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사상가들의 가정에 따르면 완전한 지식은 과거에 속한다. 최초 인간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담의 지혜는 이브와 함께 금단의 열매를 먹고 낙원에서 쫓겨난 후 차츰 잊혔다. 따라서 중세 사상가들은 진보에 대한 의식이 없었으며, 지식이란 과거 사람들이 알았던 것을 찾아내어 복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앞선 시기 사상가일수록 아담과 더 가깝기에 아담 지혜를 더 많이 기억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 사상가들은 스스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과거 사상가들을 연구했다.”<서양과학사상사>
















"1750년대에는 종교와 무관하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싹텄다. 예를 들어 사회적 변화를 생존 양식에 따라 수렵, 목축, 농경, 상업으로 구분하는 이른바 ‘네 단계 이론’도 이때 생겨났다. 이 이론은 허점이 많았으나 그리스도교와 별개로 역사적 단계를 구분한다는 관념은 탐험의 시대에 발견된 극히 다양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리하여 진보 관념이 각광을 받았다.



프란시스 베이컨도 진보 관념을 믿었다. ‘세계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므로 지난 시대는 언제나 고대다. 지금 우리 시대도 지나고 나면 곧 고대가 된다.’ 그는 어른이 아이보다 더 현명하듯 후대 사람들은 과거보다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한다고 보았다. 데카르트 역시 과학 발견에 힘입어 인간 건강이 ‘향상’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고대 사상과 현대 사상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놓고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책들의 싸움>에서 고대인의 우월함을 지지했다.



18세기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드 퐁트넬은 <고대인과 근대인에 관한 논쟁>에서 다섯 가지 놀랄 만한 근대적인 결론을 내린다. (1) 생물학적 견지에서 볼 때 고대인과 근대인은 차이가 없다. (2) 고학과 산업은 서로 의존적이므로 ‘진보는 누적적이다.’ 즉 근대인은 고대인을 능가한다. (3) 그렇다고 근대인이 고대인보다 더 똑똑한 것은 아니다. 단지 과거의 것, 축적된 지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할 뿐이다. (4) 시, 수사학, 예술에서 두 시대 차이는 없다. (5) 고대인에 대한 ‘비합리적 존경’은 진보에 걸림돌이 된다.



개성이 크게 발달하고, 예술이 활발하고, 소설이 성장하고,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많아졌는데도 인간의 자기 이해가 역사적으로 가장 큰 지적 실패이며 가장 성공하지 못한 탐구 분야라는 것은 놀라운 결론이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진행된 ‘내면 지향’이 보여주듯 그 실패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 ‘내면 지향’에 관한 지식은 과학처럼 누적되지 못한다. 그저 옛 것이 무너지고 새 것이 등장해 서로 대체될 따름이다. 플라톤은 우리를 오도했고 화이트헤드는 틀렸다. 생각의 역사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플라톤이 아니라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유산이다. 이 점은 무엇보다도 르네상스보다 초기 근대를 더 중요한 역사적 이행기로 보는 최근 역사 편찬의 양태로 확인된다. 서던이 말하듯 아리스토텔레스가 재발견된 1050~1250년 시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기였고 근대로 이어지는 고리였다. 그것은 2세기 뒤에 일어난 (플라톤의) 르네상스보다 훨씬 중요한 시기였다.



근년 들어 의식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어도, 또 자연과학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길을 제시했어도 자아는 여전히 정체가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과학은 ‘저기 바깥’ 세계에 관해서는 엄청난 성과를 올렸으나 우리의 가장 큰 관심거리인 우리 자신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준 게 없다. 자아가 모종의 두뇌 활동 – 전자나 원소의 활동일 수도 있다 –에서 비롯된다는 견해가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의식이나 자아에 관해 설명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자들이 의지할 마지막 관념을 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에서 모두 성공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제 플라톤적 관념인 ‘내적 자아’가 오류일 가능성 – 혹은 개연성 –을 직시해야 할 때가 아닐까? 내적 자아란 없다. 아무리 ‘안’을 들여다봐도 볼 것은 없다. 안정된 것도, 지속적인 것도, 우리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것도, 결론적인 것도 없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우리의 ‘내적’ 본성과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바깥, 즉 동물로서의 역할과 위치를 보는 편이 더 낫다. 존 그레이가 말했듯 ‘인간 세계를 바라보기 위한 좋은 창문은 수도원보다 동물원이다.’ 이 말은 역설이 아니다. 관점을 재조정하지 않는다면 현대의 모순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생각의 역사 1>















