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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학사상사 - 플라톤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인류사를 움직인 탐구정신의 향연
존 헨리 지음, 노태복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5월
평점 :
코페르니쿠스 덕분에 ‘태양은 사라지고, 지구든 어떤 이의 지혜든 어디에서 그것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단지 천문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가치관을 이루는 바탕이 ‘모두 조각 나고 일관성이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런 태도는 르네상스 이후의 회의주의를 부채질했다. 이와 달리 뉴턴 업적은 낙관주의를 고취했다. 당시에는 뉴턴 방법을 과학 뿐 아니라 도덕철학, 정치 그리고 경제에도 적용하여 사회가 과학적 노선에 따라 운영될 수도 있다는 믿음이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뉴턴이 <광학> 말미에 쓴 다음 구절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만약 자연철학의 모든 분야가 이 방법을 추구하여 마침내 완벽해진다면 도덕철학의 경계 또한 확장될 것이다.’ pp. 274-275.
특히 18세기 영국에서 이른바 ‘악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그런 점이 명백히 드러났다. 세상에는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였다. 만약 신이 선하고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어째서 신은 이토록 큰 고통을 허용했는가? 왜 신은 고통이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초대 교부 시절부터 이 문제를 풀 흔한 해법은 단지 우리는 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즉 “신은 불가사의 한 방식으로 경이로운 일들을 행하신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18세기 사상가들처럼 신이 이성적 계획에 따라 세상을 만들었고 신의 계획을 뉴턴이 이성을 사용하여 발견해냈다고 가정하는 한 허용될 수 없다. 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이런 가정과 양립할 수 없을 터이다. 뉴턴의 발견 그리고 이 발견 위에 세워진 자연신학의 전반적인 요점은 뉴턴이 실제로 신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그것을 수학적 증명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8세기 사상가들은 악의 문제에 답하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다. 이들 추론은 다음과 같았다.
. 신은 지극히 그리고 완전히 선하다. 정의상 신은 악을 행할 수 없다.
. 신은 뉴턴이 밝힌 대로 이성, 논리, 수학 등의 법칙에 따라 우주를 창조했다.
. 이 두 가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다. 만약 상반된다면 신은 전능하기에 이를 미리 알았을 것이며, 신의 선함으로 인해 이성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기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게다가 만약 이성의 법칙으로 인해 신이 하나보다 더 많은 종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면, 신은 선한 존재이기에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세계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이다.
보수적인 영국 사상가 대다수에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점은 만약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가운데서 최상이라면 이 세계를 변화시킬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악과 고통은 신의 계획의 일부이기에 전체 체계에 어떻게든 이득임이 틀림없다. pp. 322-324.
신이 운동 법칙으로 물리적 세계를 창조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스스로 작동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신은 인간 세계를 (인력이나 척력이라는 자연법칙과 유사한) 사회적 상호작용 법칙으로 창조하였고 이 법칙에 따라 가장 조화로운 사회 질서가 마련되었다.
이 모든 사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자유방임이라는 근본 원리에 바탕을 둔 사회정치 철학이었다. 이는 비간섭 원리로서, 세상의 체제는 자율적이기에 더 낫게 하려고 시도해보았자 더 나빠질, 어쩌면 심각하게 나빠질 뿐이므로 그대로 놔두라는 권고다.
당시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텍스트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핵심 인물이었던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가장 번영한 사회는 (자기애를 추구하고 이성에 의해 조절되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에서 비롯되며, 국가 개입은 부자연스럽기에 사회에 불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스미스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세상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인간 사회가 (신이 창조한) 뉴턴의 우주처럼 원만히 작동되도록 신은 인간 본성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주장하기를, 사회의 작동 원리에서는 개인 이익 추구 원리와 더불어 수요와 공급의 경제법칙이 만유인력과 운동의 법칙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 결과 정치철학과 경제학에서 자유방임주의 이론들이 생겨났다. 정치경제학 법칙들이 – 자연의 법칙과 똑같이 – 신에 의해 확립된 이상 그 법칙들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틀림없이 좋은 것이라고 가정했기에(알렉산더 포프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옳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미스와 후대 정치경제학자들은 이 법칙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노선, 따라서 최소한의 정치적 개입을 옹호했다. 자유방임주의는 바로 그런 의미였다.
이런 정치경제학 전통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중 한 명은 과학사의 관점에서 보건대 영국 국교회 성직자 토머스 맬서스다. 맬서는 1798년 <인구론>을 출간했다. 이 책은 당시 엘리자베스 구빈법을 개혁하려던 윌리엄 피트 총리에게 그 계획을 중단하라고 쓴 일종의 경고장이었다. 그 무렵 아일랜드에 닥친 기근으로 아일랜드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영국으로 건너왔는데 말 그대로 거리에서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빈민 구제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권좌에 있던 시기(1558~1603)에 도입된 법률에 따라 교구 신도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기에 교구 신도로 인정받지 못한 이주민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피트는 구빈법을 개혁하여 이런 상황을 바꾸고자 했다.
