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란 이름 자체가 자유주의가 가장 열중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바로 자유다. 자유주의가 매력과 회복력을 겸비한 것으로 입증되어온 까닭은 무엇보다 인간 영혼에 아주 깊숙이 박혀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역사적으로 부상하고 전 세계에서 매력을 발휘해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유주의는 특히 임의적 통치, 부당한 불평등, 만연한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호소해왔다.



물론 자유주의는 자유를 향한 인간 갈망을 발견하지도 발명하지도 않았다. 리베르타스(libertas)는 먼 고대에 생긴 낱말이며, 자유를 지키고 실현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정치철학을 처음 시도할 때부터 주요한 목표였다. 서구 정치 전통의 근간을 이루는 문헌들은 특히 폭정의 충동과 주장을 어떻게 제약하느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폭정 유혹에서 벗어나는 핵심 방안으로 덕성 함양과 자치를 꼽았다. 특히 그리스인은 자치가 개인 차원에서부터 정치제 차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어느 차원에서든 절제, 지혜, 중용, 정의 같은 덕목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증진할 경우에만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달리 말해 자치라는 덕목이 시민들 영혼을 다스릴 경우에만 도시 자치가 가능하고, 시민권 자체를 법과 관습을 통해 덕성을 몸에 익히는 일종의 지속적인 습관들이기로 이해하는 도시에서만 개인들 자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은 파이데이아(paideia), 즉 덕성 교육을 폭정을 미연에 방지하고 시민 자유를 보호하는 주된 방안으로 강조했다.



그렇지만 이제 자유라는 단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해도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근대의 현저한 특징은 이 오래된 정치관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정치적 합의는 효력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유주의 뿌리는 사회 병리의 원천 – 즉 분쟁 근원이자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장애물 -으로 치부되기에 이른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 자유주의 토대를 놓은 사상가들의 주요 목표는 국내 평화를 위해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 종교와 사회 규범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안정과 번영을 증진하고 궁극적으로 개인 양심과 행동 자유를 증진할 것으로 그들은 내다보았다.



이처럼 덕성을 훈련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버팀목으로 – 따라서 폭정에서 벗어날 자유의 전제조건으로 – 여겨지던 것들이 근대 들어 압제나 임의성, 제한 원천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데카르트와 홉스는 비합리적인 관습과 검증되지 않은 전통(특히 종교적 믿음과 실천) 지배가 임의적인 통치와 비생산적인 내분의 원천이며, 따라서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정체의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각자 ‘사고실험’을 도입해 현재 관습과 전통을 교정하자고 제안했다. 달리 말라면, 사람들은 그들의 선천적 본질로 환원하는 – 각자 진정한 본성을 가리는 우연적 속성들을 개념상 벗겨내는 – ‘사고실험’을 통해 철학과 정치를 합리적이고 반성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행동을 인도하는 오래된 사회 규범과 관습을 대체할 수 있는 한층 개인주의적인 합리성에 자신감을 보였다. 설혹 합리성에서 이탈하는 사례가 생기더라도 중앙집권화된 정치국가의 법적 금지령과 제재로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뒤이어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잇따라 출현한 사상가들은 자유를 재규정한 이들의 기본적인 사상 혁명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이 규정한 자유는 기성 권위에서 해방되는 것, 임의적인 문화와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 학문적 발전과 경제 번영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 힘과 지배력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유주의가 흥기하고 승리하는 데에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다. 고전고대와 기독교 자유관을 약화시키고, 널리 퍼진 규범과 전통, 관행을 해체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을 우연한 출생 성분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국가를 개인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주 보호자로 재개념화할 필요가 있었다.



자유주의가 이런 사유와 실천의 혁명을 받아들인 것은 엄청난 도박이었다. 다시 말해 기존 철학 전통과 종교, 사회 규범을 뒤집고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를 도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자유를 추구하고 또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 도박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성공을 거두었다. 자유주의 도래에 힘입어 무지몽매한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인류가 어둠에서 벗어나 억압과 불평등을 극복하고, 군주정과 귀족정이 쇠퇴하고, 번영이 이루어지고, 기술이 발전하며, 지속적으로 진보하는 시대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종교전쟁을 중단시키고, 관용과 평등 시대를 열고, 오늘날 세계화로 정점에 이른 개인 자유 영역과 사회적 상호작용 영역을 확대하고, 성차별주의, 인종주의, 식민주의, 이성애 정상주의를 비롯해 사람들을 갈라놓고 비하하고 차별하는, 용납할 수 없는 온갖 편견에 계속 승리를 거두는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자유주의 성공 자체가 현재 자유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요인이 자유주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을 가능성을 성찰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위협 요인의 잠재력은 자유주의의 근본적인 성격에서,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주의 강점(특히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교정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계속해서 진보하고 좋아진다는 믿음)에서 생겨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는 자신 최대 약점을, 심지어 스스로 초래하는 쇠퇴마저 대체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현시대 병폐가 무엇이든, 자유주의 해법을 더욱 완벽하게 적용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다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병폐 중 하나가 사회와 시민을 좀먹는 자기이익이다. 고대의 덕성 의존을 극복하려는 치료법에서 생겨난 이 병폐는,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과 제도에서 갈수록 뚜렷하게 드러날 뿐 아니라 자유주의 정치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자기이익은 공동선에 호소하는 모든 주장을 무력화하여 일종의 제로섬 게임 사고방식을 유도한다. 그 결과 시민들은 사적이고 대체로 물질적인 관심사에 점점 집착하다가 전국 규모로 양극화된다.



