 낙인찍는 데 있다. ’자연법 개념은 어떤 현상이 사실이라고 객관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듯 보이게 한다. 자연법 이론 논증은 다음처럼 진행된다. 인간 본성은 어떠어떠한 점이 자연스럽기에 여기서 벗어나면 그릇된 일이라는 보는 것이다.’ 하지만 뭔가가 자연스럽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사실 그 자체일 뿐, 어떤 상황이 바람직한지 결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어떤 상황이 자연스러운지 아닌지가 상황의 당위(當爲)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걸 존재[사실]와 당위[가치나 규범]의 간극이라고 하는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처음 거론했다. 어떤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 사실에서 규범적 가치를 추론할 수 없다. ‘흄의 논리는 간단했다. 당위[가치]를 이끌어내려면 또 다른 가치를 투입해야 한다. 당위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을 발로 차면 아프다는 “사실”로부터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람을 발로 차면 안 된다는 “당위”를 이끌어내고 싶을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나쁘다와 같은 이견(異見)이 있을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논리 대전제에 어떠한 ‘자연 상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누군가가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는 달라진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마르크스가 역사적인 사실을 자연스러운 사실로 간주하는 근대 자연법사상을 비판하면서 주목받았다. 사실(事實)은 언제나 사실(史實)의 산물일 뿐이다. 이후 변화한 것을 고정된 것으로, 인위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생각이 이데올로기로 비판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은폐되고 감추어진 것을 들춰 다른 의미를 찾아내면 된다. 다른 의미를 찾는 일이 결국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주장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명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 상태의 자연스럽다는 규칙과 규범, 권리, 의무 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인간 자신과 인간 행위는 모습과 형태가 무척 다양하며 무엇이 인간적이고 본성적이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일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여기는 노동 형태나 화폐 시스템도 기괴한 과거 일, 예컨대 유럽 코르셋이나 중국 전족 풍습처럼,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이를 잘못된 일이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지만, 현재 우리 관점에서는 그저 자연스럽다고 억측 부리는 일로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일에 객관적인 진실은 없다. 상호주관(inter-subjective)만이 존재한다. 상호주관이란 그 당시 다수가 옳다고 ‘믿는 사실’이다. 



르네상스를 거쳐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한 코르셋은 여성이 아름다워 보이길 원했든, 많은 남성이 그 아름다움을 갈망했든 우리 현대인에게 좀체 이해되지 않는 상호주관을 보여준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은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자신 나이 숫자보다 더 가느다란 허리 크기를 갖고 결혼하는 게 꿈이었다. 당시 여성이 이상적으로 생각한 허리 사이즈는 14∼15인치였다. 가느다란 허리가 여성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동시에 가슴을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개미같이 가는 허리에 치마를 분수처럼 풍성하게 부풀려 곡선미를 한층 과장한 실루엣이 유행했다. 코르셋 앞면에는 보정 효과를 높이고자 길고 뻣뻣한 지지대를 넣었다. 실용 면에서 보면 동물 뼈나 강철처럼 튼튼한 재료가 더 좋지만, 상류  여성은 장식을 위해 은이나 상아, 고래수염 같은 재료를 넣기도 했다. 또한 지지대에 시 구절이나 명언을 새겨 넣는 일도 유행했다. 지지대는 성적인 의미가 있어 코르셋에서 지지대를 빼내는 행위가 유혹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에서 여주인공은 해적을 때려눕힌 뒤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코르셋 입는 일에 빗대어 표현했다. “고통이 뭔지 알고 싶어? 그럼 코르셋을 입어봐!” 빅토리아 시대 코르셋을 입은 여성은 따로 쉴 수 있는 방이 있었다. 코르셋이 허리를 너무 조여 숨쉬기 어려운 여성이 많아지자 코르셋을 잠시 풀고 그곳에서 쉴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호흡곤란으로 종종 졸도해도 창백한 채 기절하면 ‘최고의 미인’으로 대접받곤 했다. 코르셋은 무리하게 여성 허리를 조여 탈장을 일으키거나 장기를 압박해 내출혈을 일으키게 했다. 저녁에 코르셋을 풀 때면 피가 베어나오는 일이 흔했다. 게다가 장기 위치를 영구적으로 변형시키거나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찔러 죽기도 했다. 심지어 재채기만으로도 허리에 무리가 가해져 그대로 사망했다. 



코르셋이 유행하던 당시 문학 작품을 읽으면 여성들이 신경 쇠약이나 히스테리, 졸도 등에 시달리는 일이 다반사로 묘사되는데, 모두 코르셋 탓이었다. 심지어 코르셋만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얻지 못하면, 맨 아래 갈비뼈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루소는 가느다란 허리로 남성 부속물이 되고자 했던 여성 허영기를 비난하면서, 코르셋은 ‘여자를 타락시키는 물건’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혼기에 찬 여성에게 가는 허리는 집안이나 재산만큼 자신을 돋보이게 하였기에 코르셋은 20세기 초반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400여 년 동안 코르셋이 유행한 유럽을 좀체 이해할 수 없지만, 중국은 전족이 거의 1천년이나 지속됐다. 전족은 여자 발을 어려서부터 자라지 않게 해 7~10cm 정도로 작게 만들었다. 발을 베로 동여매어 자라지 못하게 하고, 그나마 커진 뼈를 뒤틀어버린 후 발에 살은 고름으로 녹였다. 심지어 세간에는 "발은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면 작아지지 않는다. 문드러질수록 예쁜 발이 된다"고 비법이 전수 되었다. 그러다가 실제 발가락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전족은 평생 뼈가 부러진 채로 사는 삶을 의미했다. 전족 여성은 일할 수 없고 멀리 걸어갈 수도 없었다. 걷기 힘든 여성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이나 사교활동을 할 수 없었다. 단지 방안에만 앉아 있었기에 견문이 좁아지고 생계를 꾸릴 수 없었다. 나아가 의타심과 나약함, 게으름, 자괴감만 커져갔다. 여성 지위는 더욱 낮아졌다. 
