하지만 맬서스는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2, 4, 8, 16, 32…) 식량은 고작해야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2, 4, 6, 8, 10…)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식량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인구를 적당한 선에서 유지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결론 내렸다. 새로운 구빈법은 더 많은 사람이 생존하고 번식하게 함으로써 자연의 균형을 어지럽힐 터였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 수가 더 증가하게 되어 새로운 구빈법으로 조달될 자원으로도 대처할 수 없게 되면 현재보다 더 많은 고통과 죽음이 뒤따를 것이다. 맬서스는 이렇게 썼다. ‘자연의 보편적 법칙으로서 인간은 어떤 이성적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식량 부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기에서 애덤 스미스와 토머스 맬서스의 이런 모든 견해들은 특정 사회 계급에 이바지하는 착취적인 자본가와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을 정당화하는 냉소적인 입장인 듯하다. 확실히 런던에 살던 카를 마르크스도 그렇게 보았다. 그가 보기에 이런 사고방식은 노동 계급에 반하는 부르주아의 음모였기에 그는 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에 맞서 봉기하라고 촉구했다.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썼듯이, 프롤레타리아는 속박 외에는 잃을 것이 없다.
하지만 물론 스미스나 맬서스는 자신을 프롤레타리아에 맞서는 음모 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자유방임적 정치경제학이 뉴턴의 물리학 체계에 대응하는 사회정치적 체계라고 진심으로 믿었을 뿐이다. 뉴턴이 물리계의 객관적 진리를 발견한 바로 그 방식으로, 그들은 사회를 원만하게 작동시키는 자연법칙을 발견했다고 여겼다. 자신이 주관적 도덕 및 정치 체계를 부과한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해 확립되고 객관적 도덕과 정치적 법률로 유지되는 정치 체계를 밝혀냈다고 믿은 것이다.
찰스 다윈은 맬서스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남긴 글을 보자. ‘1838년 10월, 체계적인 조사를 시작한 지 15개월 만에 나는 재미 삼아 우연히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은 데다 장기간에 걸친 동식물 관찰을 통해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생존 경쟁’을 이해할 바탕이 마련되어 있던 터라, 이런 상황에 유리한 종은 살아남고 불리한 종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런 과정의 결과 새로운 종이 생길 터이다. 드디어 내 연구의 바탕이 될 이론을 얻었다.’
따라서 다윈의 자연선택과 적자생존 원리에 직접적인 영감을 준 것은, 삼라만상은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며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자연’이 신의 뜻 일부라고 보는 자연신학 전통이었다. 이 사상이 뉴턴에게서 직접 나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이 사상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자신을 뉴턴주의자라고, 즉 뉴턴주의 사상을 정치경제학 분야에 발전시켰다고 여겼다. 또 한 가지 언급할 점으로, 자연적인 경제에 관한 이런 사고방식은 무신론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독실한 사람들, 심지어는 성직자들이 발전시켰다. pp. 326-330
기독교는 체계적인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는 다른 유일신 종교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속성에 관해 조사하고 탐구하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적절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는 이 두 종교의 신앙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대부분 율법 문제였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다.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또는 주어진 환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기대하는가?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초월적인 신의 개념을 한편에 두고, 신이면서 인간으로 온 예수 그리스도 개념을 다른 편에 두고서 이 둘을 조화시킬 필요 때문에, 완전히 상이한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이 질문들은 신의 속성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신성모독 여부와 무관하게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이면서 셋(성부와 성자, 성신)인 신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많은 이들에게 비합리적으로(또는 유일신 사상과 양립할 수 없다고) 비쳤는데, 이것은 어떻게 신이 초월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 있는지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서 등장한 문제의식이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체계적 신학이 기독교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신과 인간 관계의 속성 그리고 우리 관점으로는 더 중요하게도 신과 세계 관계를 논하지 않고서 신의 속성을 논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 곧 분명해졌다. 이런 까닭에 자연철학은 중세 기독교 신학의 긴밀한 동반자이자 시녀가 되었으며, 대학에서도 정규 과목으로 자리 잡았고 아울러 고급 학문을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필수적으로 먼저 공부해야 하는 과목이 되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물질계의 속성에 대한 질문은 그 문화에 별반 중요하지 않다고 보아 언제나 배제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지 신의 명령만이 아니라 신의 속성에 관한 것이었으며, 신의 속성은 피조물, 즉 물질계와 신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논의될 수 없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면서 인간으로 온 예수를 숭배하는 독특한 상황이기에 체계적인 신학을 발전시켜야 했으며, 그 결과 물질계 속성이 신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고 여기게 되었다.
과학과 종교는 오늘날 범주상 뚜렷이 구별되는 영역으로 여겨지며, 각각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둘 사이 양립할 수 없는 차이를 강조하는 책들은 완전히 세속적인 이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런 책의 저자들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에게 해가 된다는 세속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자면, 만약 선구적인 중세 사상가들(이들은 모두 신학자였다)이 과학을 기독교 신학에 부수적으로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면 서양 과학의 줄기찬 발전은 십중팔구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pp 95-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