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본 이동과 축적이라는 덫에 딱 걸렸다. 게다가 자본 축적은 화폐로 인해 더욱 심화된다. 그렇다면 화폐란 무엇일까?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부(富)의 모든 형식 중에서 오직 화폐만이 정해진 한계가 없다며, 자본 축적의 부조리를 생생한 비유로 설명한다. “궁전 다섯 개를 짓기 원하는 왕자도 궁전 5,000개 짓는 일에는 망설일 것이다."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화폐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최초로 구분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실물에 대한 인간 욕망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옷이 만 벌이 있다면 아무리 사치스러운 사람도 부담을 느낄 것이다. 매일 하나씩만 갈아입어도 3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릴 테니 말이다. 배고플 때 죽 한 그릇이 배부를 때 산해진미보다 나은 법이다(사용가치). 하지만 화폐 축적에는 한정이 없다. 1억 원이 있으면 10억 원을 욕망하고, 10억 원이 있으면 100억 원을 욕망한다. 숫자에는 끝이 없기에 화폐에 대한 욕망도 끝이 없다(교환가치). 이것이 화폐 마술이다. 이 때문에 어느 새인가 사람들은 부(富)가 단지 화폐 축적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본말이 전도되며, 사람들은 악다구니를 쓰면서 돈에 환장하게 된다. 하지만 실물의 존재(사용가치)와 화폐의 존재(교환가치)는 엄연히 다르다.‘
여러 생산물이 화폐로 비교된다고 할 때, 방법은 질적인 사용가치가 아니라 양으로 비교된 교환가치다. 화폐로 인해서 질적 가치가 양적 가치로 변화한다. 사실 서로 다른 상품을 질(質)과 상관없이 양(量)으로 비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상품의 “등가형태”란 무엇인가라고 마르크스가 『자본』 첫머리에서 물었을 때, 그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거기에 응축시킨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종다양한 물건이 양으로 비교될 수 있다는 점은, 곧 질적으로 동등하다고 여기는 것인데 이는 사실일 수 없다. 이러한 가정은 물건의 진정한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폐 영향을 받아 우리는 질적인 일을 양적인 일로 쉽게 재단하여 무의식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예컨대, “너는 따귀 한 대만 맞았잖아, 나는 다섯 대나 맞았어”라든지, “너는 일 년만 복무했잖아, 나는 삼 년이나 복무했어”라고 질적인 가치를 양화(量化)하여 비교한다. 누군가에게는 따귀 한 대가 열 대만큼 아플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일 년이 십 년보다 더 긴 세월일 수 있다.
’기업은 모든 임금노동자 노동을 수량적인 단위로 환원한다. 하지만 노동자의 구체적인 노동은 양으로 환원될 수 없는 질을 갖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등가 교환이다. 회사에 임금노동은 또 하나의 상품이며 상품으로 환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자본과 임금노동의 교환은 부등가적이다. 노동자에게 임금노동은 자신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전개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생명적 욕구를 갖고 자기 활동을 전개하는 한, 항상 양화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본의 내적 논리, 즉 이윤 추구라는 체제 안에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현재 우리는 “노동은 자원(HR: human resource)”이라는 은유에 의해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은유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일을 보는 방식과 의도된 목적 때문에 이러한 은유가 우리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물질’이라는 존재론적 은유를 이용하여 노동이 양화될 수 있게 해 준다. 즉 평가되고, 점진적으로 소모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금전적 가치를 할당받게 해 준다. 그리고 은유를 통해서 우리는 시간과 노동을 다양한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게 된다.
‘노동은 자원’ 은유를 받아들이고, 이런 방식으로 정의된 자원의 비용은 낮게 유지되어야 한다고 가정할 때 싼 노동은 싼 기름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이 된다. 이 은유를 통한 인간 착취는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싼 노동 공급’을 자랑하는 나라들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 이 말은 중립적으로 들리는 경제적 언명이면서도 인간 퇴락의 실재를 은폐하고 있다. 이 은유를 맹목적으로 수용한다면 ‘진보’된 사회의 의미 없는 생산직 또는 사무직은 실제 노예처럼 퇴락한다.‘
화폐로 인해 사용 가치가 교환 가치로 전환되었다면, 화폐는 교환 가치에서 기원했을까? 화폐 기원을 인류 교환 성향에서 찾은 학자가 애덤 스미스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초기 사회 사람들은 분업으로 자신이 생산한 상품과 서비스를 직접 서로 교환했다. 그렇지만 어떨 때는 내가 생산한 상품을 아무도 원하지 않거나, 반대로 내게 필요한 상품을 누구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아서 물물교환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자 교환의 매개수단을 생각해 냈다. 사회가 더 복잡해지자 사람들은 가치가 있다고 널리 인정된 금이나 은 등을 교환 매개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제가 더 복잡해져 사람들은 금과 은을 대행하는 지폐를 발명했고, 이는 통화 시스템이 발전하도록 이끌었다고 스미스는 추측했다.