전족 습속은 10세기경 송나라 궁중 무희가 처음 시작했다. 무희는 발을 비단으로 묶고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었다. 그런 다음 연꽃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래서 전족은 '금련(金蓮)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발이 아름답다고 소문나자 귀족은 신분 표시로 이를 모방했다. 원대를 지나 명청시대가 되면 지배계층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전족이 확산되었다. 청대 인물인 전영이, "사대부 가문부터 편호소민(編戶小民)에 이르기까지 전족하지 않는 이가 없다며, 전족은 용모 단장의 한 요건이 되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명청시대 전족이 널리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전족은 순결과 관련 깊었다. 발을 묶은 소녀는 곧 ‘밖으로 마구 쏘다니지’ 않는다는 뜻이며, 집에만 틀어박혀 ‘좋은 여성’으로 성장하도록 잘 키워 진 훌륭한 가문임을 증명해 주었다. 또한 결혼 후에도 남편이 아내를 한가롭게 집에만 머물 수 있게 할 정도로 재력이 있다는 표식이 되었다. 그러자 중산층은 점잖은 체면을 과시하고자 정조에 대한 입에 발린 찬사를 늘어놓으며 전족을 받아들였다.‘ 또한 ’어떤 부모들은 이렇게 불구가 된 딸이 훨씬 높은 가격에 창녀로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족의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는 소녀는 칭찬받았다. 절에서 벌어진 축제 때는 전족 대회가 열렸다.‘ 
















전족이 유행하던 시기에 여성 평가 기준은 당연히 발이었다. 제 아무리 예쁜 여인도 발이 '뚱뚱'하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소각(小脚: 전족을 한 발)에 비해 대각(大脚: 전족을 하지 않은 발)은 천하게 여겨졌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전족은 성적인 욕망이 되었다. 자연스럽지 않게 다리 저는 모습이 남성을 자극했다. 작은 발은 걸울 때 허리에 부담이 되어 음부에 지방이 많아지고 음부를 이루는 골반근육은 더욱 활성화되어 허리에 힘이 세져 성적능력은 배가된다고 믿게 되었다. ‘여성들은 아름답게 수놓은 헝겊신으로 전족을 감싸기도 했는데, 이 역시 남성 흥분을 자극했다. 어떤 남성은 여성 전족 버선을 벗기고, 애무하고, 심지어는 입으로 핥는 것에 성적 흥분을 느꼈다. 발을 만지는 일은 성교에 필요한 서곡이 되었다. 고소설 금병매는 성교하면서 발을 만지는 18가지 체위를 추천한다. 성적 쾌감이 증가함에 따라 발을 잡고 입 맞추고 빨고 조금씩 물어뜯고 씹고 그리고는 입 안에 다 집어넣는다거나 발가락 사이에 놓인 수박씨와 아몬드를 먹는 등의 방중술 서적들이 나왔다. 결국 여성 전족은 부와 여가, 교양, 예술적 재능, 아름다움, 미덕, 남녀 간의 적극적 결합을 이끄는 성적 흥분의 상징이 되었다.’ 
















17세기 중국을 정복한 만주족은 전족 관습을 폐지하고자 포고령을 내리고, 자신들 큰 발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홍보했지만, 전족 관습을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전족은 쾌락이었으며, 남자들은 연민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1895년에 이르러서도, 중국인 기독교인들은 고해성사를 하면서도 여성 발에 대해 음란한 상상을 한다고 한 프랑스 의사가 보고했다. 20세기 초 전족 반대 운동이 본격화 되었지만, 제약요인이 있었다. 다름 아닌 혼인제였다. 긴 세월 전족 전통으로 인해 남자들은 전족 여성과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여성이 방족(放足), 곧 더 이상 전족을 하지 말아야 할 당위성을 절감했지만 혼인문제에 직면하면 다시 전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애 의식 변화가 필요했고, 5.4운동이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 모든 중국 전통에 재평가 이루어졌고, 전족 폐해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5.4운동 이후 젊은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족 여성과 결혼하는 일이 오히려 수치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다. 결국 여성 자신이 자유롭게 걷고 싶다는 페미니즘 운동 확산으로 전족 풍습이 점차 사라졌다. 
















그런데 이처럼 특정 기간, 특정 장소에서 다수가 옳다고 ‘믿은’ 코르셋이나 전족 사례와는 달리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리는 모두 결국 사람이기에 서로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중세의 쾌락』 저자 장 베르동은 "육체를 가진 중세 사람들은 쾌락을 과연 거부했을까, 아니 거부할 수나 있었을까?"라고 그들의 육체적 금욕을 의문시하며, 유럽 중세 아자그(Asag) 습속을 소개한다. 이 의식은 중세 프랑스 남부 지역에서 구애 의식 후 첫 번째 키스 전에 사랑하는 여자 나신을 보는 ‘시련’이다. 여성은 알몸인 남자 옆에 나신 상태로 눕는다. 남자는 이 의식을 주도하는 여성 의사에 반(反)하여 어떠한 짓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아자그는 “남자가 여성 자신을 정신적으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단지 자신 육체를 원하는지 확인“하는 의식이다. 베르동은 유럽 중세가 육체보다 영혼이나 정신을 더 가치있게 여긴 문화임에도, 그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던 남녀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유럽 중세 아자그와 매우 유사한 번들(bunddle)이라는 풍습을 제시한 『인간의 내밀한 역사』의 저자 시어도어 젤딘 논지는 그와 반대다. 과거 남성이 여성에게 접근할 때 꼭 성적인 관계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12세기 유럽 기사들은 숭배하는 여인에게 헌신적이었지만, 꼭 성적인 결합을 바라지 않았다. 17세기 이르기까지 영국에서 결혼은 이십대 후반까지 미뤄졌지만 사생아 출생률은 단 3%에 지나지 않았고, 이 비율은 피임이 보편화된 오늘날과 비교해 봐도 극히 적은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며 당시 사회가 우리 추측과 달리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젤딘은 번들이라는 또 다른 ‘시련’ 습속을 소개한다. 번들이란 구애하는 남자가 여자 초대를 받아 여자 침대에서 함께하는 관례다. “번들은 옷을 입은 채로 껴안고 이야기하고 같이 잔다는 의미였다. 때때로 여자가 허리까지 옷을 벗는 경우도 있었고 신발과 양말을 벗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순수한 애정 표시가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서로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습은 ”응접실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게“ 여겨졌고 따뜻하기에 더 선호되었다. 번들링은 오직 겨울 동안에만 있던 일로 종종 일요일 예배 후에 이루어졌는데 약혼자들 사이로만 이 습속이 제한되지 않았다. 남편은 자기 아내나 딸들과 ‘번들’ 하라고 외부 손님을 초대할 수도 있었다. 이는 영국과 미국, 네덜란드에서 흔했고, 외관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그랬다. 젤딘은 “서로 만지는 것에 대한 금기가 확립되고 성교가 친숙함의 상징으로 확립된 것은” 지난 2세기 전 일이며, 이 같은 과거를 보면 현재 그와는 다른 우리 행동 대부분이 다수가 단지 옳다고 믿는 ‘상호주관’일 수 있다고 암시한다. 
















