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개인은 시대사상인 문화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개인이 문화를 넘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길 요구한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개인은 자신 생각을 바꾸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에,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문화는 집단이나 사회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개인 노력만으로는 문화를 완전히 극복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사회는 개인에게 ‘관용’이라는 미덕을 요구한다.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다양성과 차이를 이해하며, 이에 대해 편견 없이 존중하라고 흔히 말한다. 이성애자는 동성애자를 관용하고, 기독교인은 무슬림을 관용하고, 지배 인종은 소수 인종을 관용하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관용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돌려버리는 일이다. 관용 담론은 불평등이나 사회적 억압과 같은 문제를 개인이나 집단 편견에서 비롯되는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 똘레랑스[관용] 전도사로 알려진 사회운동가 홍세화는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프랑스 사회의 유연성을 높게 평가하며, 이렇게 말한다. “똘레랑스는 역사의 교훈입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외면하며, 비타협보다 양보를, 처벌이나 축출보다 설득과 포용을, 홀로서기보다 연대를 지지하며, 힘의 투쟁보다 대화의 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권력의 강제에서 개인 자유와 권리를 보호합니다." 홍세화는 사회 문제를 똘레랑스라는 당시 새로운 문화로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인 접근은 한계가 있다. ‘모든 사회 문제에 정치·경제적 맥락을 도외시하고 우리 생활 방식과 생각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틈이 급격히 커지고 있는데도 관용 주장은 이런 진짜 모순을 덮으면서 시스템 문제를 개인 문제로 돌려버린다. 겉으로 진보적이고 의식 있게 보이는 관용 담론이야말로 오히려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게다가 문화는 개인이  자신 의지력으로 혹은 교육과 교화로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유발 하라리도 관용의 한계를 제시하기 위해 ‘인종주의’와 ‘문화주의’를 서로 대비하여 설명한다. “사람들은 전통적인 인종주의에 대해서는 영웅적인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사이 전쟁터가 ‘문화주의’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 결과 전통적인 인종주의는 줄어들고 있는 반면, 오늘날 세계는 ‘문화주의자’로 가득하다. 현재 흑인이 열등한 유전자를 가졌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주장은 사회에서 퇴출된 반면, 흑인이 문제가 있는 하위문화에 속해있기에 범죄율이 높다는 말은 흔하게 오간다. 우리는 생물학적 모욕에는 민감하지만 사회학적 모욕에는 둔감하다.



생물학에서 문화로 전선이 이동한 것은 단순히 의미 없는 용어 변경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실로 심오한 이동이며, 현실적인 여파는 아주 넓다. 우선 문화는 생물학보다 유연하다. 이 말은 한편으로는 오늘날 문화주의자가 전통적인 인종주의자보다는 ‘관용’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채택하는 한에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말이다. 그 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훨씬 큰 동화 압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동화에 실패하면 훨씬 가혹한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피부색이 짙은 사람에게 피부를 희게 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근거는 거의 없지만, 사람들은 아프리카계나 무슬림이 서구 문화의 규범과 가치를 택하지 않는 것은 문제 삼을 수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하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에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말만 듣게 되고 잘못은 자신이 뒤집어쓰고 만다.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는 세계의 문화적 갈등을 해결하고 인류를 결집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사회 문제를 개인들에게 일임하여 문화 문제로 해결하려고 했던 유명 인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인도 ‘성자’ 간디다. 간디는 ‘자기통제와 자기 정화, 고통 등 수년간 금욕을 실천하여 비폭력 저항에 필요한 용기가 다져진다고 믿었다. 간디 추종자들은 모두 공식적으로 순결과 가난, 봉사의 서약을 했으며, 단식과 운동, 노동과 기도를 수행해야 했다. 자기완성의 실천은 그 자체로 목적인 동시에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용감한 전사를 양육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개인적 자기완성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는데 꼭 필요한 기반이 형성된다. 이와 관련하여 간디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나부터 바꾸기 시작해야 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저항 신념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며 도덕적으로 무결하다고 주장했다. 비폭력 저항은 박해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상대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한다는 논리를 따른다. 그런데 만약 박해자가 양심이 없다면 양심을 향한 비폭력적 호소는 실패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가는 양심이 없다. 이렇게 인간적 양심에 호소가 불가능한 곳에서 비폭력 저항은 악을 상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간디 사상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나치 정권의 하인리히 같은 사람에게는 소용없다는 의미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에게 간디의 비폭력 저항은 집단 자살을 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 신념이 보편적이지 않다면, 도덕적으로는 무결할까? 안타깝게도 간디가 자신을 벌하며 단행한 채식주의 식사 때문에 그 자신과 아내, 자녀들은 아사할 뻔했고, 그 밖에 여러 가지 규율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가족들과 불화를 일으켰다. 간디 가족 중 그 누구도 간디주의를 온전히 실천할 수 없었다. 추종자들 또한 많은 이가 간디를 따라 운동을 진행하다 이를 거부하거나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충격적인 폭력을 행사하곤 했다. 간디는 통일된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친선을 위해 생의 마지막 30년을 바쳤는데, 그 끝은 결국 공동체 간 잔인한 폭력과,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간디는 말년의 충격적 결말로 인해 자신의 필생 사업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여겼다.‘ 
