이와 비슷하게 권위적인 문화로부터 개인을 해방할 수 있다는 ‘치료법’은 사회적 아노미를 초래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부득이 법적 교정책, 경찰 통제와 감시를 확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회 규범과 예절이 약해졌거니와 인성을 강조하는 견해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어온 까닭에, 오늘날 전국에서 점점 더 많은 학구들이 학교에 감시 카메라(사후 처벌을 유발하는 익명 감독성)를 설치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가장 근본적으로 보면 자유주의 제도에 특정한 지향성과 특색을 부여하는 인간학적 가정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인간학적 개인주의와 주의주의(主意主義)적 개념이다. 주의주의 이념 – 개인의 규제받지 않는 자율적 선택 -을 정치 토대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처음으로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원형적 자유주의 입장에서 군주정을 변호한 토머스 홉스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이런 취약한 조건에서의 삶이 ‘추하고 잔인하고 짧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들은 합리적인 자기이익에 따라 주권자로부터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 자연권을 대부분 포기한다. 정당성은 사람들 동의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자유주의는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는 토대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경제학 강의가 인간을 그저 효용을 극대화하는 개별 행위자로 기술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끼쳐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헌신을 피하고 유연한 관계와 유대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친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정치적, 경제적 관계만 대체 가능하고 끊임없이 재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장소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종교와의 관계를 막론하고 모든 관계가 그러하다. 자유주의는 느슨한 연계를 조장한다.



자유주의가 이해하는 자유는 실정법 제약을 받지 않는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태다. 이 자유 개념은 지난날 이론에 지나지 않았던 상상 속 자연상태를 실제로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 선천적 개인주의 이론이 점점 더 현실이 되는 세계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그 세계는 법과 정치, 경제, 사회라는 구조물 보호를 받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자율성 상태에서 살아가며, 그 상태에서는 법을 시행하고 그에 상응해 국가 역할을 확대하는 방법으로 이른바 자연적 인간 조건의 위협적인 무질서를 통제하고 억누른다.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해방되는(그리하여 느슨한 연계만 남는) 한편 자연을 이용하고 통제함에 따라, 자율적 자유 영역은 한없이 팽창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율성 영역을 더욱 완전하게 보호하려면 국가 역할을 더 확대할 수밖에 없다. 자율성 영역에서 자유를 누리려면 가족부터 교회까지, 학교부터 마을과 공동체까지, 비공식적이고 익숙한 기대와 규범으로 행동을 통제하는 모든 형태의 결사와 관계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이런 통제는 대체로 정치적인 통제가 아닌 문화적 통제였다. 법은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배우는 비공식적인 행동 기대치인 문화 규범만큼 포괄적이지 않았고, 대체로 문화 규범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개인들이 이런 결사에서 해방됨에 따라 실정법을 통해 그들 행동을 규제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 그와 동시에 사회 규범은 권위를 잃어가면서 갈수록 과거의 임의적이고 억압적인 잔재로 느껴진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뿌리 뽑아야 할 잔재인 것이다.



자유주의는 결국 두 가지 존재론적 요소, 즉 해방된 개인과 통제하는 국가에 이른다. 홉스는 <리바이던>에서 이 두 실체를 완벽하게 묘사했다. 국가는 오로지 자율적인 개인들로만 구성되고, 이 개인들은 국가에 의해 ‘억제’된다. 개인과 국가는 존재론적으로 가장 상위에 있는 두 가지 요소를 나타낸다. 오늘날 세계에서는 과거에 대한 존중과 미래에 대한 의무가 즉각적인 만족 추구로 대체되고 있다.



예컨대 안정적인 평생 결혼생활의 규범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개인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다양한 합의로 대체된다. 자녀는 갈수록 개인 자유를 제한하는 원인으로 간주되며, 이런 시각은 원하면 낙태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자유주의 약속을 강화한다. 그 결과 선진 세계 전반에서 출생률이 감소한다. 경제 영역에서는 대개 당장 이익을 내라는 끊임없는 요구에 쫓겨 단기 수익을 올리려는 충동이 투자와 신탁을 대체한다.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지구의 풍부한 자원을 단기적 시각으로 착취하는 것이 우리 생득권이 된다. 설령 훗날 우리 자녀들에게 표토와 식수 같은 자원이 부족해질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활동을 규제하는 일은 실정법을 시행하는 국가 소관으로 치부되지 문화 규범의 산물인 교양 있는 자치 결과로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실현을 추구하고 갈망 충족을 위해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이들에게, 언제나 가속되는 경제성장과 사회에 만연한 소비가 필요하다. 자유주의 사회는 경제성장이 둔화될 경우 여간해서는 생존하기 어렵고, 경제성장이 얼마간이라도 멈추거나 역행할 경우 무너질 것이다. 이렇게 인간 목적에 무관심한 – ‘좋은’보다 ‘권리’를 강조하는 – 사람들의 유일한 목표이자 명분은 자유주의적 인간, 스스로를 형성하고 표현하는 개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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