우리가 굳건하게 믿는 가족에 대한 견해도 단지 현 시대의 상호주관일 수 있다. 영화 <미나리>가 개봉되자 평론가들은 이 영화가 한국과 미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가족을 소재삼아 따뜻함과 유대, 사랑을 잘 표현했다고 상찬했다. 그렇지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봅이 언급했듯, “통상 낡은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낡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전통(traditions)'은 실상 그 기원을 따져 보면 극히 최근 일일 따름이며, 종종 발명된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가족이란 사랑과 따뜻한 안식처, 소중한 추억을 의미한다. 분명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이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낳아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족인식은 본능보다 사회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는다. 가족 간 관계 관념은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매순간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가족의식은 비교적 최근에 탄생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양반층을 제외하고 서민들이 부부와 아이로 구성된 가족을 꾸린 것은 최근 18~19세기 들어와서야 가능했다. 특히 노비가 사회 구성원의 30~50%를 차지하던 16세기 이전에는 가족을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유지하기 몹시 어려웠다. 심지어 가족이 보편화 되고 그에 따르는 가부장제가 강화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다. 이렇게 동아시아나 한국에서 근대 이후 가족 조직이 강화되었다면, 이는 기존 인식과 다른 점이 대두된다. 즉 가족을 중시하는 현상은 그동안 전근대성으로 취급되었는데, 오히려 근대화나 자본주의화 그리고 가족 조직 강화 등이 서로 보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가정의 ‘소중한 아이’ 의미도 가족 의미가 바뀔 때마다 항상 함께 변해왔다. 근대 이전 어른들은 아이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오랫동안 아동 이미지는 끔찍했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는 원죄가 있는 불완전한 존재, 곧 ‘천사’가 아닌 악의 상징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에서 “이 작은 인간은 무지하고 쉽게 흥분하며 변덕스럽다”고 서술하고 있다. 너무나 타락한 아이 본성을 교정하고자 위협과 회초리, 체벌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오히려 “아이들을 부드럽게 대하면 이들은 타락한다”라는 경고도 있었다. 심지어 “교수형을 선고받은 한 청년은 어머니가 자신을 어렸을 때 제대로 벌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머니 귀를 뽑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자식들 가운데 어머니가 가장 아낀 자식이 가장 나쁜 사람이 된다”라는 속담도 널리 퍼져있었다. 
















‘고대 로마인은 노예이건 업둥이건 간에 사내아이나 계집아이를 집에 두고 “기르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귀염둥이’는 장난감 노릇도 하고 성적 노리개 노릇도 했다. 이러한 아이를 귀여워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아이를 데리고 저녁을 먹고 함께 놀고 응석을 받아주었다.‘ 유럽 중세 부모도 자신 아기를 장난감이나 기계라고 표현했다. 아기 행복이 아니라 부모 스스로 즐기고자 한 일이었다. 아기는 어른들 수중에 놓인 ‘놀이 기구’로, 인격 없는 작은 인간이었다. 아기 인형이 부모를 즐겁게 해 주는 시기가 끝나면, 바로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부모는 자식이 성장한 후에도 계속 기계로 여겼다. 규율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시킨 나머지, 자식은 자신 생각을 드러내지도, 감정도, 이성도 표현하지 않는 데 익숙했다.‘ ’아이를 대할 때 상스러운 농담, 외설적인 언행이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돈을 걸고 도박을 하게 그냥 놔두었다‘ 과거 사람들은 우리 방식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두 세기 전만해도 나무로 만든 나막신만 빼고 당시 유럽 사람이 오늘날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느꼈다고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 사람들 생각이 우리와 비슷했을 거라고 그릇된 느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18세기 프랑스 판본 ’동화‘ <빨강 모자 소녀>를 읽어보아야 한다. 동화는 분명 당시 소녀들에게 숲속에서 늑대를 만나면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이겠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 아이를 재우면서 다음과 같은 동화는 절대 읽어주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옛날 사람들과 우리 생각 차이는 크다.
















옛날에 어머니 심부름으로 한 어린 소녀가 할머니에게 빵과 우유를 가져가고 있었다. 그 소녀가 숲속을 걷고 있는데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어디 가냐고 물었다. "할머니 집으로요." 소녀가 대답했다. "어떤 길로 가느냐? 핀의 길이냐, 바늘의 길이냐?"고 늑대가 묻자, "바늘의 길이오"라고 소녀가 답했다. 그리하여 늑대는 핀의 길을 따라 할머니 집에 먼저 도착했다. 늑대는 할머니를 죽인 뒤 그 피는 병에 담고 살은 썰어서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는 할머니 잠옷을 입고 침대 속에서 기다렸다. 소녀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늑대가 말했다. "들어오렴, 얘야." 소녀는 늑대가 할머니인 척 하고 있단 사실을 모른 체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 할머니. 빵하고 우유 좀 가져왔어요." "너도 뭐 좀 먹으렴. 찬장에 고기와 포도주가 있단다." 그리하여 소녀는 그것을 먹었다. 그녀가 먹을 때 작은 고양이가 말했다. "더러운 년! 할머니 살을 먹고 피를 마시다니!" 그러자 늑대가 말했다. "옷을 벗고 내 옆으로 들어오렴." 소녀는 할머니라고 여긴 늑대에게 물어봤다. "앞치마는 어디다 둘까요?" "불 속에 넣어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코르셋, 치마, 페티코트, 스타킹 등 옷마다 소녀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늑대는 매번 똑같은 대답을 했다. "불 속에 넣어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소녀가 침대에 들어가서 말했다. "할머니, 왜 이렇게 털이 많아요?" "따뜻하기 위해서란다, 얘야." "할머니, 왜 이렇게 어깨가 넓어요?" "나무를 잘 옮기기 위해서란다, 얘야." "할머니, 왜 이렇게 손톱이 길어요?" "가려운 데를 잘 긁기 위해서란다, 얘야." "할머니, 왜 이렇게 이빨이 커요?" "너를 잘 먹기 위해서란다, 얘야." 그리고 늑대는 소녀를 먹었다.‘ 
















