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학사상사 - 플라톤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인류사를 움직인 탐구정신의 향연
존 헨리 지음, 노태복 옮김 / 책과함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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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데카르트는 당시 사람들에게 그처럼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신할 고대 플라톤 사상이 재발견 이후로 ‘유럽 사상의 위기’라는 인식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이상 진리의 계시자가 아님이 분명했는데, 지리학(서양 반대편에도 사람이 산다는 사실)과 천문학(천체의 변화, 달의 산 등)의 새로운 발견들이 이를 확인시켜주었다. 유럽 전역의 많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 혼란과 좌절에 빠졌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프랜시스 베이컨은 독자들에게 폰티우스(성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라고 나오는 인물)가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음을 상기시켰지만, 더 나아가 ‘그가 답을 내놓지는 못했다’는 점도 말했다. 17세기에도 사정은 같았다. 사람들은 무엇이 참인지를 아무도 알려줄 수 없으니 기다려보았자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회의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회의주의로 향하는 이런 경향은 르네상스 학자들이 회의주의가 고대인들에게도 유행했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 심해졌다. 실제로 일부 고대의 회의주자들은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다른 회의주의자들은 덜 허무주의적인 노선을 취해 현재의 지식 수준에서는 어떤 확고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정보나 증거가 모자라기에 더 많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그 결과 유럽 전역에 걸쳐 절망에 빠지거나 기존에 확립된 지식에 반대하는 심술 맞은 학자들은 회의주의로 돌아섰다. 옥스퍼드에서부터 파도바까지 탄식이 만연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그리고 웁살라에서 나폴리까지 이런 절규가 울려 퍼졌다. ‘오직 한 가지는 확실하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선구적인 세속 사상가들이 위기를 느낀 결과 생겨난 회의주의가 새로운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이런 회의주의적 비난을 모든 신조와 사상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기독교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후 곧이어 칼뱅주의 같은 경쟁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립으로 이어진 새로운 종교적 다원주의는 회의주의를 촉진시켰다. 한때는 오직 가톨릭교회만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대안들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그 무렵 유럽의 지적 문화에서 무신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중세에는 무신론 기미가 전혀 없었지만(이단이 있을망정 무신론은 없었다),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면 무신론이 처음으로 정통 사상가들에게 공격을 받을 정도로 표면화되었다(‘무신론’이라는 용어도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역사 기록에서 무신론자들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 매우 은밀하고 비밀스러웠다 – 정통 사상가들이 무신론을 공격한 것을 보면 당대에 무신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회의주의는 가장 큰 공공의 적이 되었다. 아무것도 확실하거나 신뢰할 수 없다는 사상을 골자로 하는 철학의 추종자들에게 어떻게 어떤 주장이 유효하다거나 어떤 결론이 참이라고 설득시키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백히 옳은 하나의 주장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런 주장을 내놓을 수 있다면 회의주의자들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테고,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부정하 수 없는 다른 주장들로 그말을 계속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데카르트가 첫 출간물인 <방법서설>을 내놓으며 목표로 한 일이 그런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가장 유명한 주장이자 아마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철학적 주장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코기토 에르소 슘)’는 그 자신, 즉 데카르트가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요점은 이것이 어떤 회의주의자도 부정할 수 없는 주장이라는 데 있다. 가장 반항적이고 허무주의적인 회의주의자라고 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순간 데카르트가 이긴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부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데카르트는 다음 단계로서, 우리가 마음속에 완전성에 관한 개념을 갖고 있음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 자신에게 왔을 리는 없는데,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경험으로 추상화시킨 것일 리도 없는데, 우리 경험에서 완전한 것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완전한 것을 보 적도 완전한 맛을 느낀 적도 없다. 완전성에 관한 개녕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떤 완전한 존재가 그것을 우리 마음에 심어놓았음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데카르트는 논쟁적인 주장 하나를 내놓는다. 이 완전한 존재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해보자. 실제로 존재하는 빠른 차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훨씬 더 빠르다고 짐작되는 차보다 더 낫다. 내가 여러분에게 포르셰 한 대를 선물하면서, ‘이것 말고 모든 면에서 포르셰보다 월등한 상상의 어떤 차를 가질 수도 있다’라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킨다면, 여러분은 당연히 포르셰를 갖겠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따라서 데카르트가 주장하듯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사소한 문제를 예외로 하고서 이 존재가 지극히 완전하다는 말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완전하지 않은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월등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런 발상은 완전한 존재에 관해 타당한 생각이 아니다. 여러분도 완전한 존재에 관해 타당하게 생각해보면, 데카르트가 주장하고 싶어하듯이, 그 존재는 반드시 실제로 존재함을 알게 될 것이다. pp. 226-230.



데카르트가 보기에 동물은 영혼, 즉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 생명 원리가 없다. 동물은 단지 복잡한 기계일 뿐이다. 그는 시계를 포함한 자동장치들도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영혼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동물의 자율 운동이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증거라고 본 아리스토텔레스 견해를 거부했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여전히 인간은 영혼이 있다고 믿었다. 인간 영혼의 주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 영혼은 이성의 자리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본능적으로 세계에 반응할 뿐인 동물과 달리) 자유의지가 있기에 우리 영혼은 몸으로 하여금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레스 코그니탄스(사유하는 영혼)와 레스 엑스텐사(연장된 물질계)의 구별은 많은 사상가가 보기에 너무 막연했다. 어떻게 비물질적인 사유적 실체가 물질적인 실체를 움직이게 할 수 있는가? 비물질적 영혼은 살로 된 죽은 몸을 밀쳐서 움직이게 만들 수 없다. 유령처럼 단지 어떤 물체에 닿으면 통과할 뿐이다. 데카르트로서는 애석하게도 그를 따르는 많은 추종자는 인간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우리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기계라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환상일 뿐이며 우리 모두 본능에 따라 반응할 뿐이다. 추종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창조하여 이런저런 모든 것을 움직이도록 했다. 하지만 그 후로 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신은 자연법칙을 세계에 부여하였고, 모든 것은 더 이상 신의 도움 없이도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이 세계 및 그 자연법칙들은 늘 존재했으며 신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쉽게 가정할 수 있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체계는 회의주의와 무신론을 물리치기 위해 ‘코키토’ 논증 및 신의 존재 여부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을 활용하여 마련되었지만, 거꾸로 무신론자들은 이를 도용하여 신과 영혼이 배제된, 전적으로 기계적인 체제로 바꾸어 버렸다. 지금은 번성하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유산 덕분에, 세속화된 세계에 사는 우리 대다수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믿고 있다.” pp. 24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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