화폐가 단지 교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이처럼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 요즘도 여전히 우리는 가족과 친척, 친구 등 가까운 사이에는 금전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오랜 경험을 통해 가까운 사이의 돈 거래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망칠 수 있단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화폐는 자연스럽지 않은 인간관계를 만든다. ‘가족이나 친구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화폐거래가 잘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런 인간관계가 화폐 발달을 저지하기 때문이다. 친밀감이 높고 내적인 결속이 강한 공동체에서 화폐 거래는 어떤 어색함을 불러일으킨다. 공동체에 화폐가 침투하면 “공동체적 유대”가 “화폐적 인간관계”로 변해 갈등이 크게 일어난다. 개인이 화폐로 재화를 획득하는 일은 공동체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사회적 힘이 개인 사적인 힘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과거 사회는 화폐가 사회의 경제적, 도덕적 질서를 파괴한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화폐는 쉽게 발전할 수 없었다.
화폐와는 서로 떼어내어 생각할 수 없는 시장의 기원도 흔히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개인이 가진 물물교환 성향에서 마을 장터가 생겼고, 마침내 교역 필연성으로 대외무역, 심지어 원거리 무역까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추론해 나간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 순서는 거의 정반대로 뒤집어야 옳다. 시장 발생의 출발점은 마을 장터가 아니라 원거리 무역이다. 칼 폴라니는 유럽에서 19세기에 자신이 말하는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 산업혁명, 자본주의 출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계 어느 지역에도 원격지무역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시장관계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마을 장터보다는 원격지 무역 등 두 지역 사이의 필요에 의해 사용되고 형성되었다. 마을 장터는 대개 생계유지를 위한 물품이 거래되었기에 호혜적으로 영위되고, 화폐로 매개되는 좀 더 근대적 의미에서의 시장은 오히려 사치품이나 사회적 가치를 표현하는 물품이 거래되는 두 지역 사이에서 무역의 장에 존재했다.
마을 장터는 본질적으로 호혜적인 시장이지 경쟁적인 시장이 아니다. 마을 장터는 식량 공급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가격이 턱없이 치솟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조달될 수 있도록 교역을 통제해야 했다. ‘반면 원거리 무역은 외국 상인이 향신료나 소금에 절인 생선, 포도주 등과 같은 것을 관할했다. 무역은 일정한 이윤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먼 곳에서 대량의 물품을 한꺼번에 조달하는 도매상인이 지배한다. 따라서 마을 장터를 보호해야 할 입장에서 보면 원거리 무역을 가능한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 외부에서 온 상인들이 마을에 와서 직접 소매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자본은 변동성 위험 크기에 마을은 해체될 위협이 높다. 마을 주민들은 자신 삶을 지키고자 원거리 무역과 마을 장터 교역을 분리한 것이다. 수출 무역이 확장되어 자본 영향이 강해질수록 그러한 분리도 갈수록 더욱 엄격해졌다.’ 이러한 일은 자국 시장을 보호하고자 하는 현재의 국가 무역에서도 일반적이다.