아이는 때때로 하인과 거의 구별되지 않던 시기도 있었다. 아이들은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일해야 했고, 특히 19세기 유럽에서 한 집안 수입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를 책임졌던 시기도 있었다. 가까운 일본만 보아도, ‘일본 전통 사무라이 집안 사내아이는 아주 어린 나이에 낯선 가정에 보내져 남의집살이를 해야 했다. 그곳에서 부족하고 가난한 생활을 했다.’ 어렸을 때 남의집살이를 한 아이들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유럽 중세 아이는 남아든 여아든 일곱 살에 다른 사람 집으로 보내져 열여덟 살 무렵까지 다양한 봉사를 했다. 이 기간 아이들은 다른 가정에서 시키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아주 소수 아이만이 집을 떠나지 않았는데, 재산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남의 집으로 아이들을 보내고 자신 집에는 다른 아이들을 받아들였다. 사실 부모가 직접 가르칠 수 있는 일들을 자식들이 다른 곳에 가서 배우도록 했다는 점은 이상한 관습이 아닐 수 없다. 아이의 기본 의무는 다른 집 주인을 ‘제대로 잘 섬기는 일’이었다. 시종인 아이는 식탁을 차리거나 침대를 준비하고 주인과 동행할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당시 이런 ‘봉사’는 현재 우리 가치관과 많이 다르다. 봉사라는 관념이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었다는 사실은 후세 사람들 생각처럼 그렇게 굴욕적인 일이 아니었다.‘ 

 
















​‘근대 이전에는 부모와 자식 관계가 주로 감정보다는 먹고사는 경제 문제로 결정되었다. 가장 자연스럽다고 인정되는 모성애만 하더라도, 많은 사회학자가 과연 과거에 모성애가 존재했는지, 아니면 근대에 와서 비로소 만들어진 것인지 의심스럽게 여긴다. 산업사회 이전 아이들은 나름의 욕구를 갖고 있지 못하여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불완전한 성인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특별한 주목이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부모는 아이를 방해물이라고 느꼈으며, 불가피한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 이기심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은 채, 아이라는 짐에서 벗어날 방법만 수없이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만약 모성이 본능이라면 어떻게 다른 자식들보다 유독 한 자식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어째서 딸보다는 아들을, 둘째 아이보다는 첫째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당시 어머니는 재산을 혼자 이어받게 될 상속자, 곧 장남에게만 애정을 보였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을 의탁할 수 있는 장남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필수였다.















그러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우리 마음에 혁명이 있었다. 어머니의 이미지와 역할, 그 중요성이 급격히 변했다. ‘모성(母性)’이라는 말에 ‘애(愛)’라는 단어가 결합하면서 어머니 사랑은 자연 발생적이라고 여겨지기 시작했다. 인구 증식 자체가 국부(國富)로 인식되어 유아 생존이 새로운 지상 과제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는 식민지 사람들을 복종시켜 길들이기보다는 자국 인력을 양성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아이는 국가 관심 대상이 되었다. 여전히 사망률이 높아 부모가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젖먹이 아기 생명조차 중요해졌다. 국가는 아이 생명과 교육을 위해서 ‘모성애’라는 말을 모든 어머니 머리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사실 18세기 이전 아이는 가족에 속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일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아프리카 속담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뜻은 단지 아프리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 내 상호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나 부모와 자식 간 특별한 감정이 꼭 필요하지 않았다. 상호 애정은 가정 밖인 이웃이나 친구, 주인과 시종, 아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로 구성된 아주 긴밀하고 정감어린 공동체 사회가 보장했다. 사람들 일상이 공동체 중심으로 이루어질수록 가족 자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근대 산업 사회가 되자 가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공동체보다 가족 구성원 간 사랑이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웃 관계에 대한 의식이 적어질수록 가족애가 지배적인 의식이 되었다. 가족의식 발달은 사생활 발달과 가족관계 내밀화를 가져왔다. 가정은 부부 사이, 부모와 자식 사이에 필수적인 애정 공간이 되었다. 이제 부모는 아이들 학업에 관심을 두고 항상 정성을 다해 주의를 기울였다. 전에는 결코 이러한 태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 구성원 간 사랑은 공동체에 따라 변해온 역사다. 공동체가 개인에게 충분한 버팀목이 되면, 개인은 가족 속박을 피했다. 반대로 공동체가 개인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면 가족은 보호처가 되었다. 미국처럼 가족의식이 발달하여 ‘가족애’를 지나치게 내세우는 곳은 공동체가 안전하지 못한 사회다. 그러한 곳에서는 가족 개개인, 예컨대 영화 <미나리> 주인공들처럼 공동체 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오롯이 그들 스스로 고통을 떠안아야만 한다. 정치경제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동체와 가족은 ‘대립’ 관계에 있으며, 개인이 더 자유롭고자 한다면, 공동체가 가족에 선행해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과 공동체는 반비례해서 발전한다. 공동체와 가족은 상호 보완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대립된다. 가족이 강화되면 모든 사회 공동체 유대가 약화되고, 때로는 공동체가 해체된다. 가족이 긴밀히 단합된 곳에서 공동체는 다만 드문 예외로서만 형성된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가족 유대가 약화되고 개체가 또다시 자유롭게 된다. 개체가 가족에 흡수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 발생하는데 있어서 최대 적은 가족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만일 가족보다 더 높은 사회 형태인 공동체가 발전하면 가족을 해체, 흡수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가족이 나중에 무한히 더 좋은 조건 밑에 새로이 조직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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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란 이름 자체가 자유주의가 가장 열중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바로 자유다. 자유주의가 매력과 회복력을 겸비한 것으로 입증되어온 까닭은 무엇보다 인간 영혼에 아주 깊숙이 박혀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역사적으로 부상하고 전 세계에서 매력을 발휘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특히 임의적 통치, 부당한 불평등, 만연한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호소해왔다.