“인간이 진보를 이룩해 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인간은 마술과 의례에서 이성과 논리로, 경이로운 초자연에서 도구적 확신으로, 부분화된 무지에서 일반화된 지식으로, 신념에서 과학으로, 생존에서 안락으로, 질병에서 건강으로, 신비주의에서 유물론으로, 기계론적 결정에서 낙관주의적 확실성으로 전진해 갔다. 인간은 자신이 이룩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인 인간 등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살고 있다. 오늘날 우리 각자는 과거 로마의 어떤 황제보다도 더 큰 힘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그 힘을 선사한 이들이 바로 과학자들이고, 오늘날 그들 수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해 배출된 과학자 수보다 훨씬 많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인류는 재난이나 일시적인 방해물을 만나기야 하겠지만, 과학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궁극적 진리로 더 가까이 접근해 갈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 앞에 놓인 길은 더 큰 발전과 진보를 향한 길이 될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지난 수세기 이룩한 이러한 지식 축적의 원동력, 즉 과학은 일견 인간 활동 가운데 매우 독특한 것처럼 보인다. 과학은 객관적이다. 그것은 공정하고 객관적인 탐구방법과 증거에 기초한다. 과학자들은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같은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방법상 어떠한 오류도 없으면 그 이론은 살아남는다. 이 규칙은 엄격하게 적용된다. 과학이 자신 작업을 평가하는 기준에는 보편성이 있다. 결과가 반복적이고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오류가 없다면 이론은 살아남았다. 진리를 찾는 데는 특별한 변명거리가 필요치 않다.

 

 

과학적 탐구의 논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건 필연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것이다. 과학의 이러한 특징은 다른 분야에서라면 한 시기를 다른 시기와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거나, 어떤 문화적 표현을 다른 맥락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과학은 맥락상 한계를 갖고 있지 않다. 과학은 단지 진리를 찾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떤 진리를 말하는 것인가? 같은 진리일지라도 시대에 따라 달라 보였다. 물체를 인식하는 것은 눈이 아니라 뇌다. 신호 패턴은 뉴런 활성화시키는데, 각 뉴런은 제각기 특정한 신호를 인식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실재는 경험되기 이전에 이미 뇌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신호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것이다.

 

 

뇌는 무질서한 신호를 분류하고 재배열하고, 거부함으로써 시각적 질서를 부여한다. 실재는 뇌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다른 감각의 경우에도 기초적인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경험에 이러한 전제를 부과하는 것이 착시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매우 복잡한 수준의 모든 지각 형태가 수정된다. 한 번 더 비트겐슈타인을 인용하자면 ‘당신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는 것’이다.”<우주가 바뀌던 날 그들은 무엇을 했나>
















"과거 나는 ‘진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라다크는 내게 미래를 향하는 길이 꼭 하나가 아니라는 확신과 함께 커다란 힘과 희망을 주었다. 이전 나는 내가 보았던 여러 부정적 현상이 우리 영향력 밖에 있는 자연적 혹은 진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속한 산업문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그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기적 심성을 갖고 있어 생존을 위한 경쟁은 당연하며, 서로 돕는 사회는 유토피아적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가치관, 역사에 대한 이해, 사고유형 모두 산업사회형 인간의 세계관을 반영할 뿐이다. 애덤 스미스에서 프로이트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출신 주류 사상가는 자신이 속한 서구와 산업사회 경험을 보편화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 자신이 설명하는 특성이 산업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표상한다고 전제한다. 서구 문화 영향력이 유럽과 북미 대륙에서 세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서구문화 경험을 일반화하려는 경향은 거의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대부분 서양인은 무지와 질병, 끝없는 노역이 미개발 사회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개발도상국 사회에 나타나는 빈곤과 질병, 굶주림은 그러한 가정이 입증된 사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오늘날 제3세계 국가가 겪는 많은 사회문제는 주로 식민주의와 잘못된 개발의 결과물이다. 최근 국제부흥개발은행의 한 연구에 따르면 자유무역 시행을 통해 고도로 전문화된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는 그렇지 않은 나라에 비해 내전 강도가 대략 스무 배나 높다고 한다.

 

 

정반대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가로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 사고방식은 ‘인간 본성은 근본적으로 공격적이며 진화론적 투쟁 논리에 갇혀 있다’는 가정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사회의 구성 방법과 관련하여 이러한 시각이 내포하는 의미는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선과 악의 내재성을 믿건 안 믿건 인간 본성에 관한 우리 전제는 모든 정치적 이념의 기초가 되며, 결국 우리 삶을 지배하는 제도를 형성한다.

 

 

라다크에서 ‘진보’라 것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대지와 분리되고 이웃과도 분리되고 결국 자신에게서도 분리되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았다. 그렇게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이 서구 규범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유지해온 평온함을 잃게 된 것이다. 그런 모습에 나는 문화라는 것은 개인 특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 예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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