또한, 폴라니는 화폐를 교환 매개체로만 여기면, 스미스처럼 화폐 기원을 잘못 유추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폴라니는 화폐의 네 가지 기능을 논했다. 첫 번째 기능은 배상이나 공물, 선물, 종교적 제물, 납세 등에 해당하는 ‘책무 결제’다. 두 번째 기능은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자금을 관리하고자 단위로서만 존재하는 ‘가격 척도’다. 세 번째 기능은 식량이나 가축, 보물과 같은 ‘부(富)의 비축’이다. 마지막 기능이 스미스가 말한 ‘교환 수단’이다. 화폐학자 필립 그리어슨은 화폐 기원을 첫 번째 기능인 ‘책무 결제’에서 찾았다. ‘신체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인명금(人命金, blood money)’이 화폐 시작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탈리오 법칙[피해자가 입은 손해에 같은 손해만 가해자에게 요구해야지 그 이상을 원하면 안 된다는 보복 법칙]처럼 인류가 어떤 사건을 일관되게 처벌하거나 배상하고자 할 때 화폐적 사고가 처음 나타났다.‘
화폐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고병권은 “19세기 이전 민중은 화폐와 상관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생존을 위해 시장에서 오직 노동력을 팔아서 얻은 화폐로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만 화폐가 요구된다“며, 스미스 이론에 반박한다. ”각 개인은 살기 위해서 교환할 수밖에 없고, 교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화폐와 같은 일반적인 교환 매체가 생겨난다는 애덤 스미스 주장은 실제 화폐 역사와 맞지 않는다.“ 천년 왕국 신라에도 화폐는 없었다. 당시 인구 600여만 명이 화폐 없이 잘 살 수 있었다면, 화폐 주요 기능이 교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용도가 아닐 수 있다. ’금속 제작과 수출을 잘하던 신라가 금속 화폐만큼은 아예 만든 적이 없었다. 996년 고려시대 접어들어 처음으로 금속화폐 제작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한반도에서는 독자적으로 금속화폐를 만들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사실 신라가 화폐 제작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국가와 백성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는 세금인데, 통일신라시대 농민 세금은 쌀과 대두, 콩, 호두, 잣, 마, 포 등이었다. 생산력이 낮고 대다수 호구가 가난했던 당시 농민은 돈으로 거래할 잉여 소출이 없었을 것이다. 돈의 유통이 필요로 하지 않은 곳이 바로 신라였다.“
고병권도 화폐 기원은 교환이 아니라 ‘책무 결재’ 기능, 특히 조세 징수 수단이었다고 본다. ‘화폐 발행이 국가 조세 징집과 서로 맞물려 있어, 화폐는 상인들 필요보다 국가 필요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화폐 조세는 평민이 화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팔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국가가 금속(화폐)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고병권은 자신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대 로마 사례를 보여준다. ‘로마 귀족들이 화폐 유통을 창안하여 평민을 노예로 전락시켰다. 정해진 기일 안에 화폐로 세금을 내야 한다는 화폐 조세 때문에, 장터를 일반적인 물물교환의 장으로 활용하던 민중들도 “물건”이 아닌 “화폐”를 일부러 구하기 위해 시장에 물건을 들고 나와서 팔았다.’ 국가가 세금을 걷고자 화폐를 이용한 사례는 고대 뿐 아니라 근대까지 이어진다. ‘19세기 초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지역을 개발하고자 아프리카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과거처럼 노예제에 의존하는 일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에 제국주의 행정관들은 교묘한 속임수를 썼다. 아프리카인에게 세금을 현금으로 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대부분 아프리카인은 새로운 세금을 납부하기 위해 유럽인 고용주가 제공하는 임금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유럽인 고용주는 공공사업이든 민간사업이든 자신이 원하는 모든 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고병권은 특히, 국가의 화폐 발행은 조세 수취가 목적이라고 밝힌다. ‘국가가 화폐를 발행할 경우, 그만큼 인플레이션 효과가 생겨나는데, 인플레이션은 민간 부분의 구매력을 감소시켜 정부가 그만큼 돈을 징수하는 효과를 낸다. 은행권 발행은 국가 조세 징집과 서로 맞물려 있어, 화폐는 상인들 필요보다 국가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화폐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은 상업이 아니라 국가장치의 유지비, 바로 세금이다.’ 이 같은 고병권 주장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두 가지 설명이 있다. 먼저 우리는 인플레이션을 물가 상승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가격을 인상하는 회사, 예컨대 석유 회사나 식료품 회사를 인플레이션 주범으로 삼아 맹비난한다. 그렇지만 사실 인플레이션이란 물가 상승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 되는 양적 완화나 통화 팽창이 원래 정의(定義)다.
또한,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고병권 설명은 인플레이션이 세금 징수 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이와 같은 주장을 했다.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 정부는 자국 시민의 주요 재산 일부를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압수할 수 있다. 정부는 이 방법으로 단순한 압수뿐 아니라 독단적인 압수도 감행한다. 이 과정에서 다수는 궁핍해지고 일부는 사실상 부유해진다.” 화폐 발행이 인플레이션이나 세금과 어떠한 관계가 있기에 국가가 국민 돈을 몰래 뺐어갈 수 있다고 케인즈는 보았을까? ‘간접세, 즉 우리가 물건을 살 때마다 내는 부가가치세부터 얘기해보자. 화폐 발행으로 물가가 인상되면 당연히 국가의 부가가치세 수입 또한 상승한다. 또한 인플레이션으로 우리 임금이 오를 때마다 소득세 부담도 함께 늘어난다.