물론 자유주의는 자유를 향한 인간 갈망을 발견하지도 발명하지도 않았다. 리베르타스(libertas)는 먼 고대에 생긴 낱말이며, 자유를 지키고 실현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정치철학을 처음 시도할 때부터 주요한 목표였다. 서구 정치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문헌들은 특히 폭정의 충동과 주장을 어떻게 제약하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폭정 유혹에서 벗어나는 핵심 방안으로 덕성 함양과 자치를 꼽았다. 특히 그리스인은 자치가 개인 차원에서부터 정치제 차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어느 차원에서든 절제,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증진할 경우에만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자치라는 덕목이 시민들 영혼을 다스릴 경우에만 도시 자치가 가능하고, 시민권 자체를 법과 관습을 통해 덕성을 몸에 익히는 일종의 지속적인 습관들이기로 이해하는 도시에서만 개인들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을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 자유를 보호하는 주된 방안으로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해도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근대의 현저한 특징은 이 오래된 정치관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합의는 효력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 뿌리는 사회 병리의 원천 – 즉 분쟁 근원이자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장애물 -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 자유주의 토대를 놓은 사상가들의 주요 목표는 국내 평화를 위해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 종교와 사회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안정과 번영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개인 양심과 행동 자유를 증진할 것으로 그들은 내다보았다.



이처럼 덕성을 훈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버팀목으로 – 따라서 폭정에서 벗어날 자유의 전제조건으로 – 여겨지던 것들이 근대 들어 압제나 임의성, 제한 원천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와 홉스는 비합리적인 관습과 검증되지 않은 전통(특히 종교적 믿음과 실천) 지배가 임의적인 통치와 비생산적인 내분의 원천이며, 따라서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정체의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각자 ‘사고실험’을 도입해 현재 관습과 전통을 교정하자고 제안했다. 달리 말라면, 사람들은 그들의 선천적 본질로 환원하는 – 각자 진정한 본성을 가리는 우연적 속성들을 개념상 벗겨내는 – ‘사고실험’을 통해 철학과 정치를 합리적이고 반성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행동을 인도하는 오래된 사회 규범과 관습을 대체할 수 있는 한층 개인주의적인 합리성에 자신감을 보였다. 설혹 합리성에서 이탈하는 사례가 생기더라도 중앙집권화된 정치국가의 법적 금지령과 제재로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뒤이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잇따라 출현한 사상가들은 자유를 재규정한 이들의 기본적인 사상 혁명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이 규정한 자유는 기성 권위에서 해방되는 것, 임의적인 문화와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 학문적 발전과 경제 번영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 힘과 지배력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유주의가 흥기하고 승리하는 데에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다. 고전고대와 기독교 자유관을 약화시키고, 널리 퍼진 규범과 전통, 관행을 해체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을 우연한 출생 성분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국가를 개인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주 보호자로 재개념화할 필요가 있었다.



자유주의가 이런 사유와 실천의 혁명을 받아들인 것은 엄청난 도박이었다. 다시 말해 기존 철학 전통과 종교, 사회 규범을 뒤집고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를 도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자유를 추구하고 또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 도박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성공을 거두었다. 자유주의 도래에 힘입어 무지몽매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인류가 어둠에서 벗어나 억압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군주정과 귀족정이 쇠퇴하고, 번영이 이루어지고, 기술이 발전하며, 지속적으로 진보하는 시대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종교전쟁을 중단시키고, 관용과 평등 시대를 열고, 오늘날 세계화로 정점에 이른 개인 자유 영역과 사회적 상호작용 영역을 확대하고,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이성애 정상주의를 비롯해 사람들을 갈라놓고 비하하고 차별하는, 용납할 수 없는 온갖 편견에 계속 승리를 거두는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자유주의 성공 자체가 현재 자유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인이 자유주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을 가능성을 성찰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위협 요인의 잠재력은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성격에서,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주의 강점(특히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교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계속해서 진보하고 좋아진다는 믿음)에서 생겨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는 자신 최대 약점을, 심지어 스스로 초래하는 쇠퇴마저 대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현시대 병폐가 무엇이든, 자유주의 해법을 더욱 완벽하게 적용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병폐 중 하나가 사회와 시민을 좀먹는 자기이익이다. 고대의 덕성 의존을 극복하려는 치료법에서 생겨난 이 병폐는,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과 제도에서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자유주의 정치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자기이익은 공동선에 호소하는 모든 주장을 무력화하여 일종의 제로섬 게임 사고방식을 유도한다. 그 결과 시민들은 사적이고 대체로 물질적인 관심사에 점점 집착하다가 전국 규모로 양극화된다.



이와 비슷하게 권위적인 문화로부터 개인을 해방할 수 있다는 ‘치료법’은 사회적 아노미를 초래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부득이 법적 교정책, 경찰 통제와 감시를 확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 규범과 예절이 약해졌거니와 인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어온 까닭에, 오늘날 전국에서 점점 더 많은 학구들이 학교에 감시 카메라(사후 처벌을 유발하는 익명 감독성)를 설치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가장 근본적으로 보면 자유주의 제도에 특정한 지향성과 특색을 부여하는 인간학적 가정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학적 개인주의와 주의주의(主意主義)적 개념이다. 주의주의 이념 – 개인의 규제받지 않는 자율적 선택 -을 정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원형적 자유주의 입장에서 군주정을 변호한 토머스 홉스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이런 취약한 조건에서의 삶이 ‘추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합리적인 자기이익에 따라 주권자로부터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 자연권을 대부분 포기한다. 정당성은 사람들 동의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토대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경제학 강의가 인간을 그저 효용을 극대화하는 개별 행위자로 기술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쳐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헌신을 피하고 유연한 관계와 유대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정치적, 경제적 관계만 대체 가능하고 끊임없이 재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장소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종교와의 관계를 막론하고 모든 관계가 그러하다. 자유주의는 느슨한 연계를 조장한다.



자유주의가 이해하는 자유는 실정법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다. 이 자유 개념은 지난날 이론에 지나지 않았던 상상 속 자연상태를 실제로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선천적 개인주의 이론이 점점 더 현실이 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그 세계는 법과 정치, 경제, 사회라는 구조물 보호를 받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자율성 상태에서 살아가며, 그 상태에서는 법을 시행하고 그에 상응해 국가 역할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이른바 자연적 인간 조건의 위협적인 무질서를 통제하고 억누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해방되는(그리하여 느슨한 연계만 남는) 한편 자연을 이용하고 통제함에 따라, 자율적 자유 영역은 한없이 팽창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율성 영역을 더욱 완전하게 보호하려면 국가 역할을 더 확대할 수밖에 없다. 자율성 영역에서 자유를 누리려면 가족부터 교회까지, 학교부터 마을과 공동체까지, 비공식적이고 익숙한 기대와 규범으로 행동을 통제하는 모든 형태의 결사와 관계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이런 통제는 대체로 정치적인 통제가 아닌 문화적 통제였다. 법은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배우는 비공식적인 행동 기대치인 문화 규범만큼 포괄적이지 않았고, 대체로 문화 규범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개인들이 이런 결사에서 해방됨에 따라 실정법을 통해 그들 행동을 규제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와 동시에 사회 규범은 권위를 잃어가면서 갈수록 과거의 임의적이고 억압적인 잔재로 느껴진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뿌리 뽑아야 할 잔재인 것이다.