간디는 인간이 모두 똑같고, 각 개인 영혼은 우주적인 영혼의 일부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에 대한 관용이 당연했다. 하지만, 간디 삶에서 우리는 관용의 한계를 볼 수 있다. ‘간디는 진정으로 이 세계를 변화시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상주의자였다는 점이 간디의 궁극적인 약점이었다. 가난을 영적인 정화라고 찬양하고 도시를 비도덕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굶주리고 직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많은 영웅주의를 요구했다. 다른 사람 생각도 똑같으리라고 가정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성인은 어떤 영감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지만 본받을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사람들에게 장기간에 걸쳐 관용을 보이라고 가르치고 설득하고 강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도 독립 후 그는 자신 성취를 가장 큰 실패로 보았다. 독립 후 인도가 너그러움으로 순화되고 영적인 자기 발전에 매진하고 폭력을 거부하는, 그가 꿈꾸었던 그런 나라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도가 갈라져 나와 파키스탄이라는 별도 나라를 세운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명백하게 양립할 수 없는 것을 끌어안는 인도의 다원적인 재능과 상치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간디는 자신 적인 이슬람교도 지나를 힌두교 인도의 대통령으로 추대하고자 제안했다. 하지만 오직 간디만이 이런 교묘한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는 대단한 반감이 생겨났다. 이슬람교에게 너무 관대한 것처럼 보였기에 간디는 힌두교 광신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힌두교조차 이런 옹졸함을 잉태할 수 있다. 간디 삶을 보면 전통적으로 관용을 옹호하는 나라에서 지극히 뛰어난 인물에 의해 관용이 실천될 때도, 결국 불충분한 처방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 박애라는 세 가지 가치를 중심으로 한다. 프랑스가 의도했던 박애는 관용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 후 이 이상(理想)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이 가치 세 개가 서로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즉 지나친 자유 혹은 특정 형태의 자유가 너무 지나치면 평등을 침해할 수 있다. 혹은 지나친 평등 혹은 특정 형태의 평등이 너무 지나치면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이에 못지않게 대단히 중대한 문제는 세 번째 가치에 해당하는 박애와 자유, 평등의 이율배반적 관계다. 즉 지나친 관용은 자유와 평등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90년대의 미국은 50년대 심지어는 70년대의 미국에 비해 훨씬 더 관용적이었다. 그런데 미국인은 해가 갈수록 더 관용적이 되었지만 동시에 더욱 불평등해졌다. 관용과 평등 사이에는 일종의 철칙이 있어서, 관용적 개인주의 성장에 따른 평등 가치 쇠퇴는 필연적 현상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곳에서 ‘차이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차이는 적어도 쉽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차이가 교정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관용이 요구되는 것이다. 쉽게 변하거나 혹은 교정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차이는 관용의 대상이 아니다. 관용 담론은 차이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는커녕, 차이의 문제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기에 관용은 실질적인 평등과 자유의 추구를 노골적으로 방해한다. 관용은 연대나 공동체가치 문제마저도 포기하게 만든다. 대신에 관용은 우리를 분리시키고 갈라놓으려 하며, 이러한 사회적 고립을 차이로 인한 필연적인 것으로 둔갑시키고 그 차이를 관용하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게다가 관용의 비대칭성은 대체로 간과된다. 관용받는 이들은 종종 관용의 능력을 결여한 이들로 간주된다. 관용 담론의 이러한 이분법적 구조는, 지배와 종속의 문제까지 정당화 한다. 관용은 관용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관용을 베푸는 이들에 비해 열등하고 주변적이며 비정상적인 이들로 표지(mark)하는 일인 동시에, 상대가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될 경우 부과할 수 있는 폭력 행위를 사전에 정당화한다.‘ 
















‘불교에서 자비는 관용이나 연민, 동정과는 거리가 멀다. 관용이나 동정 연민에는 주는 자와 받는 자의 비대칭성이, 제거할 수 없는 지위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이방인에 대한 환대 또한 그렇다. 갈 곳 없는 이주자, 쫒기는 이방인에게 내미는 환대 손길은 그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주인 행세다. 부자들이 자신에 대한 빈민의 동정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화를 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따라서 동정이나 환대는 평등성과는 거리가 멀다.



달라이 라마는 인간 아닌 것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이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을 얻고자 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함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평등한 자비심이 나온다고 말한다. 연민의 감정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강조되어 있다. 평등한 자비심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평등 인식에서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중생은 ‘부처’라는 점에서 평등하다. 부처에 높고 낮음과 멀고 가까움이 어디 있으랴! 자비 평등심은 부처 간의 평등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비란 모든 중생에 대해서 부처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친하든 낯설든, 멀든 가깝든, 심지어 친구든 적이든 모두가 부처라면, 모두를 부처로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도와주는 것이 바로 잠재적으로 부처인 내가 마땅히 행할 바이다. 자비란 스스로가 부처로서, 자신과 만나는 모든 잠재적 부처들에 대해 갖는 마음이고, 그들에 대해 행하는 바다.‘ 
















세상의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사랑과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가르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구원되어야 할 영원한 자아(혹은 영혼)를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자아를 갖는 한 이기성은 필연적이기에 관용이라는 비이기성을 우리가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4세기 불교학자 세친에 따르면, 어떠한 유형의 유아론(有我論)을 믿던지, 즉 무아(無我)를 받아들이지 않는 한 결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했다. 무아(無我)인 개인은 문화를 토대로 자신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화적인 정체성은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개인에게 그저 관용으로 문화를 극복하라는 요구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며, 진짜 평등에서 멀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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