인플레이션은 부의 재분배를 초래한다. 인플레이션은 새로 만들어진 돈을 제일 먼저 확보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들은 아직 오르지 않은 가격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 반면 뒤늦게 그 돈을 손에 넣는 사람이나, 아예 그 돈을 손에 넣을 수 없는 사람은 피해자가 된다. 그들이 추가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시점이 되면 물건과 서비스 가격은 올라버린다. 제일 먼저 돈을 손에 넣는 사람은 국가와 은행, 대기업 관계자다.‘ ‘물가가 상승하면 기업 이익은 증가한다. 기업은 남의 돈을 빌려 원료와 기계설비, 노동력을 산다. 그래서 만든 물건을 판 금액으로 물건을 만드는 동안 빌린 돈을 갚기 마련이다. 물가가 계속 오를 때 상품을 만들어서 팔면 자동적으로 이익이 생긴다.’ ‘제일 마지막에 돈을 손에 넣는 사람들은 봉급생활자와 연금 수급자들이다. 인플레이션은 빈곤을 야기하는 한편 은행 시스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슈퍼 부자들을 더 부자로 만들어준다. 다수 희생 대가로 그들만이 이익을 보는 것이다.’
화폐 역사는 주어진 통화 공급량을 보다 더 확대하기 위한 대체수단을 지속적으로 개발했다. 17세기 전쟁이 심화되고 있을 때 서유럽 통치자들은 1년 내내 병사와 선원들을 먹이고 급료를 주고 물자를 댈 묘안이 필요했다. 영국에서 새로운 '신용 제도'인 국가 영구 채권을 창안했다. 이는 영국 정부가 일반인들에게 모집한 채권인데, 따로 정한 상환 기한이 없어서 이자를 무기한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 이 말은 곧 정부가 돈을 빌리기는 하되 그것을 다시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확실하게 이자를 갚기만 하면 되며, 따라서 이 이자 부담을 위한 소득원은 '조세'로 충분하다. 국가가 원하는 액수를 빌리되 그것을 갗을 필요가 없고, 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은 필요하면 시장에서 매각함으로써 되돌려받는 '신기한' 일이 가능해 진 것이다. 국가는 단지 세금으로 이자를 지불하면서 이자 부담이 누적되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재정 여건이 좋을 때마다 시장에서 이전 발행한 채권을 구입하여 소각"하는 신기한 제도를 만들어냈다. 『로빈슨 크루소』 저자 대니얼 디포가 설명한 대로, “신용 대출이 전쟁을 낳고 평화를 가져오면 군대를 일으키고 해군 장비를 갖추고 전투를 수행하며 도시를 포위한다. 그리고 한마디로 신용이 돈 자체보다 더 전쟁의 동력이라 불릴 만하다. 신용은 병사들이 급료를 받지 않고도 싸우게 하며 군대가 보급품이 없어도 행군하게 하고 요구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수백만 냥의 돈을 국고와 은행에 채운다.” 무한 신용은 무한 전쟁을 뜻한다.
화폐와 신용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여러 정책에 의해 모습을 갖춘 것뿐이다. 근대 경제학은 마치 이러한 허구 상품들이 실제라고 우겨대는 억측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시작하지만, 폴라니는 이런 것들을 상품이라고 우기는 허구의 눈속임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경제에는 상당히 지속적인 발작이 한 번씩 - 아마도 5년이나 10년에는 꼭 한 번씩 - 벌어지는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이전의 절반 혹은 그 이하 소득으로 생존 게임을 벌여야 하며, 사람들 모두가 이러한 정도의 상황을 견뎌낼 유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자본주의는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폴라니는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탄력성을 가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그릇될 뿐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믿었다.
폴라니가 강조하는 단어가 바로 ‘사회’다. “인간은 사회를 발견해야 한다. 사람들은 사회의 단결과 유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인간 삶에서 마음속 깊숙이 영혼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사회’라는 신전은 이제 파괴되었고 더럽혀졌다”라고 폴라니는 한탄한다. “우리 시대에 닥쳐온 이 황당한 자본주의 모순들을 극복해 나가는 작업은 오로지 사회, 즉 인간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포용력 있고 넘치는 통일체가 무엇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발견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폴라니 결론은 “전 지구 모든 나라의 보통 사람들이 경제를 정치에 복속시키고 지구 경제를 국제적 협력의 기초 위해서 재건하는 노력에 함께 매진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