자유주의는 결국 두 가지 존재론적 요소, 즉 해방된 개인과 통제하는 국가에 이른다. 홉스는 <리바이던>에서 이 두 실체를 완벽하게 묘사했다. 국가는 오로지 자율적인 개인들로만 구성되고, 이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억제’된다. 개인과 국가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상위에 있는 두 가지 요소를 나타낸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과거에 대한 존중과 미래에 대한 의무가 즉각적인 만족 추구로 대체되고 있다.



예컨대 안정적인 평생 결혼생활의 규범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개인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다양한 합의로 대체된다. 자녀는 갈수록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원인으로 간주되며, 이런 시각은 원하면 낙태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자유주의 약속을 강화한다. 그 결과 선진 세계 전반에서 출생률이 감소한다. 경제 영역에서는 대개 당장 이익을 내라는 끊임없는 요구에 쫓겨 단기 수익을 올리려는 충동이 투자와 신탁을 대체한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지구의 풍부한 자원을 단기적 시각으로 착취하는 것이 우리 생득권이 된다. 설령 훗날 우리 자녀들에게 표토와 식수 같은 자원이 부족해질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활동을 규제하는 일은 실정법을 시행하는 국가 소관으로 치부되지 문화 규범의 산물인 교양 있는 자치 결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실현을 추구하고 갈망 충족을 위해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가속되는 경제성장과 사회에 만연한 소비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사회는 경제성장이 둔화될 경우 여간해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경제성장이 얼마간이라도 멈추거나 역행할 경우 무너질 것이다. 이렇게 인간 목적에 무관심한 – ‘좋은’보다 ‘권리’를 강조하는 – 사람들의 유일한 목표이자 명분은 자유주의적 인간, 스스로를 형성하고 표현하는 개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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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본 이동과 축적이라는 덫에 딱 걸렸다. 게다가 자본 축적은 화폐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 그렇다면 화폐란 무엇일까?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부(富)의 모든 형식 중에서 오직 화폐만이 정해진 한계가 없다며, 자본 축적의 부조리를 생생한 비유로 설명한다. “궁전 다섯 개를 짓기 원하는 왕자도 궁전 5,000개 짓는 일에는 망설일 것이다."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화폐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최초로 구분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실물에 대한 인간 욕망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옷이 만 벌이 있다면 아무리 사치스러운 사람도 부담을 느낄 것이다. 매일 하나씩만 갈아입어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릴 테니 말이다. 배고플 때 죽 한 그릇이 배부를 때 산해진미보다 나은 법이다(사용가치). 하지만 화폐 축적에는 한정이 없다. 1억 원이 있으면 10억 원을 욕망하고, 10억 원이 있으면 100억 원을 욕망한다. 숫자에는 끝이 없기에 화폐에 대한 욕망도 끝이 없다(교환가치). 이것이 화폐 마술이다. 이 때문에 어느 새인가 사람들은 부(富)가 단지 화폐 축적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본말이 전도되며, 사람들은 악다구니를 쓰면서 돈에 환장하게 된다. 하지만 실물의 존재(사용가치)와 화폐의 존재(교환가치)는 엄연히 다르다.‘ 

















여러 생산물이 화폐로 비교된다고 할 때, 방법은 질적인 사용가치가 아니라 양으로 비교된 교환가치다. 화폐로 인해서 질적 가치가 양적 가치로 변화한다. 사실 서로 다른 상품을 질(質)과 상관없이 양(量)으로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상품의 “등가형태”란 무엇인가라고 마르크스가 『자본』 첫머리에서 물었을 때, 그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거기에 응축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종다양한 물건이 양으로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은, 곧 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여기는 것인데 이는 사실일 수 없다. 이러한 가정은 물건의 진정한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폐 영향을 받아 우리는 질적인 일을 양적인 일로 쉽게 재단하여 무의식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예컨대, “너는 따귀 한 대만 맞았잖아, 나는 다섯 대나 맞았어”라든지, “너는 일 년만 복무했잖아, 나는 삼 년이나 복무했어”라고 질적인 가치를 양화(量化)하여 비교한다. 누군가에게는 따귀 한 대가 열 대만큼 아플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일 년이 십 년보다 더 긴 세월일 수 있다. 
















’기업은 모든 임금노동자 노동을 수량적인 단위로 환원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은 양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질을 갖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등가 교환이다. 회사에 임금노동은 또 하나의 상품이며 상품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부등가적이다. 노동자에게 임금노동은 자신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전개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생명적 욕구를 갖고 자기 활동을 전개하는 한, 항상 양화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본의 내적 논리, 즉 이윤 추구라는 체제 안에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현재 우리는 “노동은 자원(HR: human resource)”이라는 은유에 의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은유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일을 보는 방식과 의도된 목적 때문에 이러한 은유가 우리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물질’이라는 존재론적 은유를 이용하여 노동이 양화될 수 있게 해 준다. 즉 평가되고, 점진적으로 소모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금전적 가치를 할당받게 해 준다. 그리고 은유를 통해서 우리는 시간과 노동을 다양한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노동은 자원’ 은유를 받아들이고, 이런 방식으로 정의된 자원의 비용은 낮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가정할 때 싼 노동은 싼 기름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 된다. 이 은유를 통한 인간 착취는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싼 노동 공급’을 자랑하는 나라들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 이 말은 중립적으로 들리는 경제적 언명이면서도 인간 퇴락의 실재를 은폐하고 있다. 이 은유를 맹목적으로 수용한다면 ‘진보’된 사회의 의미 없는 생산직 또는 사무직은 실제 노예처럼 퇴락한다.‘ 
















화폐로 인해 사용 가치가 교환 가치로 전환되었다면, 화폐는 교환 가치에서 기원했을까? 화폐 기원을 인류 교환 성향에서 찾은 학자가 애덤 스미스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초기 사회 사람들은 분업으로 자신이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를 직접 서로 교환했다. 그렇지만 어떨 때는 내가 생산한 상품을 아무도 원하지 않거나, 반대로 내게 필요한 상품을 누구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아서 물물교환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자 교환의 매개수단을 생각해 냈다. 사회가 더 복잡해지자 사람들은 가치가 있다고 널리 인정된 금이나 은 등을 교환 매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더 복잡해져 사람들은 금과 은을 대행하는 지폐를 발명했고, 이는 통화 시스템이 발전하도록 이끌었다고 스미스는 추측했다. 
















화폐가 단지 교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이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 요즘도 여전히 우리는 가족과 친척, 친구 등 가까운 사이에는 금전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오랜 경험을 통해 가까운 사이의 돈 거래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망칠 수 있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화폐는 자연스럽지 않은 인간관계를 만든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화폐거래가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인간관계가 화폐 발달을 저지하기 때문이다. 친밀감이 높고 내적인 결속이 강한 공동체에서 화폐 거래는 어떤 어색함을 불러일으킨다. 공동체에 화폐가 침투하면 “공동체적 유대”가 “화폐적 인간관계”로 변해 갈등이 크게 일어난다. 개인이 화폐로 재화를 획득하는 일은 공동체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사회적 힘이 개인 사적인 힘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과거 사회는 화폐가 사회의 경제적, 도덕적 질서를 파괴한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화폐는 쉽게 발전할 수 없었다.
















화폐와는 서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시장의 기원도 흔히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개인이 가진 물물교환 성향에서 마을 장터가 생겼고, 마침내 교역 필연성으로 대외무역, 심지어 원거리 무역까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추론해 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순서는 거의 정반대로 뒤집어야 옳다. 시장 발생의 출발점은 마을 장터가 아니라 원거리 무역이다. 칼 폴라니는 유럽에서 19세기에 자신이 말하는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 산업혁명, 자본주의 출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계 어느 지역에도 원격지무역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시장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마을 장터보다는 원격지 무역 등 두 지역 사이의 필요에 의해 사용되고 형성되었다. 마을 장터는 대개 생계유지를 위한 물품이 거래되었기에 호혜적으로 영위되고, 화폐로 매개되는 좀 더 근대적 의미에서의 시장은 오히려 사치품이나 사회적 가치를 표현하는 물품이 거래되는 두 지역 사이에서 무역의 장에 존재했다.



마을 장터는 본질적으로 호혜적인 시장이지 경쟁적인 시장이 아니다. 마을 장터는 식량 공급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가격이 턱없이 치솟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조달될 수 있도록 교역을 통제해야 했다. ‘반면 원거리 무역은 외국 상인이 향신료나 소금에 절인 생선, 포도주 등과 같은 것을 관할했다. 무역은 일정한 이윤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먼 곳에서 대량의 물품을 한꺼번에 조달하는 도매상인이 지배한다. 따라서 마을 장터를 보호해야 할 입장에서 보면 원거리 무역을 가능한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 외부에서 온 상인들이 마을에 와서 직접 소매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자본은 변동성 위험 크기에 마을은 해체될 위협이 높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 삶을 지키고자 원거리 무역과 마을 장터 교역을 분리한 것이다. 수출 무역이 확장되어 자본 영향이 강해질수록 그러한 분리도 갈수록 더욱 엄격해졌다.’ 이러한 일은 자국 시장을 보호하고자 하는 현재의 국가 무역에서도 일반적이다.
















또한, 폴라니는 화폐를 교환 매개체로만 여기면, 스미스처럼 화폐 기원을 잘못 유추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폴라니는 화폐의 네 가지 기능을 논했다. 첫 번째 기능은 배상이나 공물, 선물, 종교적 제물, 납세 등에 해당하는 ‘책무 결제’다. 두 번째 기능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자금을 관리하고자 단위로서만 존재하는 ‘가격 척도’다. 세 번째 기능은 식량이나 가축, 보물과 같은 ‘부(富)의 비축’이다. 마지막 기능이 스미스가 말한 ‘교환 수단’이다. 화폐학자 필립 그리어슨은 화폐 기원을 첫 번째 기능인 ‘책무 결제’에서 찾았다. ‘신체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인명금(人命金, blood money)’이 화폐 시작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탈리오 법칙[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같은 손해만 가해자에게 요구해야지 그 이상을 원하면 안 된다는 보복 법칙]처럼 인류가 어떤 사건을 일관되게 처벌하거나 배상하고자 할 때 화폐적 사고가 처음 나타났다.‘ 
















화폐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고병권은 “19세기 이전 민중은 화폐와 상관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생존을 위해 시장에서 오직 노동력을 팔아서 얻은 화폐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만 화폐가 요구된다“며, 스미스 이론에 반박한다. ”각 개인은 살기 위해서 교환할 수밖에 없고, 교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폐와 같은 일반적인 교환 매체가 생겨난다는 애덤 스미스 주장은 실제 화폐 역사와 맞지 않는다.“ 천년 왕국 신라에도 화폐는 없었다. 당시 인구 600여만 명이 화폐 없이 잘 살 수 있었다면, 화폐 주요 기능이 교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용도가 아닐 수 있다. ’금속 제작과 수출을 잘하던 신라가 금속 화폐만큼은 아예 만든 적이 없었다. 996년 고려시대 접어들어 처음으로 금속화폐 제작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는 독자적으로 금속화폐를 만들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사실 신라가 화폐 제작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국가와 백성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는 세금인데, 통일신라시대 농민 세금은 쌀과 대두, 콩, 호두, 잣, 마, 포 등이었다. 생산력이 낮고 대다수 호구가 가난했던 당시 농민은 돈으로 거래할 잉여 소출이 없었을 것이다. 돈의 유통이 필요로 하지 않은 곳이 바로 신라였다.“ 
















고병권도 화폐 기원은 교환이 아니라 ‘책무 결재’ 기능, 특히 조세 징수 수단이었다고 본다. ‘화폐 발행이 국가 조세 징집과 서로 맞물려 있어, 화폐는 상인들 필요보다 국가 필요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화폐 조세는 평민이 화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팔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가 금속(화폐)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고병권은 자신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대 로마 사례를 보여준다. ‘로마 귀족들이 화폐 유통을 창안하여 평민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정해진 기일 안에 화폐로 세금을 내야 한다는 화폐 조세 때문에, 장터를 일반적인 물물교환의 장으로 활용하던 민중들도 “물건”이 아닌 “화폐”를 일부러 구하기 위해 시장에 물건을 들고 나와서 팔았다.’ 국가가 세금을 걷고자 화폐를 이용한 사례는 고대 뿐 아니라 근대까지 이어진다. ‘19세기 초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지역을 개발하고자 아프리카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과거처럼 노예제에 의존하는 일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제국주의 행정관들은 교묘한 속임수를 썼다. 아프리카인에게 세금을 현금으로 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대부분 아프리카인은 새로운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유럽인 고용주가 제공하는 임금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유럽인 고용주는 공공사업이든 민간사업이든 자신이 원하는 모든 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병권은 특히, 국가의 화폐 발행은 조세 수취가 목적이라고 밝힌다. ‘국가가 화폐를 발행할 경우, 그만큼 인플레이션 효과가 생겨나는데, 인플레이션은 민간 부분의 구매력을 감소시켜 정부가 그만큼 돈을 징수하는 효과를 낸다. 은행권 발행은 국가 조세 징집과 서로 맞물려 있어, 화폐는 상인들 필요보다 국가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화폐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은 상업이 아니라 국가장치의 유지비, 바로 세금이다.’ 이 같은 고병권 주장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설명이 있다. 먼저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물가 상승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가격을 인상하는 회사, 예컨대 석유 회사나 식료품 회사를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삼아 맹비난한다. 그렇지만 사실 인플레이션이란 물가 상승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는 양적 완화나 통화 팽창이 원래 정의(定義)다. 



또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고병권 설명은 인플레이션이 세금 징수 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이와 같은 주장을 했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정부는 자국 시민의 주요 재산 일부를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압수할 수 있다. 정부는 이 방법으로 단순한 압수뿐 아니라 독단적인 압수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다수는 궁핍해지고 일부는 사실상 부유해진다.” 화폐 발행이 인플레이션이나 세금과 어떠한 관계가 있기에 국가가 국민 돈을 몰래 뺐어갈 수 있다고 케인즈는 보았을까? ‘간접세, 즉 우리가 물건을 살 때마다 내는 부가가치세부터 얘기해보자. 화폐 발행으로 물가가 인상되면 당연히 국가의 부가가치세 수입 또한 상승한다. 또한 인플레이션으로 우리 임금이 오를 때마다 소득세 부담도 함께 늘어난다.
















인플레이션은 부의 재분배를 초래한다. 인플레이션은 새로 만들어진 돈을 제일 먼저 확보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들은 아직 오르지 않은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 반면 뒤늦게 그 돈을 손에 넣는 사람이나, 아예 그 돈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람은 피해자가 된다. 그들이 추가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시점이 되면 물건과 서비스 가격은 올라버린다. 제일 먼저 돈을 손에 넣는 사람은 국가와 은행, 대기업 관계자다.‘ ‘물가가 상승하면 기업 이익은 증가한다. 기업은 남의 돈을 빌려 원료와 기계설비, 노동력을 산다. 그래서 만든 물건을 판 금액으로 물건을 만드는 동안 빌린 돈을 갚기 마련이다. 물가가 계속 오를 때 상품을 만들어서 팔면 자동적으로 이익이 생긴다.’ ‘제일 마지막에 돈을 손에 넣는 사람들은 봉급생활자와 연금 수급자들이다. 인플레이션은 빈곤을 야기하는 한편 은행 시스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슈퍼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준다. 다수 희생 대가로 그들만이 이익을 보는 것이다.’ 















화폐 역사는 주어진 통화 공급량을 보다 더 확대하기 위한 대체수단을 지속적으로 개발했다. 17세기 전쟁이 심화되고 있을 때 서유럽 통치자들은 1년 내내 병사와 선원들을 먹이고 급료를 주고 물자를 댈 묘안이 필요했다. 영국에서 새로운 '신용 제도'인 국가 영구 채권을 창안했다. 이는 영국 정부가 일반인들에게 모집한 채권인데, 따로 정한 상환 기한이 없어서 이자를 무기한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정부가 돈을 빌리기는 하되 그것을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확실하게 이자를 갚기만 하면 되며, 따라서 이 이자 부담을 위한 소득원은 '조세'로 충분하다. 국가가 원하는 액수를 빌리되 그것을 갗을 필요가 없고, 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은 필요하면 시장에서 매각함으로써 되돌려받는 '신기한' 일이 가능해 진 것이다. 국가는 단지 세금으로 이자를 지불하면서 이자 부담이 누적되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재정 여건이 좋을 때마다 시장에서 이전 발행한 채권을 구입하여 소각"하는 신기한 제도를 만들어냈다. 『로빈슨 크루소』 저자 대니얼 디포가 설명한 대로, “신용 대출이 전쟁을 낳고 평화를 가져오면 군대를 일으키고 해군 장비를 갖추고 전투를 수행하며 도시를 포위한다. 그리고 한마디로 신용이 돈 자체보다 더 전쟁의 동력이라 불릴 만하다. 신용은 병사들이 급료를 받지 않고도 싸우게 하며 군대가 보급품이 없어도 행군하게 하고 요구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수백만 냥의 돈을 국고와 은행에 채운다.” 무한 신용은 무한 전쟁을 뜻한다.
















화폐와 신용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여러 정책에 의해 모습을 갖춘 것뿐이다. 근대 경제학은 마치 이러한 허구 상품들이 실제라고 우겨대는 억측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시작하지만, 폴라니는 이런 것들을 상품이라고 우기는 허구의 눈속임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경제에는 상당히 지속적인 발작이 한 번씩 - 아마도 5년이나 10년에는 꼭 한 번씩 - 벌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전의 절반 혹은 그 이하 소득으로 생존 게임을 벌여야 하며, 사람들 모두가 이러한 정도의 상황을 견뎌낼 유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자본주의는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폴라니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탄력성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릇될 뿐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믿었다.



폴라니가 강조하는 단어가 바로 ‘사회’다. “인간은 사회를 발견해야 한다. 사람들은 사회의 단결과 유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인간 삶에서 마음속 깊숙이 영혼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사회’라는 신전은 이제 파괴되었고 더럽혀졌다”라고 폴라니는 한탄한다. “우리 시대에 닥쳐온 이 황당한 자본주의 모순들을 극복해 나가는 작업은 오로지 사회, 즉 인간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포용력 있고 넘치는 통일체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폴라니 결론은 “전 지구 모든 나라의 보통 사람들이 경제를 정치에 복속시키고 지구 경제를 국제적 협력의 기초 위해서 재건하는 노력에 함께 매진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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